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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조 기업 30개…'경상도'만한데 세계 최고 스타트업 국가 된 비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혁신창업의 길] '창업국가' 이스라엘 현지 르포 

이스라엘 하이파에 들어선 글로벌 기업 R&D센터들. 건물 위에 인텔 로고가 보인다. 최준호 기자

이스라엘 하이파에 들어선 글로벌 기업 R&D센터들. 건물 위에 인텔 로고가 보인다. 최준호 기자

 이스라엘 최대 도시 텔아비브의 북쪽과 맞닿아있는 해안 도시 헤르츨리야. 최근 들어 유니콘(기업가치 1조원인 상장 전 회사) 등 성공한 스타트업들이 몰려들고 있는 곳이다. 지난 10일 중앙일보가 찾아간 헤르츨리야. 해안변 마리나에는 돛대를 높이 세운 호화 요트들이 가득했다. 마리나에서 동쪽으로 2㎞ 가까이 떨어진 도심에 ‘5분 급속 충전 배터리 시스템’으로 주목받고 있는 이스라엘 스타트업 ‘스토어닷’(StoreDot)이 자리하고 있었다. 최근 스웨덴 볼보자동차가 전기차 배터리 개발을 위한 투자를 밝혀 관련 업계의 화제가 된 기업이기도 하다. 스토어닷은 유ㆍ무기 화합물을 합성해 기존 리튬이온 배터리의 성능을 혁신적으로 개선한 특허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충전시간은 기존 휘발유ㆍ경유차와 거의 차이 없는 5분. 시간을 단축하면서도 에너지 밀도와 가격대는 동일한 수준으로 유지해 전기차 진화의 장벽인 주행거리와 충전 불안감을 동시에 잡는다. 오는 2024년까지 5분 충전으로 100마일(약 160㎞)을 달리는 배터리 개발이 당면 목표다. 2028년에는 이를 3분 안으로, 또 2032년에는 2분으로 충전시간을 줄여나간다는 중장기 목표도 세워두고 있다. 스토어닷은 계획만 거창한 스타트업이 아니다. 세계 2위의 에너지그룹 BP, 일본 전자부품업체 TDK, 한국의 삼성벤처스 등 세계 주요 글로벌기업들이 주요 투자자다.
스토어닷의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는 도론 마이어스도프 박사다. 그는 이스라엘 대표 공과대학인 테크니온 출신의 경영공학 박사다. 2012년 텔아비브대학 재료공학과 연구원들과 함께 반도체용 나노소재를 연구하다, 배터리 쪽으로 사업분야를 확장했다.
마이어스도프 박사는 “스토어닷은 배터리 관련 100개 이상의 특허를 가지고 있고, 35명의 박사 연구원들이 있어 텔아비브대학 2개 학과의 교수진 연구 역량을 가지고 있다”며“2024년이면 전기차용 초고속 충전 리튬이온 배터리를 양산하고, 이듬해에는 우리 배터리가 도로 위를 달릴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스라엘은.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이스라엘은.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인구 대비 스타트업 수 세계 1위, 나스닥 상장 3위

스토어닷을 나와 텔아비브에서 1번 고속도로를 타고 동쪽으로 한 시간여를 달리니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이 나타났다. 고속도로가 끝나는 초입, 검은 정장과 챙 모자, 하얀 셔츠에 수염과 옆머리를 기른 유대교 하레디파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스라엘 최고 종합 국립대학 히브리대 인근, 키리얏 하마다 스트리트 5번지에 위치한 바이오 스타트업 ‘알파타우’(AlphaTAU)를 찾았다. 고형 종양 치료에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있다는 새로운 방사선 의료기기 알파다트(Alpha DaRT)를 만드는 곳이다. 알파 방사선을 이용해 국소부위에 강력한 고선량 에너지를 방출해 효과를 높이면서도 짧은 반감기로 피폭 위험성을 줄이는 방식이다. 지난해 6월 미국 FDA로부터 피부암 등의 환자 치료를 위한 방사선 암치료 혁신의료기기 지정을 받았다. 2015년 창업한 신생기업이지만, 지난 2월 기존 상장기업과 합병하는 방식으로 미국 나스닥 입성에 성공했다. 알파타우 기술의 시작은 텔아비브대학이다. 천체물리학과의 이츠하크 캘슨 교수와 같은 의과대 요나 케이사리 교수가 개발한 기술을 바탕으로 창업한 사례다.

이스라엘이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스타트업 국가로 주목받고 있다. 우리나라 경상남북도 면적에 불과한 면적에, 인구 920만 명을 조금 넘는 소국이지만 인구 1400명당 스타트업 1개로, 세계 1위다. 스토어닷이나 알파타우처럼 혁신기술로 무장해, 세계의 이목을 끄는 스타트업이 한둘이 아니다. 기업가치 1조원이 넘는 유니콘 기업만 30개를 넘는다. 미국 나스닥에 상장된 기업 수는 98개로, 미국ㆍ중국에 이어 세계 3위다. 눈에 띄는 글로벌 대기업 하나 없이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4만3610달러(세계은행, 2020년)에 달하는 이유다. 구글ㆍ인텔ㆍ마이크로소프트ㆍ삼성과 같은 글로벌 대기업 400여개사가 R&D센터라는 이름으로 들어와 있다. 대부분 이스라엘 스타트업을 인수한 형태다. 히브리대 교수가 설립한 자율주행차량 솔루션 회사 모빌아이가 대표적이다. 2017년 인텔에 인수되면서 자회사 겸 글로벌 연구·개발(R&D) 기지로 변신했다.

 이스라엘의 전기차용 초고속 충전 배터리 시스템 스타트업 스토어닷. 텔아비브 북쪽 헤르츨리아에 있다. 최준호 기자

이스라엘의 전기차용 초고속 충전 배터리 시스템 스타트업 스토어닷. 텔아비브 북쪽 헤르츨리아에 있다. 최준호 기자

대학·연구소마다 독립된 기술사업화 조직

이스라엘에 세계가 탐내는 스타트업들이 넘쳐나고 있다. 대학과 연구소의 연구개발이 기술이전과 창업으로 이어지는 창업 생태계의 선순환이 잘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도 이스라엘과 함께 국내총생산(GDP)대비 연구개발(R&D) 투자 1,2위를 다투고 있는데, 한국의 현실은 정반대다. 성과없는 투자 탓에 ‘코리아 R&D 패러독스’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이스라엘이 세계적 스타트업 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이 뭘까.

대표적 비결 중 하나가 대학과 연구소의 독립화된 기술사업화 조직이다. 세계 5대 기초과학연구소 중 한 곳으로 유명한 와이즈만연구소의 예다, 이스라엘 대표 이공계 대학인 테크니온의 T-3, 히브리대의 이쑴, 텔아비브대의 라못, 벤구리온대의 BNG테크놀로지스, 바일란대학의 BIRAD 등이 대표적이다. 히브리대학 이쑴의 경우, 기술이전을 통해 연매출 2조4000억원을 창출해낸다. 모빌아이가 이쑴을 통해 설립됐다. 이들 기술이전회사의 공통된 특징은 기술사업화 전문가들이 소속 대학ㆍ연구소와 독립적으로 기관을 운영한다는 점이다.
최수명 한국산업기술진흥원 이스라엘 거점 소장은 지난해 말 펴낸 ‘글로벌 산업정책 동향-이스라엘 기술지주회사’보고서를 통해 “아직까지 파일럿 단계에 머물고 있는 한국 대학과 달리 이스라엘은 대학 기술지주회사가 연구개발된 기술을 상업화 단계까지 이끌어가는 창업 생태계가 잘 안착돼 있다”고 분석했다.

 이스라엘 하이파에 들어선 글로벌 기업 R&D센터들. 필립스와 마이크로소프트의 로고가 보인다. 이들은 모두 이스라엘 스타트업이 글로벌 기업에 인수합병된 경우다. 최준호 기자

이스라엘 하이파에 들어선 글로벌 기업 R&D센터들. 필립스와 마이크로소프트의 로고가 보인다. 이들은 모두 이스라엘 스타트업이 글로벌 기업에 인수합병된 경우다. 최준호 기자

이스라엘 창업 생태계 이끄는 혁신청 

‘창업국가’(Start-up Nation) 이스라엘의 또다른 비결은 정부기구 ‘혁신청’(Israel Innovation Authority)이다. 스타트업 생태계 지원을 통해 이스라엘의 산업ㆍ경제의 기술혁신을 촉진하는 게 그 역할이다. 1976년 이스라엘 산업무역부 산하에 만든 차관급 조직 수석과학관(Chief Scientist)실이 모태였다. 2015년에는 이 수석과학관실이 혁신청이란 이름으로 독립했으며, 지난해 소속 부처도 경제부에서 혁신과학기술부로 바뀌었다.
혁신청 의장 겸 수석과학자인 아미 아펠바움은 “이스라엘 혁신청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대학 교수들이 연구한 결과의 기술이전과 상업화를 촉진하는 것”이라며 “이스라엘은 이제 스타트업 내이션(Start-up Nation)에서 스마트업 내이션(Smart-up Nation)으로 도약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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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이스라엘은 이 같은 창업 생태계의 선순환 외에도 지정학적 위치와 ‘후츠파’로 불리는 도전 정신이 사회ㆍ문화 속에 깔려 있다고 진단한다. 하이파에서 만난 우리 시반 테크니온 총장은 “이스라엘은 적국으로 둘러싸인 절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새로운 것을 발명해내야 했다”며“이스라엘은 단순한 스타트업 네이션(Start-up Nation)이 아니라 국가 자체가 1948년에 설립된 스타트업인 셈”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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