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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세계사적 중요성 인식해야

중앙일보

입력 2022.04.18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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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권기창 전 주우크라이나 대사

권기창 전 주우크라이나 대사

푸틴의 시대착오적 제국주의 비전은 대량 학살과 인권 유린을 가져오고 있다. 죄 없는 딸들이 폭행당하고 아들들은 포화 속에서 죽고 있다. 전쟁은 우리에게도 생생히 살아있는 아픈 기억이다. 지난주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화상 연설을 통해 한국전쟁을 상기시키며 지원을 요청했다. 300명의 국회의원 중 50여명만이 참석했다. 외교 참사에 가까운 것으로, 이날 보여준 한국 정치의 민낯은 우리를 부끄럽게 했다.

이번에 우리 국회는 상대방 국가원수에 대한 심각한 결례를 보여주었다. 외교에는 의전이라는 예절이 있다. 의전의 핵심은 격식을 차리는데 있는 게 아니라 상대를 배려하는 데 있다. 상대가 선진국이든 개도국이든 동등한 의전을 펼치는 것은 상대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만일 미국의 바이든이나 중국의 시진핑이 우리 국회에서 연설했다면 어땠을까? 의원들은 회의장을 가득 채우고 기립 박수를 쳤을 것이다. 현재의 젤렌스키는 그저 어느 나라의 정상이 아니다. 국제사회에서 처칠 같은 영웅의 반열에 올랐고, 강대국 러시아에 맞서 싸우는 저항의 아이콘이자 자유 세계의 구심점이다. 더구나 전쟁의 폐허를 딛고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을 성취한 한국을 우크라이나의 롤모델이라며 애정을 보여온 젤렌스키 대통령에 대한 결례는 동방예의지국의 의전이 아니다.

젤렌스키 국회 연설은 외교 참사
민주주의·인권 이슈에 연대 필요

왜 이런 외교 참사가 벌어졌을까. 그것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세계사적 중요성과 의미에 대한 우리 정치권의 공감 능력 부재 때문이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우크라이나 전쟁은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세계 역사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이라고 규정했다. 이 전쟁은 2차대전 이후 지속되어온 유엔 중심의 집단 안보체제를 무너뜨리며 신냉전을 초래할 수 있는 역사적 중요 사건이다. 또한 이 전쟁은 세계 식량 위기와 에너지 위기를 촉발하며 한반도의 안보에도 직결되는 중대한 안보 이슈다. 그러나 정치권은 체감을 못 하는 듯하다.

또 이 전쟁은 권위주의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켜내려는 투쟁이다. 우크라이나는 우리의 6월 항쟁처럼 2014년 유로마이단 혁명에서 국민이 피로써 민주주의를 지켜낸 역사가 있지만, 러시아는 이런 민주주의 혁명을 경험한 적이 없다. 우크라이나가 전쟁에서 나라를 지켜낸다면 전 세계에서 민주주의가 큰 힘을 얻을 것이고, 푸틴의 권위주의 체제는 내부로부터 붕괴 압력을 받기 시작할 것이다. 영국 작가 살만 루슈디가 소설 『악마의 시』에서 쓴 것처럼 “다시 태어나려면 먼저 죽어야 한다.” 러시아가 민주주의 국가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권위주의 체제가 먼저 붕괴하여야 한다. 이런 시점에 우리 국회는 정치적 무관심을 통해 푸틴의 권위주의 체제를 의도치 않게 도와준 셈이다.

외교는 국회의 초당적인 뒷받침이 없으면 힘을 얻지 못한다. 바이든 행정부가 우크라이나에 파격적인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는 것은 미 의회의 초당적인 지지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 외교는 경제적 이익으로 정의되는 단기적 국가 이익에 초점을 맞추어 왔다. 그러나 이제는 G7 수준의 선진 경제 강국이자 군사 강국인 우리의 국제적 위상에 맞게 민주주의와 인권 이슈에 연대와 지지를 보내는 가치 기반 외교로 전환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장기적 국익에 부합한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를 규탄하며 유엔 총회에 매년 제출해온 크림반도의 인권침해결의안이나 비군사화 결의안 등에서 우리나라는 매년 기권해왔다. 이 표결에서 자유 세계 선진국 중 기권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 이제는 우리도 찬성표를 던져야 한다. 물론 대러시아 관계에서는 단기적 경제 손실을 초래할 수 있다. 그러나 국회와 국민 여론의 지지가 있으면 정부가 흔들리지 않고 이런 외교를 해 나갈 수 있다. 국회의 관심과 지지가 절실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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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창 전 주우크라이나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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