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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중인데 차량 대열이 64㎞…러군의 졸전, 그뒤엔 이 키워드 [Focus 인사이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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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토론을 하다 보면, “러시아군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우리는 왜 러시아군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느낄까?

열병식에서 시가행진 중인 러시아군. 러시아 대통령실

열병식에서 시가행진 중인 러시아군. 러시아 대통령실

1977년 미국의 정치학자인 잭 루이스 스나이더는 서방국가 입장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소련의 행동을 ‘전략문화(Strategic Culture)’라는 관점을 통해 해석하고자 했다. 그는 ‘전략문화’를 “국가의 구성원들이 서로 공유하고 있는 사상ㆍ조건부 감정 반응ㆍ습관적 행위 패턴들의 총합”으로 정의했다. 지미 카터 행정부가 중단(1977년)됐다가,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가 부활(1981년)한 B-1 초음속 폭격기 프로그램이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미국의 국방ㆍ군사전략을 막후에서 설계했다는 평가를 받는 앤드루 W. 마셜은 B-1 폭격기 프로그램에 관련한 의사결정에 참여했다. 그의 주장은 ‘전략문화’의 중요성을 잘 설명하고 있다.

소련군 총참모부는 (제2차 세계대전) 독소전쟁 개전 1주일 만에 4000대의 전투기를 상실한 경험 때문에 방공전력에 집착한다. 미국이 초음속 폭격기를 배치하면 소련은 광대한 국경선에 지역 방공망을 배치하느라 엄청난 예산을 투입할 것이다. 이것은 소련과의 장기 전략경쟁에서 미국에게 유리하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러시아군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략문화’라는 관점에서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러시아군의 행동을 합리화하거나 정당화하자는 것이 아니다. 더 유용한 시사점을 도출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구 소련의 정치장교 되살린 러시아군

지난달 7일(이하 현지시간),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러시아군은 발레리 게라시모프 총참모장을 중심으로 과도하게 중앙집권화했다. 부사관과 병사들은 권한이 없어 융통성 있는 전투수행이 불가능하다”고 분석했다. 이것은 ‘임무형 지휘’를 지향하는 서방 군사 선진국들의 추세와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2021년 7월 25일 러시아 해군 기념일에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왼쪽에서 둘째)이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부 장관, 니콜라이 예브메노프 해군 총사령관과 함께 열병식을 지켜보고 있다. 스프트닉=연합

2021년 7월 25일 러시아 해군 기념일에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왼쪽에서 둘째)이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부 장관, 니콜라이 예브메노프 해군 총사령관과 함께 열병식을 지켜보고 있다. 스프트닉=연합

이러한 경향은 정치체제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미국의 군사학자인 디마 아담스키는 “러시아인들이 권위주의 리더십을 무기력과 혼란을 방지하는 해독제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통치방식이 러시아 국민들에게 지지를 받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권위주의 정치체제는 배타적 민족주의와 쉽게 연결된다. ‘푸틴의 철학자’로 불리는 알렉산드르 두긴은 “러시아 제국이 구(舊) 소련의 연방국가 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만주ㆍ신장ㆍ티베트 지역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배타적 민족주의의 지지를 받는 권위주의 정치체제는 군에 더욱 일사불란한 행동을 요구할 것이다.

특히, ‘정치장교’라는 조직이 군을 더욱 중앙집권화하고 있다. 이 제도는 러시아 혁명 기간의 ‘군사위원’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소련의 붕괴와 함께 사라졌다. 그러나 2018년 푸틴 대통령이 되살렸다. 러시아의 일간지인 이즈베스티야는 정치장교의 역할을 “부지휘관으로서 장병들의 전투의지 고취, 국방정책에 대한 이해 심화 등을 담당한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서방 전문가들은 구(舊) 소련의 정치장교와 유사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러시아 정치체제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다면, 러시아군의 중앙집권적 지휘체계는 시대적 흐름에 역행하는 모습으로 계속 유지할 것이다. 그리고 러시아군의 국방개혁이나 군사작전의 효율성도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연료ㆍ탄약만을 생각하는 군수 지원

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 군수지원 능력의 한계를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병사들의 식료품 가게 약탈, 유효기간이 20년 이상 넘은 전투식량, 64㎞ 길이로 늘어선 전투차량 행군대열 등이 대표적이다. 18일 현재 민간 군사 사이트인 오릭스는 러시아군의 기동장비 피해를 2960대로 평가했다. 이 중에서 방치되거나 노획된 수치는 1346대에 이른다.

러시아군이 우크라니아 침공(2월 24일)하기 전 숙소가 없어 벨라루시 기차역에서 자고 있는 모습. Rob Lee 트위터 계정

러시아군이 우크라니아 침공(2월 24일)하기 전 숙소가 없어 벨라루시 기차역에서 자고 있는 모습. Rob Lee 트위터 계정

하지만, 러시아군의 군수지원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양(量)은 그 차제에 질(質)을 포함하고 있다”라는 러시아 혁명을 이끈 블라디미르 레닌의 말이 대표적이다. 즉, “충분한 양을 투입함으로써 질적 격차를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는 러시아가 역사적으로 주변국들보다 광활한 영토와 자원을 보유하고 있고, 기술적 우위를 추구하기 어려운 여건이 반영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러시아군은 연료ㆍ탄약만을 중시하고 다른 분야는 크게 고려하지 않는다. 무기체계도 합리적 성능을 가진 무기체계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개념이다. 반면, 미군은 최첨단 성능을 가진 무기체계를 개발해 가용한 예산범위 내에서 생산한다. 예를 들면, 전차의 단가도 약 2배 차이가 난다. 러시아군의 T-90은 약 55억원, 미군의 M1A2는 약 110억원이다.

러시아군은 장비가 고장이 날 경우 후속하는 정비부대에 맡겨 선별적으로 수리하되, 나머지는 폐기한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부대를 추가 투입하는 방식이다. 미군은 한정된 규모의 최첨단 장비와 부대를 지속해서 운용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전투부대의 자체 정비능력을 중요시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대대’를 기준으로 러시아군의 정비부대는 ‘소대 규모’에 불과하지만, 미군은 ‘중대 규모’가 편성된다.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침공을 제대로 준비했다면, 군수지원 능력에 대한 특단의 보완대책을 마련했을 것이다. 그러나 1단계 작전의 경과를 보면,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2단계 작전을 돈바스 지역으로 한정한다면, 단축된 보급선과 친러시아 성향의 반군 등이 군수지원의 어려움을 해소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민간인 공격도 군사작전의 일부로 인식  

지난달 25일 러시아군이 공개한 인명피해는 전사 1351명, 부상 3825명이다. 앞선 지난달 23일, 나토(NATOㆍ북대서양조약기구)는 러시아군 전사자를 최대 1만 5000명으로 추산했다. 과거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사한 소련군은 9년 동안 약 1만 5000명이었지만, 미군은 20년 동안 2448명에 불과했다.

지난 17일 우크라이나 마이쿨리치 집단 매장지에서 러시아군에 희생된 남편 시신 앞에서 울고 있는 여인. AP=연합

지난 17일 우크라이나 마이쿨리치 집단 매장지에서 러시아군에 희생된 남편 시신 앞에서 울고 있는 여인. AP=연합

작전목적 달성을 위해 대규모 인명손실을 감수하는 작전방식은 러시아군의 오랜 전통이었다. 미국의 전쟁사학자인 트레버 N. 듀푸이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 대비 러시아군의 효율성을 5분의 1 미만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독일군보다 소련군 사상자는 약 2배 이상 많았다.

무기체계의 설계 개념도 다르다. 공산권 국가들은 기동ㆍ화력을 최대한 강화하고, 방호능력의 우선순위는 낮다. 반면, 서방국가들은 기동ㆍ화력 못지않게 장병들의 생존과 관련한 방호성능을 중요시한다.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강조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개념의 차이는 사상자 발생 규모와 직결될 수밖에 없다.

더욱이, 러시아군은 민간인에 대한 공격도 군사작전의 일부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유엔인권사무소(OHCHR)가 발표한 15일까지의 우크라이나 전쟁 민간인 사망자는 최소 1982명, 부상자는 2651명이다. 러시아군은 1999년 체첸의 그로즈니와 2016년 시리아의 알레포를 포위하면서 화력으로 이들 도시를 초토화했다. 이 과정에서 최소한 수만 명의 민간인이 희생됐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행위 배경에는 ‘적의 저항의지를 근원적으로 말살시키려는 작전목적’이 깔렸다고 말한다.

이달 ‘시리아의 도살자’로 불리는 알렉산드르 드보르니코프 대장이 우크라이나지역 러시아군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이에, 제이크 설리번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은 “러시아군이 민간인 공격을 확대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심지어 대량살상무기 사용 가능성까지 거론하고 있다. 민간인 피해에 대한 러시아의 관점이 서방 국가와 다르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지금까지 러시아 전략문화를 중앙집권적 지휘체계, 군수지원 개념, 인명피해에 대한 인식의 관점에서 살펴봤다. 이를 종합해보면, “우크라이나 전쟁이 생각보다 길어지고, 더욱 참혹해질 수도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올바른 전략문화는 국방혁신의 시작점이자 종착점

“문화는 어머니이고, 제도는 그 자녀이다.”라는 말이 있다. “군사혁신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전략문화의 변화를 통해 추진해야 한다”는 마이클 라스카의 말과 일치한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의 국방혁신에 주는 시사점은 다음과 같다.

지난 2월 28일 오전 서울 용산구 국방부에서 '주요 지휘관 회의'가 서욱 국방부 장관 주재로 열리고 있다. 국방부

지난 2월 28일 오전 서울 용산구 국방부에서 '주요 지휘관 회의'가 서욱 국방부 장관 주재로 열리고 있다. 국방부

첫째, 북한과 주변국의 ‘전략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미국의 역사학자인 맥그리거 녹스와 윌리엄스 머리도 “군사혁신은 특정한 적을 상대로, 특정한 전장에서, 특정한 작전ㆍ전술적 과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통해 성취됐다”고 강조했다. 혁신도 위협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이 선행돼야 성공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둘째, 한국의 ‘전략문화’를 고려한 국방혁신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한국의 정치체제와 사회 변화를 고려한다면 ‘인명 중시’ 경향은 더욱 세질 것이다. 따라서 ‘최소 인명 피해를 전제로, 최단기간에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을 구비하는 것’은 국방혁신의 최우선 과업이 될 수밖에 없다. 이를 위해 개별 전투원과 부대의 방호능력, 정밀타격에 기초한 입체적인 기동전 수행능력 등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셋째, 한국군의 ‘전략문화’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예를 들면, ‘임무형 지휘’의 저해요인을 식별해서 개선해야 한다. 교육과 훈련에 투입되는 시간의 부족, ‘적재적소’ 보다는 ‘형평성’을 우선하는 인사운영, ‘내용’보다 ‘형식’을 중요시하는 조직 분위기 등이 대표적이다. 제도가 문화의 산물이기는 하지만, 문화 역시 제도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전략문화’는 오랜 역사적 경험과 축적의 과정을 통해 형성된다. 무형적 요소이기 때문에 관심을 받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전략문화’는 국방혁신의 ‘시작점’이자 ‘종착점’이면서, 동시에 혁신의 지속성을 보장하는 ‘선순환의 연결고리’가 될 수 있다. 국방혁신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전략문화’에 각별한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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