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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내가 밟은 북한 땅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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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박청수 청수나눔실천회 이사장

박청수 청수나눔실천회 이사장

북한에 100년 만의 큰 홍수가 났을 때 강남교당 북한돕기 통장에서 1000만원을 마련하여 1995년 9월 15일 대한적십자사를 방문, 강영훈 총재에게 전달했다.

1998년 9월 중국 훈춘 경신희망소학교에 장학금을 전하러 갔다가 원정교 맞은편 북한 땅 언덕에 사람들이 많이 운집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모두 중국 쪽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너무 놀란 나는 왜 북한사람들이 저렇게 많이 앉아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들은 행여 중국 쪽 친척이라도 만나 식량을 구할 수 있을까 하고 매일같이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다고 했다. 그 군상들의 모습은 설명없이 북한의 식량 사정을 말해주고 있었다.

20여 년 전 황량했던 평양거리
경제난 심각해진 요즘의 북한
‘고난의 행군’ 반복될까 걱정돼

나는 서울로 돌아와서 북한 동포 겨울나기 식량준비 운동을 전개했다. 우리가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식량이 없어 북한 동포들이 아사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 성금이 3000만원 정도 모였을 때, 우리민족서로돕기 운동 이용선 사무총장이 평양에 가자는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그 전화를 반겼다. 그런데 이 총장이 어렵게 말을 꺼낸 내용은 평양을 가려면 북한동포를 돕기 위한 3000만원의 성금을 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선뜻 북한동포를 도울 3000만원이 준비되었다고 했다.

북한 측, 조선 아시아태평양위원회 초청으로 대북농업 지원 사업 차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본부 대표 강문규 단장 등 7명이 1999년 1월 18일 북경을 경유, 방북길에 올라 19일 고려항공 편으로 평양에 갔다.

석양 무렵 평양에 도착했다. 평양시내는 오가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서울 같으면 집집마다 전깃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을 시간인데 평양은 그 어디에도 전깃불이 켜져 있지 않았다. 시가지의 아파트 건물은 모두 훌륭해보였지만, 유리창에 반사된 석양빛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평양은 유리창의 도시 같았고, 빈 도시처럼 느껴졌다. 우리가 투숙한 호텔은 고려호텔이었다. 호텔 내부는 매우 정결했으나 너무 추웠다. 춥다고 하자 얼른 전기보조 난방기를 가져다주었다. 도착한 날 밤에는 민화협 부회장 허혁필씨가 초대한 만찬에 참석했다. 처음 만나는 남북 대표들의 모임이지만 오래 기다렸다 만난 사람들처럼 격의 없이 반기고 대화가 오갔다. 만찬은 맛깔스럽고 정성껏 차렸다.

평양에서의 첫날이 밝았다. 고층이 숙소인 나는 아침 일찍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침 7시가 되었는데도 평양은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잠시 후에 자전거 1대가 지나갔다. 나에겐 그 모두가 신기했다. 우리는 사리원도 가보고 묘향산도 갔다. 북한 고속도로는 잘 닦여 있었지만, 오가는 차량이 없었다. 평양시민들은 대부분 걸어다녔고, 남자들은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행인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스님의 바랑 같은 배낭을 메고 다녔다. 배낭에는 한결같이 곡물이 들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모두 식량을 구해가지고 오가는 것 같았다. 지하철도 타 보았지만, 평양시민들은 모두 무표정했다. 우리가 분명 낯설어 보일 텐데도 눈길을 주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북한거리에는 참으로 많은 구호가 붙어 있었다.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 ‘쌀은 곧 공산주의다’라는 구호가 붙어 있었다.

북한은 식량문제뿐 아니라 난방문제도 해결 못하고 있었다. 남북 대표들이 모이는 회의장도 전혀 온기가 없고, 천주교 미사 시간에 참석했을 때도 성당 안에는 냉기뿐이었다. 우리는 평양 산원도 방문했다. 신생아 몸무게가 얼마냐고 묻자 2.5㎏이라고 했다. 남한보다 약 1㎏ 부족하다고들 했다. 한 미국인의 말에 따르면 북한의 미숙아 신생아들은 혀로 모유를 빨아먹을 힘이 없어 튜브로 모유를 공급하고 있다고 했다. 한 협동농장에 들렀을 때, 북한주민은 “남조선에서는 왜 식량을 보내요? 비료로 보내주면 이곳에서는 세배는 불쿼먹을 텐데...” “비료 한 포만 있어도 한 사람은 굶어죽지 않을 수 있어요. 봄이 와도 비료가 없으니까 희망이 없어요”라고 했다. 그 농장에 있던 한 여인이 내 나이를 묻기에 알려주었더니 금세 언니라고 부르면서 “언니, 통일되면 만나요”라고 했다. 그 여인의 말을 듣고 있자니 내일 모레 곧 통일이 되는 것 같았다. 그로부터 참 많은 세월이 흘렀다.

국제사회가 북한의 핵실험과 ICBM 시험발사에 대해 포괄적 제재를 가해 북한의 대외무역이 90% 이상 줄었다고 하고, 지난 2년간 코로나19 대책으로 국경봉쇄를 하여 경제난이 더욱 심화되었다고 한다. 갇힌 듯 살아가고 외부에서 알 수 없는 북한 주민들의 생활상이 행여 고난의 행군시기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깊은 우려를 금할 수 없다.

박청수 청수나눔실천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