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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하경 칼럼

‘바보 윤석열’을 보고 싶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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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하경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
이하경 주필·부사장

이하경 주필·부사장

검사 윤석열은 살아 있는 신화(神話)다. 수도승처럼 묵묵히 박근혜·문재인 정권의 탄압을 이겨냈고, 공정과 정의의 상징이 됐다. 정권교체를 열망하는 보수의 선택을 받았고, 대선에서 승리했다. 부친 윤기중 연세대 명예교수는 아들을 엄격하게 훈육했다. 서울대 법대 재학 중 장학금을 신청하자 “사정이 어려운 친구가 받아야 한다”며 취소하게 했다. 변방의 검사가 단숨에 국가 최고지도자가 된 것은 폭발적 에너지뿐 아니라 이타적 품성을 갖췄기 때문이다.

한국의 역대 대통령은 스스로 빛을 뿜어내는 발광체(發光體)와 그 빛을 받아들이는 피사체(被寫體)로 양분된다. 발광체는 역사의 주인공이 될 자격이 있다. 검사 윤석열은 탁월한 발광체였지만 정치인 윤석열은 미지수다. 이 사실을 부끄러워할 이유는 없다. 특정 정치세력의 도구가 돼 혜성처럼 등장했기에 불가피한 일이다. 하지만 명석한 두뇌와 남다른 경험이 있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국민과 소통하면 정치적 발광체가 될 수 있다. 역사에 한 점을 찍고 임기를 마칠 수 있다.

‘검수완박’에 ‘한동훈’ 대응은 손해
공정·통합 위해 ‘정호영’ 재고해야
분열 끝내는 통합 대통령 되려면
지지층 편승 말고 전체 생각해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정치 아웃사이더로 출발했다는 점에서는 윤 당선인과 흡사하다. 흙수저 노무현은 특유의 원칙과 실천으로 폭발적인 에너지를 만들었다. 필자는 1999년 2월 집권 국민회의 종로 지역구 노무현 의원의 요청으로 점심을 함께 했다. 꾸밈없는 인간 노무현의 발언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찢어지게 가난해서 대학 근처도 못 가봤다. 평생의 콤플렉스였다. 노동 일을 하다 산자락에 토담집을 짓고 들어가 독학으로 사법시험 공부를 했다. 결혼식도 안 올린 아내와 동거했고, 아들도 낳았다. 운 좋게 시험에 붙어서 판사, 변호사도 하고 국회의원도 됐다. 이젠 어려운 사람도 기죽지 않고 살도록 세상을 확 바꾸고 싶다. 대통령직에 도전할 것이다. 여기서 망해도 밑져야 본전이고 여한이 없다. 지역주의를 깨기 위해 내년 총선에 부산에서 출마한다. 김대중 대통령을 만나고 왔다. 경상도에서 노무현 지지율이 오르면 대통령 지지율도 오를 것이니 내 지역구 민원은 무조건 들어달라고 했다. 대통령은 그러겠다고 했다. 경상도에서 빨리, 확실하게 뜨려면 김대중을 까야 하니 양해해 달라고 했다. 대통령이 받아들였다.”

놀랍게도 현직 대통령을 공격하겠다고 예고한 것이다. 1990년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의 3당 합당을 “원칙 없는 야합”이라고 비난하고 김영삼과 결별했던 노무현다웠다. 온몸으로 위험을 감당하고 스스로를 활활 태우는 불꽃이었다. 2000년 4·13 총선에서는 지역주의의 벽을 못 넘고 낙선했다. 그러나 ‘바보 노무현’ 신드롬 속에 ‘노사모’가 만들어졌다.

이렇게 해서 2002년 12월에 당선된 대통령 노무현은 당당한 발광체였다. 지지자들에게 끌려다니지 않고 한·미 FTA, 이라크 파병을 추진했다. 어렵게 축적한 나의 정치적 자산을 아낌없이 연소시키면서 국익을 지켰다. 나를 위해 국익을 희생시킨 무리들과는 달랐다. 처참하게 공격받았고, 외로웠지만 역사는 그의 공로를 기억한다.

대통령 윤석열은 노무현처럼 자신의 세계를 당당하게 구축할 것인가. 만일 자신을 업고 이 자리까지 오게 한 세력들의 “문재인 심판, 이재명 단죄” 아우성에 압도되면 스스로 다짐한 ‘통합 대통령’은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다.

172석의 민주당이 문재인·이재명을 지키기 위해 ‘검수완박’에 나선 것은 다수의 횡포다. 그렇다고 한동훈 법무장관 카드로 맞대응하는 것도 지혜롭지 못하다. 대장동·울산시장선거·원전 수사는 시스템에 따라 순리대로 하면 된다. 정의와 공정, 상식의 기준이 작동되는지만 지켜보면 된다. 대통령이 직접 칼을 들면 분열됐던 정적들은 뭉치고 여론은 양비론으로 흩어진다. 여소야대가 국정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1987년 12월 직선제 선거에서 노태우가 김영삼·김대중·김종필과 겨뤄 당선됐다. 정보기관과 검찰·경찰은 세 사람의 비리를 경쟁적으로 보고했다. 하지만 노태우 대통령은 정적들에게 어떤 보복도 하지 않았다. 총칼로 유지한 독재를 통합적 민주주의로 전환시킨 원동력은 그의 포용적 리더십이었다. 지금은 지지자들이 보내는 증오의 함성에 몸을 부르르 떠는 ‘칼잡이 윤석열’이 아니라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바보 윤석열’의 리더십이 절실하다.

노무현은 회고록에 “시대는 한 번도 나를 비켜가지 않았다”고 적었다. 해야 할 일은 힘들어도 회피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윤 당선인의 시대적 책무는 이 지긋지긋한 분열의 정치를 끝내는 일이다. 누가 뭐래도 뒤돌아보지 않고 미래를 향해 통합과 협치의 길을 가야 한다. 윤석열의 공정과 통합을 가로막는 ‘제2의 조국’ 정호영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의 지명 철회도 숙고해야 한다.

큰 새는 바람을 거슬러 날고, 살아 있는 물고기는 물살을 거슬러 헤엄친다. 늘 깨어 있으려 했던 ‘바보 노무현’이 소중하게 여겼던 장자(莊子)의 지혜다. 지지자의 열광에 편승하려는 유혹을 물리쳐야 한다. 전체를 생각하는 통합의 리더로 탈바꿈하는 순간, 피사체 대통령 윤석열은 비로소 발광체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