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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염재호 칼럼

윤석열정부와 27년 체제의 탄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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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이제 5월이면 윤석열정부가 출범한다. 우리 정치의 새로운 출발을 위해 청와대에서 용산으로 대통령집무실을 옮기는 것은 지난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상징적 의미가 크다. 그러면 윤석열정부는 어떤 시대정신을 반영하여 우리나라의 미래를 디자인하려고 하는가?

당장 윤석열정부가 중점을 두는 것은 코로나 사태 등으로 야기된 역대 최대 재정적자를 줄이는 일과 인플레이션 위험을 극복하는 경제 이슈가 될 전망이다. 한미협력을 비롯한 외교안보정책의 재정립도 중요한 과제이다. 검수완박과 한동훈 법무장관 지명으로 인한 야당과 갈등해결뿐 아니라 검찰개혁과정에서 나타난 사법체계 재정비도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승자독식 양당제 정치의 폐해
새 시대정신과 정치시스템 개혁
이념의 정치에서 생활의 정치로
87년 체제 넘어 27년 체제로

하지만 윤석열 대통령이 이런 단기적 현안에만 함몰되지 말고 우리 역사의 중요한 시대정신을 고민해보면 좋겠다. 윤석열정부의 탄생은 87년 민주화이후 우리나라 정치시스템의 한계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현직 검찰총장이 사임한 후 정치에 입문해 6개월 만에 야당 대선후보가 되고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은 국민의 기존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군사독재체제 25년도 긴 세월 같았지만 민주화 이후 87체제도 벌써 35년의 긴 세월이 흘렀다. 이제 우리나라가 또 한번 도약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정치를 바꿀 필요가 있다. 그것이 윤석열 정부가 끝날 즈음 우리나라가 87년체제를 청산하고 27년체제로 탈바꿈하기를 기대하는 이유이다.

87년체제로 민주화를 이룬 우리나라는 좌우양당의 정권교체를 통해 세계에서 민주주의가 가장 발전된 나라 중 하나로 여겨진다. 하지만 양당 체제에 의한 정치구조는 승자독식의 심각한 정치적 폐해를 낳았다. 집권당이 되면 정치권력을 독점하여 야당과 이를 지지한 국민들의 의견은 묵살한 채 독주하곤 했다. 좌우를 막론하고 승리하면 관직과 관변단체, 그리고 공기업 등에서 전리품을 나눠 갖는 엽관제의 폐해를 보여주고 국민의 뜻을 앞세워 독선으로 국정을 운영했다. 바로 이런 실망 때문에 유권자들은 수시로 정권을 교체해왔다. 그런데 이런 정권교체만을 보고 민주주의가 선진화되었다고 해석하는 것은 무리이다.

이번 대선 패배로 586세대 용퇴론이 나오는 가운데 더불어민주당의 김영춘 전 해양수산부 장관과 최재성 전 청와대 정무수석이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당의 중진인 김영춘 전 장관은 “이제 민주주의, 통일, 기득권 타파 등 거대담론의 시대가 아니라 생활정치의 시대가 되었다”고 은퇴의 변을 이야기했다. 최재성 전 정무수석도 “새 시대엔 새 소명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정치세력의 이념갈등의 한계를 토로했다. 새 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협치를 강조하지만 승자독식의 양대 정당 시스템에서는 불가능하다. 양김과 같은 절대지도자가 사라진 다음 정당간 합리적 중재의 정치는 자취를 감추었다. 강성발언이 토론을 주도하고 극단적 입장은 정치적 협상의 여지를 없앤다. 상대 정당을 적으로 여기고 국가의 미래나 민생보다 선거승리만을 생각할 때 협치의 정치는 사라진다.

이제 거대담론의 이념 정치를 뛰어넘어 생활의 정치로 우리 정치구도가 바뀌면 좋겠다. 양당이 적은 표차이로 선거결과를 독식하며 정권교체를 반복하는 현상은 막을 내려야 한다. 정의당, 국민의당, 새로운 물결과 같은 정당들이 기존 정당 사이에서 협치의 레버리지를 발휘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새로운 정치를 원하는 국민들을 대변해주는 정당들이 결국에는 양당에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가는 정치시스템은 선진적이지 못하다.

일본에서도 이념지향의 정치를 극복해서 야당이 승리한 경험이 있다. 1989년 일본 사민당은 중의원 선거에서 기존의 좌파이념보다 생활의 정치를 강조하는 여성후보들을 대거 공천했다. 이 선거에서 소위 마돈나 열풍으로 사민당이 대승을 거두어 일본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자민당 일당지배의 일본 현대정치사에서 처음으로 여소야대 현상을 만든 도이 다카고 사민당 당수는 이를 두고 “산이 움직였다”고 했다.

이제는 거대담론에 기대어 이익정치를 추구하는 정치계의 판도를 바꾸어야 한다. 87년체제 이후 발전된 시민단체들도 이념 지향보다는 생활의 정치로 변신해야 한다. 십여년간 국제공동연구로 일본 츠쿠바대학의 츠지나카 유타카(辻中豊) 교수와 필자가 한일시민단체 비교연구에서 얻은 결론은 일본의 시민단체들은 지역을 중심으로 bottom-up의 풀뿌리 조직인 것에 비해 한국의 시민단체들은 중앙중심으로 정치적 영향력이 강한 top-down 조직이라는 것이다. 정치참여로 영향력을 강화해온 경실련, 참여연대와 같은 시민단체보다 주민생활 밀착형 시민단체가 활성화되면 좋겠다.

이제 다당제, 의원내각제, 중대선거구제, 결선투표제, 독일식 비례대표제 등 다양한 정치시스템의 혁신에 대해 고민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 기존 정치권과 거리가 있는 윤석열 대통령이 시대정신을 읽고 우리나라의 미래를 위해 27년체제를 탄생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길 바란다.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