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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만남 6시간동안 와인 6병…그렇게 尹 책사 된 盧의 책사 [尹의 사람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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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2021년 7월 19일 저녁, 당시 대선 출마 선언 후 국민의힘 입당을 고심하던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당의 전직 대표급 인사의 자택을 찾아갔다. 윤 당선인은 이날 사실상 초면이나 다름없던 이 인사와 독대한 자리에서 와인을 6병 넘게 마셨다. 정치ㆍ사회 현안에 대한 이야기가 6시간 이상 오갔다. 자리가 끝난 후 윤 당선인은 그에게 이렇게 요청했다고 한다. “쓰신 책의 가(假)제본이라도 달라. 그걸 보고 공부하겠다.”

김병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지역균형발전특별위원장이 2월 10일 국민의힘 대구시당에서 열린 청년세대의 윤석열 대선 후보 지지 선언 행사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병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지역균형발전특별위원장이 2월 10일 국민의힘 대구시당에서 열린 청년세대의 윤석열 대선 후보 지지 선언 행사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렇게 윤 당선인이 받은 책이 김병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지역균형발전특별위원장의 저서 『국가, 있어야 할 곳에는 없고, 없어야 할 곳에는 있다』다. 이 책에는 김 위원장이 자유한국당(국민의힘의 전신) 비상대책위원장을 지낼 당시 문재인 정부를 향해 쏟아냈던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이 담겨있다. “개인의 자율과 창의를 존중하는 자율주의”가 그의 주장이었다. 윤 당선인은 이 책을 서재에 두고 정독했다고 한다. 윤 당선인은 지난달 10일 대통령 당선 기자회견에서 “국민 개개인에게 공정한 기회가 보장되고 자율과 창의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역동적인 나라”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김 위원장과 윤 당선인의 인연은 오래되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 정책실장을 지낸 후 정치권에 있던 김 위원장과 ‘스타 검사’였던 윤 당선인이 여러 자리에서 마주칠 기회는 있었지만, 두 사람이 진지한 대화를 해본 건 김 위원장의 자택에서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김 위원장은 당시 가장 인상 깊었던 윤 당선인의 모습으로 '권력의 속성에 대한 깊은 이해'를 꼽았다. 김 위원장은 “그간 만났던 여러 대통령 후보자들은 권력으로 뭘 할 수 있는지 등 긍정적 면만 얘기했다. 그런데 윤 당선인은 대통령 권력이 얼마나 무겁고, 무섭고, 결국 엄청난 짐으로 돌아올 수도 있단 걸 통감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두 전직 대통령 수사를 직접 지휘했던 윤 당선인과 자신이 ‘책사’ 역할을 했던 한 전직 대통령을 떠나보낸 김 위원장의 경험이 맞닿은 순간이었다.

현장풀)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7일 오전 서울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중앙선대위 1차 회의에서 김병준 상임선대위원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임현동 기자

현장풀)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7일 오전 서울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중앙선대위 1차 회의에서 김병준 상임선대위원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임현동 기자

이날 이후 윤 당선인은 자주 김 위원장과 소통하며 조언을 구했다. 대선 경선에서 승리한 직후인 11월 7일에도 만찬 회동을 가졌다. 선대위 총괄선거대책위원장을 맡게 된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김병준 위원장을 선대위에 중용하는 데 비판적 입장이었지만, 윤 당선인은 김병준 위원장에게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와 동급인 상임선대위원장직을 맡기며 신뢰를 보였다. 당시 김 위원장은 공개발언을 자제하면서 윤 당선인이 갈등상황에 직면할 때마다 선대위 내부에 “제일 중요한 건 후보”라며 힘을 실었다고 한다.

이 대표와 윤 당선인 간 갈등으로 선대위가 해체된 뒤에도 윤 당선인은 자주 김 위원장과 소통했다. 김 위원장은 옆에서 지켜본 윤 당선인의 강점을 “추진력이 강하고 인간관계가 부드러운 점”이라고 설명하며 “다만 사람을 좋아하는 스타일상 권력을 운영할 때 조심할 부분도 있다”고 당부했다.

김 위원장은 윤 당선인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엔 “나는 이제 내 본분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인수위원장, 국무총리, 비서실장 등 여러 하마평에 올랐지만 윤 당선인에게 직ㆍ간접적으로 이 같은 의사를 전했다. 김 위원장은 당시 사적인 자리에서 “나는 내 인생의 마지막을 ‘선생’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했다. 자치 분권을 연구한 학자로서의 사명을 강조한 발언이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대선후보 시절이던 지난해 11월 29일 세종 어진동 밀마루전망대를 방문해 김병준 상임선거대책위원장과 함께 아파트 단지 등 세종시 전경을 바라보며 대화하고 있다. 뉴시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대선후보 시절이던 지난해 11월 29일 세종 어진동 밀마루전망대를 방문해 김병준 상임선거대책위원장과 함께 아파트 단지 등 세종시 전경을 바라보며 대화하고 있다. 뉴시스

윤 당선인은 그런 김 위원장을 지난 달 14일 인수위 지역균형발전특위원장으로 임명하며 다시 중용했다. 당시 윤 당선인은 직접 첫 특위 회의에 참석해 “새 정부는 ‘지방시대’라는 모토를 갖고 일해달라. 인수위가 종료돼도 제 임기 동안 계속 위원회를 유지시키고 위원회 활동에 저도 많이 의지하겠다”며 김 위원장에게 힘을 실어줬다.

김 위원장은 “균형발전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리는 것까지가 내 역할”이라며 “공직에 가지 않겠다는 뜻은 변함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치권에선 김 위원장이 향후 윤석열 정부에서 요직에 중용될 가능성이 남아있다고 보고 있다. 윤 당선인이 설치를 약속한 민관합동위원회 등에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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