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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또는 경찰관’ 탄생의 비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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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최현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최현철 사회디렉터

최현철 사회디렉터

“피의자를 체포하거나 구속영장을 집행하는 또는 사법경찰관은…(후략)”

혹시 이 문구의 의미가 단번에 이해되는지. 그렇다면 독해 능력이 보통사람보다 탁월하거나,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에 대한 애정이 특별히 많은 사람일 것 같다.

이 문구는 민주당이 소속의원 172명 전원의 동의를 받아 제출한 소위 검수완박 법안(형사소송법 개정안 214조 2의 2항)의 일부다. 개정안은 처음부터 끝까지 수사 주체에서 검사를 빼고 그 자리에 사법경찰관으로 대체하거나, 검사와 경찰 중 경찰만 남기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워낙 같은 문구의 반복이많아 “기존 조문을 워드프로세서에 복사해와 ‘찾아 바꾸기(Ctrl+F)’ 기능을 활용해 만든 법안 같다”는 비판이 나온다. 위 조항도 ‘피의자를 체포하거나 구속영장을 집행하는 검사 또는 사법경찰관’이라고 쓰인 원 조문에서 검사만 빼다 보니 벌어진 결과다.

‘검수완박’ 법안 졸속·모순 덩어리
검찰 수사권 뺏으려다 국민만 피해
국민에게 설명 못하는 진짜 이유는

단어 하나로 트집 잡는 게 치사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리 쉽게 생각할 사안은 아닌 것 같다. 기본법 중 하나인 형사소송법을 개정하면서 이런 사소한 오류도 바로잡지 못한 채 제출한 졸속 법안이란 방증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국민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법안을 정교하게 만들 의지나 성의는 없고, 오직 검사가 수사를 못하게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 이 조항에서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 같다.

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그러니 개정안에는 법 자체의 모순, 현실과의 괴리, 다른 법과의 충돌이 수도 없이 발견된다. 처음엔 6대 중요범죄에 대한 검찰 수사권을 빼앗는 문제가 커 보였다. 뇌물과 공무원 비리 등 굵직한 수사를 못 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 퇴임 후 혹시 검찰이 전 정권 비리 수사를 하는 상황을 미리 차단하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비판이 거셌다.

지금 하던 수사도 중단하고 석 달 안에 경찰에 넘기도록 했다. 그 안에 중대범죄수사청 같은 대체 기관을 만들면 된다는 것이 여당 주장이다. 만약 시일 안에 만들지 못한다면? 내심 그게 더 좋겠지만, 내놓고 기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사이 일부 범죄의 공소시효가 끝나는 것은 안중에 없다.

문제는 성의 없이 만든 ‘Ctrl+F’ 법안의 후유증은 평범한 시민들의 몫이라는 점이다. 우선 꽤 많은 법률에서 중요한 위반 사항을 검찰에 고발하도록 한 조항들이 공중에 붕 뜨게 된다. 공정위가 가격 담합을 적발해도, 증선위가 심각한 주가조작을 적발하더라도,  국회에서 위증한 사실이 드러나도 고발할 곳이 없어진다. 개정안이 통과되면 관련 법도 언젠가 정비되겠지만, 그사이 발생하는 범죄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수사가 ‘증발’하게 된다. 이런 법 규정이 한둘이 아니다. 이걸 석 달의 유예기간 동안 모두 찾아서 수정 입법을 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참여연대 공익법센터 소장 출신 양홍석 변호사는 “사법 시스템 전체가 그 즉시 셧다운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지금 이대로 입법하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꼬집었다.

권한을 독점한 경찰을 통제할 길이 사실상 사라진다. 당신이 억울하게 구속됐는데 검찰이 기소하기 전 혐의가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도 검사는 풀어줄 수 없다. 경찰이 다시 수사해 결정해야 한다. 거꾸로 불구속 피의자를 가둬야 할 필요가 생겨도 경찰이 영장을 신청하지 않는 한 구속할 수 없다. 경찰이 작성한 조서가 잘못됐더라도 검사가 수정할 수 없다. 수정하기 위한 조사도 수사인 만큼 경찰만 할 수 있다. 서류가 오가는 동안 사건은 한정없이 늘어진다.

그런데도 개정안은 고소·고발이 접수되면 3개월 이내에 수사를 마치고 검찰에 송치하거나 종결해야 한다는 조항을 신설했다. 지금도 사건이 쌓여 제때 처리 못 하는 것이 경찰의 현실이다. 만약 죄가 분명한데 기한을 넘기면 어떻게 될까? 변호사라면 당연히 형사소송법 위반을 들어 무죄나 공소기각을 주장할 것이다. 체포할 때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를 고지하지 않았다(미란다 원칙 위반)는 이유로 무죄 판결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게 나오는 게 현실이다. 당신의 고소나 고발은 시간 속을 헤매다 허공으로 사라질 수 있다.

민주당은 이 법안을 4월 내에 통과시키기 위해 위장 탈당, 회기 쪼개기 등 온갖 꼼수를 동원하기 시작했다. “지금 아니면 개정이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수사와 기소의 분리가 그토록 중요하다면 ‘또는 경찰관’ 같은 엉터리 법률을 날치기로 통과시킬 계획을 짜기에 앞서 국민을 설득하려고 시도할 텐데 별로 그럴 생각은 없어 보인다. 법 개정 정도가 아닌 대통령을 탄핵한 경험이 있는 국민을 믿지 못해서일까? 그보다는 국민에게 내놓고 설명할 수 없는 음험한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