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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면 돼" 원빈처럼 벽 짚어라…저출산 日 황당 연애교육 [도쿄B화]

중앙일보

입력

도쿄B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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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의 [도쿄B화]

※우리와 비슷하면서도 너무 다른 일본. [도쿄B화]는 사건사고ㆍ문화콘텐트 등 색다른 렌즈로 일본의 뒷모습을 비추어보는 중앙일보 도쿄특파원의 연재물입니다.

연애를 하고 싶으나 잘하지 못하는 이들을 '연애 약자(恋愛弱者)'라고 칭한다면, 이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 같은 게 있을까요. 일본 내각부가 지난주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가베돈(壁ドン) 연습'을 독려하는 것도 그중 하나라고 합니다.

일본 영화 '히로인 실격'의 가베돈 장면.

일본 영화 '히로인 실격'의 가베돈 장면.

드라마 '가을동화'의 가베돈 장면.

드라마 '가을동화'의 가베돈 장면.

'가베'는 '벽(壁)', '돈(ドン)'은 물건이 부딪힐 때 나는 소리를 뜻하는 의성어로, '가베돈'은 상대를 벽으로 밀어붙여 팔로 둘러싸고 고백하는 행동을 뜻합니다. 일본 만화나 드라마에서 낭만적인 고백법으로 자주 등장해 2014년에는 유행어 대상에도 올랐지만, "원치 않는 이에게 하는 가베돈은 폭력"이라는 반발에 휩싸이며 이제는 거의 쓰이지 않는 단어가 됐습니다.

'가베돈'이 등장한 내각부 자료의 제목은 '풍요롭고 행복한 인생 100년 시대를 위한 연애의 역할'이었습니다. 미혼·만혼, 독신 가구 증가와 이로 인한 저출산 문제 해결 방안을 연구하는 전문가 모임에서 만들어진 자료였죠. 작성자인 고바야시 준(小林盾) 세이케이(成蹊)대 교수는 자료에서 사람들 사이에는 '연애 격차'가 있다면서 '연애 약자' 지원을 위해 가베돈을 비롯한 고백법, 연애 세미나 등을 통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결혼 지원사업 중의 하나로 가베돈 등 고백법 연습, 연애 세미나 등을 든 일본 내각부 자료.

결혼 지원사업 중의 하나로 가베돈 등 고백법 연습, 연애 세미나 등을 든 일본 내각부 자료.

이 문서에는 그 외에도 오해를 살만한 내용이 많았죠. "남자는 몸무게 80㎏, 여자는 60㎏이 넘으면 연애할 자격이 없다" 등 세간에 떠도는 이야기들이 여과 없이 담기기도 했습니다. 내각부는 즉시 "참가자가 만든 자료일 뿐 정부의 공식 입장이 아니다"고 밝혔지만 소셜미디어(SNS)엔 비난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제발 쓸 데 없는 데 세금 쓰지 말라", "연애를 하든 안 하든 내 맘이니 가만히 좀 두세요" 등입니다.

연애 안 하는 이유? "귀찮아서"

정부가 왜 자료까지 만들어가며 개인의 연애에 참견할까요. 이유는 인구입니다. 연애도, 결혼도 하지 않는 젊은이들이 늘어나면서 일본의 출산율은 2005년 1.26명까지 떨어졌다가 2020년에는 1.34명으로 소폭 올랐습니다. 한국(2020년 기준 0.84명)보다는 높지만 OECD 평균(2019년 기준 1.61명)에는 미치지 못하는 수준입니다. 50세까지 한번도 결혼을 하지 않는 사람의 비율인 생애 미혼율도 2020년 기준 남자 25.7%, 여자 16.4%에 이릅니다.

일본 드라마 '사랑할 수 없는 두 사람'의 한 장면. [사진 NHK]

일본 드라마 '사랑할 수 없는 두 사람'의 한 장면. [사진 NHK]

2015년 조사이긴 하지만 일본의 20~30대 미혼 남녀 중 남성의 70%, 여성의 59%가 연애를 하지 않고 있다는 내각부 자료도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연인이 있었으면 좋겠냐 물었더니 37.6%가 "필요 없다"고 답했죠. 이유로는 "연인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어서", "귀찮아서" 등이었습니다.

2019년 한 결혼정보회사가 20~39세의 일본 미혼 남녀 2400명을 조사한 데 따르면 62.4%가 "연애에 재능이 없다"고 스스로를 평가했네요. 그리고 이 중 35.1%는 "교제 경험이 없다"고 답했습니다.

'에이로맨틱·에이섹슈얼'의 등장 

최근에는 아예 연애와 섹스에 관심이 없다고 선언하는 이들도 등장했습니다. 타인에게 연애 감정을 품지 않는 '에이로맨틱(aromantic)', 다른 사람들에게 성적으로 끌리지 않는 '에이섹슈얼(asexual)'을 정체성으로 삼은 사람들이죠.

'에이로맨틱·에이섹슈얼'이란 말은 올해 1월~3월 NHK에서 방송된 드라마 '사랑할 수 없는 두 사람(恋せぬふたり)'에 나오면서 널리 알려졌습니다. 드라마의 주인공인 사쿠코는 누군가를 사랑한 적이 없고, 왜 키스를 하는지도 모르겠다고 말하는 여성입니다. 그가 역시 연애와 섹스를 원하지 않는 남자 다카하시와 만나 동거를 시작하게 되죠.

일본드라마 '사랑할수없는 두 사람'. [사진 NHK]

일본드라마 '사랑할수없는 두 사람'. [사진 NHK]

연인도 부부도 아닌 이들의 동거에 주변인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입니다. 하지만 둘은 사랑에 빠지는 대신 끝까지 '사랑하지 않는' 정체성을 지키며 함께 해 나갈 방법을 고민합니다. "결국 내가 살아가는 방식, 나의 행복을 결정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를 되뇌면서요.

아무리 국가가 나서 '가베돈 고백법'을 가르쳐도 저출산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겁니다. 그보다 오히려 '에이로맨틱·에이섹슈얼'을 포함한 다양한 인생의 방식을 인정하고 누구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게 장기적으로 출산율을 높이는 데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요. '연애→결혼→출산'이란 공식에 갇히지 않아야 여러 형태의 가족을 꿈꾸는 게 가능해지고, 아이를 낳고 키워보자는 결심도 할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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