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양정무의 그림세상

화가 반 고흐, 화상 반 고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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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빈센트 반 고흐는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작가이다. 그의 작품이 있는 곳엔 언제나 관람객들로 북적이며 미술시장에서 거래되는 그의 작품 가격은 늘 천문학적이다.

반 고흐가 오늘날 누리는 엄청난 명성은 그가 살아생전에 겪었던 고독한 삶과 너무나 강하게 대조를 이룬다. 그는 37살로 짧은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이렇다 할 인정을 받지 못했다. 순전히 독학으로 그림을 배웠고, 작가로 활동한 시간도 매우 짧았다. 미술계의 아웃사이더였던 그가 어떻게 화업에 전념하여, 비록 사후라도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을까.

화가 되기 전 화랑서 일해
좋은 그림 보며 안목 키워
한국 미술시장 활기 넘쳐
아트딜러 활약에 큰 기대

반 고흐, 건초더미, 1888. 종이에 수채화로 그린 작은 풍경화이지만 2021년 11월 경매에서 3580만 달러에 낙찰됐다. [사진 크리스티 옥션]

반 고흐, 건초더미, 1888. 종이에 수채화로 그린 작은 풍경화이지만 2021년 11월 경매에서 3580만 달러에 낙찰됐다. [사진 크리스티 옥션]

반 고흐의 삶을 살펴보면 독특한 이력이 하나 눈에 띈다. 그는 화가가 되기 전에 아트딜러, 즉 그림을 사고파는 화상(畫商)이었다. 보다 정확히 말해서 집안이 아트딜러와 관계가 깊었다. 삼촌 중 한 명이 성공한 아트딜러였는데, 이 삼촌의 조언에 따라 반 고흐는 첫 직장을 화랑에서 얻는다. 16살 이른 나이에 미술시장에 발을 디딘 셈이다.

반 고흐는 당시 유럽 최고의 화랑이었던 구필화랑의 헤이그 지점에서 일하기 시작해서 브뤼셀·파리 지점을 거쳐 런던 지점에도 근무한다. 그가 1876년까지 총 7년간씩이나 화랑에서 근무하는 것으로 봐서, 반 고흐에게 그림 파는 일은 적성에 맞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는 23살에 화랑 일을 결국 그만두는데 이것도 미술이 상업적으로 거래되는 것에 대한 염증이었다기보다는 직속상관과의 불화가 문제였다.

크게 보면 반 고흐는 37년간 생애 중에 화가로 10년, 화상으로 7년간 살았다. 아트딜러로 일한 경력은 결코 짧지 않으며, 특히 여기서 얻은 경험은 화가로 빠르게 성장하는 데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예를 들어 반 고흐는 화랑에서 일한 덕분에 명작의 세계를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화가의 길로 들어가면서 수없이 따라 그리던 농민화가 밀레의 그림도 사실 구필화랑에서 자주 거래되던 그림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아트딜러로 활동하면서 그림 보는 법뿐만 아니라, 좋은 그림은 언젠가는 상업적으로 인정받는 것을 생생히 체득했다고 볼 수 있다.

반 고흐,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 1887. 강렬한 색채와 함께 속도감 있는 붓질이 생동감을 더해준다.

반 고흐,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 1887. 강렬한 색채와 함께 속도감 있는 붓질이 생동감을 더해준다.

반 고흐는 건강이 악화되는 가운데도 작은 붓질 한 획에도 정성을 다했다. 그의 작품 앞에 서면 먼저 화려하고 강렬한 색채에 놀라는데, 이런 시각 효과가 혼신을 다한 붓터치들로 짜여있다는 점을 알고 나면 더 크게 감동한다. 물론 디테일까지 살리려는 집요함은 반 고흐 자신의 개성일 수도 있지만, 좋은 그림은 결국 인정받는다는 신념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오늘날 세계적인 작가들 뒤에는 유능한 아트딜러가 있는데, 반 고흐도 예외는 아니다. 그의 뒤에는 동생 테오라는 든든한 아트딜러가 있었다. 테오는 형처럼 아트딜러의 길을 걷는데, 잘 알려진 대로 그는 여기서 성공해서 형의 작품활동을 10년 가까이 지원해준다. 동생 테오는 반 고흐의 작품 세계를 인정한 첫 번째 인물이라고 할 수 있고, 상업적 관점에서 보면 그에게 반 고흐는 전속작가였다.

갑자기 반 고흐와 관련된 아트딜러 이야기를 길게 언급한 것은 근래 한국미술 시장이 크게 발전하면서 아트딜러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주목받고 있기 때문이다. 반 고흐가 살던 19세기 후반 유럽에서는 상업화랑들이 드디어 미술시장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왕공귀족들의 주문에 의해서 주도됐던 미술시장이 이때부터 시장을 통한 거래 방식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아트딜러들이 급성장하면서 화가와 구매자를 연결해 주었고, 이 덕분에 인상파 같이 당시 기준으로 파격적인 화풍의 그림도 구매자를 만날 수 있었다.

요즘의 한국미술 시장은 19세기 후반의 유럽에 뒤지 않게 급성장하고 있고, 몇몇 큰손이 아니라 다양한 구매자층의 참여에 의해 활기를 띄고 있다. 새롭게 미술시장에 들어온 구매층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은 결국 아트딜러들일 것이다.

우리나라도 좋은 작가를 발굴하고 그것을 설득력 있게 시장에 선보일 수 있는 안목 있는 아트딜러에 의해 좋은 작품들이 결국 시장에서 인정받는 풍토가 자리 잡게 된다면, 반 고흐처럼 희망을 갖고 작품에 매진할 작가들이 더 늘어날 것이 분명하다. ‘한국의 반 고흐’가 많아져야 한국 미술시장이 탄탄해질 것이 명확하기에, 우리 아트딜러들의 과감하고 적극적인 활약이 어느 때보다도 기대되는 시점이다.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