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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현도의 한반도평화워치

중동서 손 떼는 미국, 미국에 등 돌리는 중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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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 정세

박현도 서강대 유로메나연구소 대우교수

박현도 서강대 유로메나연구소 대우교수

지난 2월 24일 예상을 뒤엎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하였다. 러시아의 강공에 세계 각국이 느끼는 충격은 크다. “며칠 안에 끝나겠지”라는 희망은 절망으로 바뀐 지 오래고, 러시아는 보란 듯 공격 강도를 높이면서 민간인의 목숨을 앗아가고 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쟁 앞에서 세상은 맥이 빠진 채 무기력하다.

미국의 힘이 예전 같지 않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자유 세계의 으뜸 미국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냉전 시대 양강을 이루었던 러시아의 움직임 앞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냉정한 국제사회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러시아를 대하는 각국은 손익 계산에 바쁘다. 중동은 더더욱 그러한데, 여기에는 미국의 변심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셰일가스로 에너지 독립 이룬 미국, 중동에 관심 약해져
사우디·아랍에미리트는 미국 벗어나 독자 생존 모색
친미 이스라엘도 러시아 심기를 건드리려 하지 않아
시리아 화학무기 사용 응징 못한 우유부단이 부메랑 돼

1945년 2월 14일 수에즈운하의 미 군함 퀸시함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사우디아라비아 국왕 이븐 사우드를 만나면서 경제의 검은 혈액을 확보한 미국은 유럽과 이스라엘 보호라는 정책을 축으로 삼아 중동에 똬리를 틀었다. 그러나 91년 소련 붕괴 이후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자리를 지켜온 미국은 아시아로 가기 위해 중동에서 나오려 한다. 미국의 경제 패권을 위협하던 일본을 85년 플라자합의로 가라앉혔을 때 일본의 경제력은 미국의 40%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런데 세계의 공장으로만 작동할 줄 알았던 중국의 경제력이 2021년 미국의 80%에 육박하였다. 2025년이면 미국을 넘어설 기세다. 미국 대비 중국의 경제력은 2010년 불과 12%에서 2020년 40%로 뛰었는데, 중국의 약진 10년 동안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이라크에서 전쟁의 늪에 빠져 있었다.

미국, 중동 석유 의존 탈피

2020년 1월 시리아를 방문해 바샤르 알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왼쪽)을 만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러시아는 시리아 내전에 개입해 알 아사드 정권을 지원했다. [AP=연합뉴스]

2020년 1월 시리아를 방문해 바샤르 알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왼쪽)을 만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러시아는 시리아 내전에 개입해 알 아사드 정권을 지원했다. [AP=연합뉴스]

73년 중동전쟁의 여파로 석유 파동을 겪으면서 미국은 탈(脫)중동 ‘에너지 독립정책(Project Independence)’을 세웠다. 98년부터 수압을 이용하여 퇴적암 셰일(shale)에 균열을 낸 후 가스와 석유 채굴을 시작하여 미국은 에너지 독립에 바짝 다가섰다. 이에 2011년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아시아 회귀(Pivot to Asia)’ 정책을 제시하였고, 2012년 1월 국정연설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거의 100년 동안 쓸 수 있는 천연가스가 있다고 자부하였다.

셰일 에너지 혁명으로 미국의 가스 생산은 8배, 원유 생산은 19배가 증가하였다. 2011년 러시아를 제치고 세계 최대 가스 생산국이 되었고, 2018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를 밀어내고 세계 최대 원유 생산국으로 우뚝 섰다.

중동산 원유 수입량은 2000년 하루 240만 배럴에서 2021년 69만 배럴로 급감하였다. 2021년 미국의 원유 수입량은 일일 847만 배럴인데, 중동산 원유가 차지하는 비율은 8%에 불과하다. 약 11%를 차지하던 사우디아라비아산 원유의 비중도 5%로 급락하였다. 에너지를 의지해온 중동에서 숨을 고르고 국익을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투자하겠다는 오바마 행정부의 야심을 펼칠 기반이 완성된 것이다. 미 남부군 사령관과 나토 사령관을 지내고 2000년 퇴역한 4성 장군 웨슬리 클라크는 2007년 “석유 없는 중동은 아프리카와 같아 그 누구도 개입하려고 위협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셰일 에너지 자원을 확보한 미국이 현재 중동에서 보여주는 행보를 반영하는 듯하다.

안보 틀 제공하지 않은 미국에 불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하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규탄 결의안을 채택하였는데, 중국·인도·아랍에미리트가 기권하였다. 중국의 기권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인도의 기권을 의아하게 여기는 시각이 있지만, 소련 시절부터 러시아는 인도에 우호적이었다. 러시아가 단 한 번도 인도에 불편한 결정을 한 적이 없다고 생각하는 인도로서는 아무리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과 쿼드에서 힘을 합치고 있다고 한들 러시아를 규탄할 마음은 없다. 더욱이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하면서 러시아의 후원이 더욱 절실하다.

아랍에미리트의 기권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79년 이란혁명 성공으로 불안에 빠진 페르시아만 연안 아랍 6개국이 미국의 엄호 아래 아랍·왕정·이슬람을 공통분모로 삼아 81년 걸프협력회의(GCC)를 결성하였다. 이란과 세 개의 섬을 두고 영유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GCC 회원국 아랍에미리트의 주적은 이란이다. 그런데 미국이 중동에서 서서히 발을 떼면서 아랍에미리트는 미국 없는 중동을 기정사실로 여기고 국가 생존을 위해 중국과 협력도 마다치 않는다. 이에 미국이 불편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비치며 F-35 전투기 판매에 제동을 걸자, 아랍에미리트는 190억 달러에 라팔 80기를 도입하기로 프랑스와 계약을 맺었다. F-35와 무관한 행보로 보기 어렵다.

2020년 8월 백악관에서 이스라엘과 아브라함 협정을 맺어 관계를 정상화하고, 지난 3월 네게브 회담에서 미국·바레인·이집트·모로코와 함께 아랍-이스라엘 화해를 넘어 진일보한 본격 협력의 장을 마련한 아랍에미리트지만, 중동을 떠난다고 하면서도 가시적 안보 틀을 제공하지 않은 채 자국이 마련한 자구책에 ‘감 놓아라, 대추 놓아라’ 간섭하는 미국의 행보가 불만이다. 더욱이 러시아를 석유수출국기구(OPEC) 플러스국으로 대우하며 세계 에너지 시장을 함께 좌우하는 파트너이니 냅다 미국의 편을 들어 러시아 규탄에 한 표 던지기 힘들었을 것이다.

빈살만 “바이든 말 신경 쓰지 않아”

안보리 이사국은 아니지만, 사우디아라비아도 아랍에미리트와 같은 생각이다.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서자마자 빈살만 왕세자를 카슈크지 살해 배후로 지목하여 끊임없이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고, 예멘 후시 반군을 테러조직 명단에서 해제했다. 후시 반군이 사우디아라비아나 아랍에미리트에 미사일을 날려 유전이나 국가 주요 시설을 파괴해도 무응답으로 일관한 미국을 너그러이 이해해주리라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양국의 권력자가 러시아 제재로 국제 유가가 급등하자 놀란 바이든 대통령이 증산을 요청하려고 건 전화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한때 미국의 텃밭으로 간주했던 중동의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에너지 자원으로 한 배를 탄 러시아를 미국을 위해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빈살만 왕세자는 아예 바이든 대통령이 자신을 두고 무슨 말을 하든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했을 정도이니, 현재 중동에서 미국은 예전의 미국이 아니다.

그런데 러시아 앞에서 주춤하는 나라는 아랍에미리트·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아랍국뿐 만이 아니다. 동맹 협약을 맺지 않았지만, 지구상 그 어떤 나라보다 미국과 친밀한 이스라엘도 러시아의 심기를 건드리려고 하지 않는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판하는 대열에 들어섰고, 우크라이나 유대인을 수용하고, 전쟁 피해자를 피한 인도적 지원은 아끼지 않지만, 우크라이나 편에 서서 전쟁을 돕지는 않는다.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이 유대인이지만, 유대인 동질감을 이스라엘 국익과 맞바꾸려 하지 않는다. 국가 생존을 위협하는 시리아를 러시아가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친이스라엘 정책에서 벗어나려는 진보 좌파, 고립을 선호하는 우파가 득세하는 미국에 안보를 맡길 수 없는 이스라엘의 고민이 녹아 있다.

중동에서 말만 앞세운 미국

2015년 9월 러시아는 시리아 내전에 본격 개입하여 반정부군과 이슬람국가(IS)에 밀리던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을 수호하였다. 당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러시아가 “수렁에 빠질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러시아는 이란과 협력하여 시리아 내전의 승자가 되었다. 이란은 억압받는 팔레스타인 해방을 기치로 79년 이래 이스라엘 안보를 위협하는 주적이다. 그런 이란이 시리아에서 국경 인근에 군사기지를 설치하여 운용한다면, 이스라엘의 국가 안보에 초비상이 걸릴 수밖에 없다. 이에 이스라엘은 시리아의 방공망을 장악한 러시아의 묵인 아래 시리아 내 이란 군사기지 및 역내 친이란 세력을 2017년 이래  400여 차례 폭격하였다. 그런데 러시아와 사이가 틀어진다면, 러시아가 S-300이나 S-400 대공 미사일 체계를 가동하여 이스라엘 공군기의 시리아 영공 접근을 봉쇄할 것이다. 이스라엘 안보에 치명적이다.

2022년 우크라이나는 2008년 조지아, 2015년 시리아에 이은 러시아의 국제사회 미국의 단일체제 깨기 전략의 연속 선상에 놓여 있다. “화학무기를 사용하면 가만 보고만 있지 않겠다”고 두 번이나 시리아 정부군에 레드라인을 제시했지만, 정작 무고한 시민에게 화학무기를 써도 제대로 응징하지 않았던 오바마의 시리아 정책의 그림자가 짙게 다가온다. 러시아 개입 전에 정리하지 못했던 미국의 우유부단이 부메랑이 되어 날아왔다. 말로만 싸웠던 대가를 지금 이스라엘뿐 아니라 중동 전체가 치르고 있는지 모른다. 미국의 봄날이 중동에서 저물고 있다.

박현도 서강대 유로메나연구소 대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