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를 허둥대게 만든 사건
4월 15일, 러시아의 순양함 모스크바가 침몰했다. 우크라이나는 자신들이 발사한 지대함 미사일의 공격에 의한 격침이라고 주장하는 데 반해 러시아는 화재에 의한 사고라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러시아가 주력함을 비참하게 상실했다는 결과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격침이면 무능함을, 사고면 한심함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이기에 어느 쪽으로 결론이 나도 러시아가 망신인 사건임에는 분명하다.
어쨌든 러시아가 그날부터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키이브를 향해 무차별 공격을 퍼붓고 있음을 보면 약이 상당히 올랐음은 틀림없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50여 일간 공격을 가했음에도 키이우 점령에 실패하자 북부에서 전력을 철군해 동부의 돈바스 공략에 투입하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이처럼 우선순위가 밀린 키이브를 향해 중구난방식 공격을 다시 가한다는 것은 순전히 감정적인 대응이다.
러시아가 허둥대는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모스크바함이 차지하는 위상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흑해함대의 기함인 데다 함명이 러시아의 심장인 모스크바로 명명되었다는 점으로 모든 것이 설명된다. 모스크바함은 현재 러시아 해군이 운용 중인 수상전투함 중에서 2척의 키로프급 순양전함 다음으로 강력한 핵심 전력이다. 2척의 동급함이 남아있으나 이번 손실로 전력 공백이 클 수밖에 없다.
그런데 러시아의 자존심인 모스크바함의 고향은 정작 우크라이나다. 결론적으로 우크라이나에서 탄생했으나,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다가 우크라이나에서 생을 마감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곳에서 제작된 자매함들과 비교해도 유독 인연이 질기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흥미로운 생을 산 모스크바함의 이면에는 냉전, 소련 해체 그리고 신냉전으로 이어지는 격렬한 시대상이 함축적으로 담겨있다.
모스크바함은 소련이 미국의 항모를 잡기 위해 1982년부터 차례로 취역시킨 3척의 프로젝트 1164형 순양함 중 초도함이다. 그런데 이들이 건조된 곳은 우크라이나의 미콜라이우 북부조선소(옛 61커뮤나즈조선소)다. 과거 소련은 함정을 주로 4곳의 군용조선소에서 만들었는데, 그중 2곳이 미콜라이우에 있었다. 그래서 모스크바함 외에도 러시아 유일 항모인 쿠즈네초프, 중국 최초 항모인 랴오닝처럼 우크라이나가 고향인 함정들이 많다.
역사의 격변기를 관통하다
지금은 원인 분석이 많이 이루어졌으나 1991년에 있었던 소련의 해체는 당시에는 그야말로 순식간 벌어진 사건이었다. 그래서 소련군뿐 아니라 이들을 뒷받침하던 관련 인프라도 엄청난 혼란에 빠졌다. 핵폭탄 같은 전략 무기는 외세까지 관여해서 교통정리가 이루어졌을 정도였다. 반면 재래식 무기의 대부분은 새롭게 탄생한 국가들이 소련 시절에 자국 영토 내에 보유한 전력을 그냥 승계하는 식으로 나뉘었다.
그런데 흑해함대를 놓고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다툼을 벌였다. 함대의 모항인 세바스토폴이 크름반도에 위치해서 우크라이나가 권리를 주장했지만, 흑해에 대한 영향력을 순순히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러시아보다 경제 상황이 더 나쁜 우크라이나가 함대를 감당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결국 장기간 협상 끝에 흑해함대의 81.7%를 러시아가 인수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더불어 우크라이나는 매년 1억 달러를 지불받는 대신 러시아가 세바스토폴 기지를 2017년까지 조차하고 2만 5000명의 병력을 주둔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흑해함대의 미래가 결정되면서 그때까지 소속이 어정쩡했던 많은 함정의 관할이 러시아 해군으로 변경됐다. 이때 오버홀에 착수한 직후 소련의 붕괴로 말미암아 방치 상태에 있던 슬라바도 함명을 모스크바로 바꾸어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1997년 1월 31일, 협정문에 서명하기 위해 키이브를 방문한 옐친 러시아 대통령은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영토를 노리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하며 선린관계를 공고히 했다. 그리고 2010년에는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친러파인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의 주도로 우크라이나는 흑해함대 주둔을 2042년까지 연장하는 조약까지 러시아와 체결했다. 그렇게 기함 모스크바를 주축으로 우크라이나에 주둔한 러시아 흑해함대는 양국 우호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러시아는 2014년 유로마이단 혁명을 빌미로 크름반도를 강제 합병하며 흑해함대 관련 조약을 무효로 했다. 그리고 올해 2월 24일에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역사적으로 가장 밀접했던 양국 관계는 파탄에 이르렀다. 러시아는 나토의 동진을 막고 친나치 세력을 분쇄하기 위함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옛 소련의 부활, 즉 냉전시대로의 회귀가 진정한 목적인 푸틴의 의지 때문에 벌어진 전쟁이었다.
모스크바함은 지금까지 언급한 격변기에 공교롭게도 항상 중심에 있었다. 냉전 시기에는 미국에 대항하는 강력한 주먹으로 활약했고 소련이 해체된 후에는 주인 없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러시아로 소속이 바뀐 후에는 흑해를 중심으로 주변을 압박하는 수단이 되었다. 자매함들과 달리 참전도 두 번이나 했고 결국 고향 앞바다에서 생을 마감했다. 어지러웠던 시대를 관통한 소련 해군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