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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가 끝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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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김창규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에디터
김창규 경제에디터

김창규 경제에디터

세계 최대의 자산운용사 블랙록의 래리 핑크 최고경영자(CEO)는 지난달 주주에게 서한을 보냈다. 이 서한에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30년간 이어진 세계화에 마침표가 찍혔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블랙록은 10조 달러(약 1경 2300조원)가 넘는 자산을 운용할 정도로 세계 투자 시장에 대한 영향력이 막강하다. 그런 회사의 CEO가 주주에게 ‘세계화의 종언’을 고했다. 핑크 CEO만이 아니다. ‘헤지펀드의 전설’이라고 불리는 레이 달리오 브리지워터 어소시에이츠 회장도 “세계에서 벌어지는 전쟁에는 5가지 종류(무역 전쟁·기술 전쟁·지정학적 영향력 전쟁·자본 전쟁·군사 전쟁)가 있다”며 “지금 이 모든 전쟁을 경험하고 있으며 세계화 추세는 뒷걸음질하고 국가주의가 세를 얻게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세계적인 투자가 워런 버핏이 “메일함에 그의 메모가 와 있으면 가장 먼저 열어 본다”고 할 정도로 신뢰하는 하워드 막스 오크트리 캐피털 매니지먼트 회장도 세계화가 이제 역내 공급망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고 분석한다.

세계적 투자회사 CEO 잇단 경고
러시아-우크라 전쟁으로 인해
공급망 혼란, 물가 급등도 심각
세계화 혜택 본 한국에 큰 위기

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지난 30여년간 굵직굵직한 사건이 벌어지며 지구촌은 세계화를 향해 달려왔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하자 러시아는 세계 경제 시스템의 한 축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또 2001년엔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며 세계 경제와 어우러지게 됐다. 덕분에 무역량이 급증했다. 많은 기업이 인건비와 원자잿값이 싼 나라로 진출하며 세계 각국엔 ‘글로벌 기업’이 속속 등장했다. 세계 어디서든 더 적은 비용으로 제품을 생산해 더 많이 팔자는 생각이 큰 흐름을 이뤘다. 여기엔 아군도, 적군도 없었다.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갔다. 정부도 나섰다. 각국은 앞다퉈 세계화 전략에 ‘올인(다 걸기)’했다. 세계화라는 용광로에 녹아들었다. 바야흐로 세계화의 시대였다.

그런데 이런 흐름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든 빗장을 열고 환영하던 나라가 이제는 마음에 들지 않는 나라에는 빗장을 닫으려 한다.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 코로나19 팬데믹 등 크고 작은 사건으로 세계화는 움츠러들기 시작했다. 여기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불난 곳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전쟁을 반대하는 진영과 전쟁을 지지하는 진영이 서로 등을 돌렸다. 많은 전문가는 이 전쟁이 세계 냉전 이후 유지되던 세계 질서의 흐름을 완전히 바꿨다고 진단한다. 핑크 CEO는 “코로나19 위에 켜켜이 쌓인 전쟁의 정치·경제·사회적 영향이 수십 년간 반향을 일으킬 것”이라고 내다봤다.

여파는 세계 곳곳에 충격을 안길 전망이다. 세계화 덕에 세계는 오랜 기간 낮은 물가(저인플레이션)를 향유했다. 하지만 곳곳에서 무역 장벽을 치고 거래가 막히니 물가가 출렁인다. 벌써 많은 국가가 높은 물가에 신음한다. 세계 각국이 다른 나라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려고 하면 세계화와 반대 현상이 벌어진다. 세계화 시대엔 비용 절감을 위해 해외로 진출했던 기업(오프 쇼어링)이 이제는 국내로 돌아와 생산하는 걸(온 쇼어링) 선호하게 된다. 온 쇼어링이 늘면 국내 일자리가 증가겠지만 오프 쇼어링보다 비용 절감이 어려워 물건 가격을 올릴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현상이 전 세계에 도미노처럼 벌어지면 물가는 큰 폭으로 뛸 수밖에 없다.

지난 30여년간 세계화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은 나라 중 하나는 한국이다. 선진국 기업이 생산 부문을 해외로 옮긴 덕에 신흥국 경제가 성장할 수 있었고 한국은 이 과정에서 축적된 자본을 바탕으로 경제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명목 국내총생산(GDP)은 1990년 2830억 달러(세계 17위)에서 30년이 지난 2020년엔 1조6310억 달러(10위)로 비약적인 성장을 했다. 특히 같은 기간 수출은 680억 달러에서 5130억 달러로, 수입은 740억 달러에서 4680억 달러로 급증했다. 한국은 무역 없이는 살 수 없는 나라가 돼 있다.

그런데 이제 세계화에 위기가 닥쳤다. 세계화의 위기는 한국 경제의 위기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벌써 많은 기업이 어느 편에 설 것인가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기업엔 움츠러들 세계화의 대책 마련이 발등의 불이다.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은 “예측 기능을 강화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정책 담당자도 이전까지와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봐야 한다. 한국은 에너지, 원자재, 식량 등 어느 것에도 자유롭지 않다. 시도 때도 없이 밀려오는 무역 규제를 버티려면 다른 나라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려는 노력부터 시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