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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싸가 아싸로...MBTI도 변했다" 거리두기 2년이 만든 신인류 [호모 코로나쿠스 上]

중앙일보

입력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 해제를 하루 앞둔 17일 오후 서울 마포구 홍대입구역 인근에서 시민들이 걸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 해제를 하루 앞둔 17일 오후 서울 마포구 홍대입구역 인근에서 시민들이 걸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페스트 그리고 삶과의 싸움에서 인간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인식과 기억뿐이었다.” (알베르 카뮈,『페스트』)
한 도시를 휩쓴 역병 이야기는 소설이 아니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은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혹자는 기원 전후에 빗대 ‘BC(Before Corona)’와 ‘AC(After Corona)’로 구분하기도 한다. 2년여 만의 거리두기 해제는 아직 어색하다. AC의 세상은 그 이전과 달라졌을까. 코로나19는 우리에게 어떤 ‘인식과 기억’을 남겼을까.

AC, 성격이 바뀌었다

거리두기 해제 등의 영향으로 숙취해소음료 판매량이 급증하고 있다. 18일 오전 서울 시내 CU편의점에서 각종 숙취해소음료가 진열돼 있다. 뉴시스

거리두기 해제 등의 영향으로 숙취해소음료 판매량이 급증하고 있다. 18일 오전 서울 시내 CU편의점에서 각종 숙취해소음료가 진열돼 있다. 뉴시스

“제 MBTI(성격유형 검사)가 ‘E(외향)’에서 ‘I(내향)’로 바뀐 것 같아요.”
학창 시절 내내 ‘인싸(인사이더)’로 불렸다는 직장인 정모(27)씨의 고백이다. 그는 이제 더는 ‘인싸의 삶’을 추구하지 않겠다고 했다. 코로나19가 그에게 깨달음을 줬다면서다. “사회적이지 않은 삶도 좋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3년 차 직장인인 그는 거리두기가 해제된 지금 ‘포비아(공포증)’에 가까운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털어놨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회식이 속속 잡히고 있거든요. 전 전처럼은 못살 거 같아요.”

코로나19는 정씨에게 ‘애쓰지 않아도 인간관계가 가능하다’는 새로운 인식을 안겨줬다. 정씨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직장인 박모(27·여)씨는 “쓸데없는 만남이 사라지니 삶이 쾌적해졌다”고 했다.

비대면을 택하는 인간, ‘호모 코로나쿠스’ 

호모 코로나쿠스의 습성은.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호모 코로나쿠스의 습성은.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6년 차 직장인 이모(31‧여)씨는 “출근 못 하는 사람이 돼버렸다”며 자조했다. 지난해 어느 대기업으로 이직한 뒤 지금까지 사무실에 나간 건 20번도 안 된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싶지도, 그런 노력을 하고 싶지도 않다는 게 이씨의 솔직한 심정이다. 그는 “재택근무가 직장 선택의 기준이 됐다. 월급을 더 안 받아도 되니 이 생활이 유지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코로나19는 ‘비대면 상황’에 불안해하지 않는 사람들을 만들어 냈다. 비대면이라는 선택지가 주어지면서 이를 주저 없이 선택한다. 이전에 아등바등했던 ‘대면 생활’에 의문도 생겼다. 지난 3월 개강한 뒤 비대면과 대면 강의를 섞어 듣는 대학생 A씨는 “시·공간적으로 활용도가 높은 비대면 수업을 훨씬 선호한다. 이젠 ‘학교에 꼭 가야 하나’라는 생각마저 한다”고 말했다.

코로나19를 겪은 인식과 기억은 2022년 새로운 인간형을 만들어낼 조짐을 보인다. 바로 ‘호모 코로나쿠스’다. 코로나19와 라틴어로 동물을 의미하는 접미사 ‘쿠스(cus)’를 합친 이 표현은 코로나19 이후, AC 시대의 신인류를 의미한다.

호모 코로나쿠스의 특징 중 하나는 ‘선택하는 인간’이다. 우리 삶을 강하게 압박하던 대면의 필요성이 줄어들고 언택트(비대면)가 대안으로 떠오른 데 따른 변화다. 『K를 생각한다』의 저자인 임명묵 작가는 “과거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애초에 상상조차도 못 했다”고 분석했다.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 

18일 낮 광주 북구 중흥동 한 음식점에서 시민들이 점심 식사를 하고 있다. 뉴스1

18일 낮 광주 북구 중흥동 한 음식점에서 시민들이 점심 식사를 하고 있다. 뉴스1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옛말은 호모 코로나쿠스에겐 아무런 감흥이 없다. 그 반대인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직장인 김의정(29·여)씨는 “회식 등 나의 의지가 아닌 만남보다는 사람들과 적당히 어울리면서 나를 잃지 않기로 했다”고 다짐했다. 프리랜서 유모(27)씨는 “만나도 괜찮은 사람을 정하는 버릇이 생기면서 ‘내 사람’에 대한 경계가 확실해졌다. 앞으로는 얕고 넓은 인간관계보다 좁고 깊은 인간관계에 치중하겠다”고 했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거리 두기로 인해 사람 간 관계 속에 틈이 벌어졌다”며 “이를 통해 한국의 지나친 집단주의에서 한숨 돌리는 계기가 됐다”고 진단했다. “삶에서 여유를 찾을 수 있는 긍정적인 기회가 됐다”는 게 이 교수 설명이다.

해방의 도구, 마스크

서울 시내 한 음식점에 마스크 착용 안내문이 붙어 있다. 뉴시스

서울 시내 한 음식점에 마스크 착용 안내문이 붙어 있다. 뉴시스

호모 코로나쿠스의 생활필수품 마스크는 AC의 시대에도 유용할 전망이다. 감염 예방이라는 원래 목적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됐다.

20대 직장인 오모씨는 “마스크 덕분에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지내다 보니 나 편한 대로 살기로 했다”고 말했다. 대학생 권모(26)씨는 “화장노동·꾸밈노동 등 내 얼굴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인식될지를 생각해야 하는 부담이 사라졌다”고 표현했다. 그는 “생활 전반에서 편함을 추구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유전자에 영향 줄 강력한 변화”

호모 코로나쿠스는 과거의 인류와 어떻게 다를까.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공동체성이라는 수백만년 동안 이어진 인류의 지혜가 코로나19로 최근 2~3년 동안 차단되면서 사회의 파편화가 빠르게 진행됐다”고 진단했다. 설 교수는 “이는 (인류의 조상이라고 알려진)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이후 유전자에도 영향을 줄 정도로 강력한 변화”라고 했다. 이어 “사람은 인생에서 교훈을 경험하면 안 잊기 때문에 (코로나19는) 인류 행동 패턴을 결정하는 유전자에 영향을 미칠 것 같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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