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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엔 전쟁, 지금은 부채로 망한다" 이게 尹비서실장 생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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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지난 13일 서울 종로구 통의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공동기자회견장에서 2차 국무위원 후보 및 대통령 비서실장 인선 발표를 하고 있는 모습.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김대기 대통령 비서실장 내정자. 인수위사진기자단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지난 13일 서울 종로구 통의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공동기자회견장에서 2차 국무위원 후보 및 대통령 비서실장 인선 발표를 하고 있는 모습.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김대기 대통령 비서실장 내정자. 인수위사진기자단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지난 대선 과정에서 검사 생활 이외의 경험 부족 지적이 나올 때마다 “각 분야 전문가에게 권한을 위임하겠다”고 강조했다.

윤석열 정부의 초대 내각과 대통령실의 윤곽이 드러난 현재 윤 당선인의 전문가 기용 기조는 뚜렷하다. 특히 경제 분야에선 파격이나 모험보다는 중량감 있는 관료 출신의 전문가를 발탁해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하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내각의 한덕수 국무총리 후보자와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후보자, 대통령실의 김대기 비서실장 내정자는 모두 행정고시 출신으로 오랜 기간 경제 관료로 일해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내각과 대통령실의 ‘투톱’을 모두 경제 전문가로 채운 것도 역대 정부와 비교하면 상당히 이례적인 배치다.

그 중에서도 13일 낙점된 김대기 내정자의 역할은 과거 청와대 비서실장과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전임자들이 ‘통솔’에 무게가 실렸다면 김 내정자는 ‘조율’에 방점이 찍힐 것이란 관측이다. ‘정치인 비서실장’ 대신 ‘경제통 비서실장’을 중용하고 기존의 정책실장 자리를 없애기로 한 만큼 김 내정자는 경제 분야에서 상당히 목소리를 낼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김대기 대통령 비서실장 내정자와 그가 2013년 12월 펴낸 『덫에 걸린 한국 경제』. 중앙포토

김대기 대통령 비서실장 내정자와 그가 2013년 12월 펴낸 『덫에 걸린 한국 경제』. 중앙포토

2013년 12월 출간된 김 내정자의 저서 『덫에 걸린 한국 경제』는 그의 생각을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이다. 통계청장과 청와대 경제수석, 정책실장 자리까지 오르며 33년 넘게 공직에 몸담은 그의 경험을 토대로 한국 경제의 문제와 미래를 위해 필요한 대책들을 담아냈다. 9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무상복지와 인구 고령화, 포퓰리즘에 따른 국가 재정 파탄 등 현재도 유효한 진단과 처방이 제시돼 있다.

이 책에서 김 내정자가 특히 강조하고 있는 건 국가 재정의 건전성 유지다. 그는 여러 차례에 걸쳐 포퓰리즘의 후과인 국가 재정 고갈을 우려했다. 그는 “(기업이든 가계든 국가든) 모든 위기는 빚으로부터 온다”며 제1차 세계대전 패배 이후와 1998년 각각 재정 파탄을 겪은 독일과 러시아의 예를 들기도 했다. 그는 2006년 청와대 경제정책비서관으로 있을 때 출연 연구기관에 ‘우리나라의 경제 상황에서 국채는 어느 정도까지 늘어나도 괜찮은지 판단해 달라’고 요청했던 경험을 회고했다. 그는 “국채 채무 적정 상한에 관해 국제적으로 통일된 기준은 없으며, 연구자에 따라 40~90%까지 다양한 의견을 내놓고 있다”며 “IMF는 국가 채무 비율이 60%대(신흥국은 40%)를 넘으면 채무 누적이 빠르게 진행되어 재정 위기가 발생할 확률이 높아진다고 경고한다”고 적었다. 그는 “특히 (한국의) 국가 채무에서 우려되는 부분은 속도”라고 강조했다.

“과거에는 전쟁 때문에 나라가 망했지만 지금은 부채 때문에 망한다” 

지난해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 채무 비율은 사상 최고인 47%였다. 국가 채무 비율은 2011년부터 30%대에 머물렀지만 2017년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상승 속도가 증가해 2020년엔 43.8%를 기록했다. IMF의 눈높이대로라면 한국도 위험 수준을 향해가고 있는 셈이다. 김 내정자는 책에서 “그동안 우리는 몇 번의 큰 경제 위기를 넘겼는데 이는 튼튼한 재정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다”며 “만약 재정이 무너지면 그야말로 기댈 곳이 완전히 사라진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과거에는 전쟁 때문에 나라가 망했지만 지금은 부채 때문에 망한다”며 “가뜩이나 고령화로 인해 들어가는 돈이 많은 오늘날, 지나친 정치권의 포퓰리즘 경쟁은 나라가 망하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고 썼다. 그는 나라곳간을 지키는 방법의 하나로 “국가 부채를 일정 수준 이하로 묶는 법도 검토돼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러한 재정에 관한 김 내정자의 생각은 대선 후보 시절 윤 당선인의 생각과 거의 일치한다. 윤 당선인은 지난 1월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빠르게 늘어나는 국가 채무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지금 상태를 방치해 우리 자녀와 미래 세대에게 빚더미만 물려줄 수는 없다”고 적었다. 그런 뒤 “새 정부 출범 1년 내, 책임 있는 재정 준칙을 마련해 국가 채무를 관리하겠다”고 강조했다. 다만 “복지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증세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 김 내정자와 달리 윤 당선인은 증세에 관해선 신중한 입장이다.

‘합리적 시장주의’를 신봉하는 정통 경제 관료답게 김 내정자는 가격 통제에 의한 규제 방식에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다. 그는 책에서 ‘가격상한제, 시장경제 흐름을 끊다’는 제목 하에 분양가 상한제의 비효율성을 지적했다. 2011년 전세 가격 상승으로 정치권에서 전·월세 상한제 도입 요구가 있을 때 이를 막는 대신 1~2인 가구를 위한 원룸 주택 공급을 대폭 늘려 전·월세 가격을 안정시킨 경험도 소개했다.

하지만 이 책 출간 7년 뒤인 2020년 7월 전·월세 상한제를 포함한 임대차 3법이 더불어민주당의 강행처리로 통과돼 시행됐고, 그로 인한 전세 시장 불안으로 집주인과 세입자 모두 고통받는 결과가 초래됐다. 윤 당선인은 대선 기간 임대차 3법 폐지를 약속했고, 대통령직인수위원회도 지난달 28일 임대차 3법의 폐지 또는 축소 계획을 발표했다. 다만 민주당뿐 아니라 국민의힘 내부에서도 이미 시행 2년여가 지난 임대차 3법을 급하게 폐지할 경우 부작용이 우려된다는 목소리가 커서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주를 이룬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지난달 21일 서울 삼청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경제 6단체장과 오찬 회동에 앞서 티타임을 하고 있는 모습. 중앙포토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지난달 21일 서울 삼청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경제 6단체장과 오찬 회동에 앞서 티타임을 하고 있는 모습. 중앙포토

김 내정자는 『덫에 걸린 한국 경제』에서 과도한 대기업 때리기도 경계했다. 그는 2012년 대선을 앞두고 한국 사회에 몰아친 경제민주화를 거론하며 “(같은 시기 아베노믹스로 신이 난 일본 기업과 달리) 한국 기업들은 경제민주화라는 이름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며 “기업 부담이 늘어나는 정책들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왔다”고 했다. 이어 “사회 분위기에 편승하여 기업인이라는 이유로 더 매도당하고 반기업 정서가 확산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며 “기업은 우리 경제의 엔진”라고 강조했다. 이런 부분도 윤 당선인의 생각과 비슷하다. 윤 당선인은 지난달 21일 경제 6단체장을 만난 자리에서 “기업이 자유롭게 투자하고 성장할 수 있게 제도적 방해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 정부가 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기업인 매도당하고 반기업 정서 확산 없어야” 

김 내정자는 책에서 과감한 정책도 여러 개 제안했다. 공무원이 더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공무원 봉급을 경제 실적에 연계하고 ▶감사원은 정책 타당성이 아닌 회계 감사에 집중하게 하는 방안 등이다. 또한 저출생과 인구 고령화를 “대재앙”으로 규정하고, 해결책 중 하나로 “이민을 과감히 받아들이자”는 주장도 폈다.

김 내정자는 이 책 전반에 걸쳐서 시장경제 원리를 통한 정책적 접근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가 효율성만을 추구하는 건 아니다. 그는 정책실장에 재직할 때나 퇴임 후 강연 등을 통해 “효율 우선의 자본주의를 공생의 자본주의, 따뜻한 자본주의로 변화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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