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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동의 축적의 시간

기업의 가장 중요한 사회공헌은 교육투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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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제도권 교육 깨우기 나선 글로벌 기업들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몇 년 전 막내가 학교시험을 앞두고 공부하는 것을 우연히 보다 깜짝 놀랐다. “포항, 과메기, 포항, 과메기…….”라고 중얼거리길래 뭘 하는지 물어보니 지리교과 내용을 암기하는 중이었다. 아직 과메기를 먹어 보지도 못한 아이가 포항이 과메기의 특산지라는 맥락 없는 지식을 꾸역꾸역 머릿속에 집어넣고 있었다. 양손 엄지로 입력하는 시간을 다 더해도 휴대전화로 10초면 찾을 수 있을 지식을 왜 아직도 외우게 하는지 이해가 안 됐다. 이렇게 맥락 없는 지식은 머릿속에 들어가도 바로 휘발된다. 나도 암기 천지의 시대를 지났다. 학령인구가 그때보다 현저히 줄었고, 그에따라 초·중등학교의 학생당 교육 투자비는 계속 늘었다는데, 한세대가 지나도록 ‘포항, 과메기’를 중얼거리는 풍경은 변하지 않고 있다. 얽히고설킨 이해관계, 굳어버진 제도와 관행 탓을 하다 그렇게 또 수십 년이 흘렀다. 대학 교육도 위기에 직면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2015년에 큰 반향을 일으켰던 교육방송 다큐멘터리의 제목이 ‘서울대 A+의 조건’이었다. 이 프로그램에서 심층 취재를 통해 얻은 결론은 한 가지다. ‘농담까지 필기하고 철저히 외워라.’ 안타깝게도 2022년이 된 지금 대학교육의 내용과 형식이 바뀌었다고 자신있게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에꼴42’ 4주 교육거쳐 학생 선발, 시행착오 경험 통한 학습 중시
제도권 교육 틀 깨기위해 프랑스 사업자 자비에 260억원 투자해 설립
독일 기업 SAP 창업자가 만든 디 스쿨, 한샘 창업주 출자한 태재대학
글로벌 선도 기업일수록 혁신적 교육모델 만들기 투자에 적극 나서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2019년 개설한 이노베이션 아카데미. 기존 학교시스템이 충족시키지 못하는 교육수요를 위해 만들었다. 프랑스 에꼴 42가 모델이다. [사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2019년 개설한 이노베이션 아카데미. 기존 학교시스템이 충족시키지 못하는 교육수요를 위해 만들었다. 프랑스 에꼴 42가 모델이다. [사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2013년에 시작된 프랑스의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밍 훈련기관 에꼴42의 시도는 이런 견고한 틀을 깨는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전공과 경력·국적을 불문하고 누구나 지원할 수 있다. 학위도 없고, 학년도 없이 42단계의 과정을 본인이 희망하는 때 밟아갈 수 있다. 교수·교재·학비가 없는 3무 정책으로 유명한데, 성적증명서 등으로 선발하는 통상적인 입학시험도 없다. 대신 4주간 피신(La piscine)이라는 예비학교를 거쳐 교육생을 선발한다. 우리말로 수영장이라는 뜻으로 물에 빠져도 살아남는 열정이 있는지를 보겠다는 뜻이다. 그중에는 24시간 동안 한 시간에 하나씩 코딩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시험도 있고, 후보생들끼리 짝을 지어 프로그래밍하지 않으면 안되는 과정도 포함되어 있다. 밤을 새우기 일쑤고, 문제의 난이도가 높아지면서 인간의 한계를 경험한다고 한다. 교수가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서로 동료평가를 해주고 받으면서 스스로 성장해나간다. 에꼴42의 교육과정은 죽어있는 교과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시행착오 경험을 통해 학습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또한 권위있는 교수의 정답이 아니라 도전에 직면한 사람들이 집단지성으로 최초의 희미한 답을 만들고 끈질기게 개선해나가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이 학습과정 전체는 고도로 프로그램화되어 있어 쉽게 확산이 가능하다. 그 결과 현재 실리콘밸리를 포함하여 15개국 21개 캠퍼스로 확대되었다.

한국에서도 에꼴42의 모델이 정부지원으로 도입되어 시행되고 있다. 2019년 개설 이후 250명의 첫 기수를 선발하는데 1단계 지원자만 1만1100명에 달해 44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제도권에 안주하고 있는 기존의 학교 시스템이 충족시키지 못하는 사회의 수요가 그만큼 크다는 뜻이다. 개설 이후 얼마 되지 않는 때 42서울의 캠퍼스를 방문했다. 컴퓨터가 가득찬 공간에서 교육생들이 삼삼오오 모니터 앞에 몰려 토론에 열중하고 있었다. 나이도 달랐고, 염색한 머리 색깔도, 옷차림도 달랐다. 24시간 개방되는 캠퍼스 곳곳에 골똘히 생각에 빠진 사람, 커피를 들고 어슬렁거리는 사람들이 정돈되지 않지만 살아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강의실의 정해진 의자에 앉아 필기를 하고 있는 전통적인 캠퍼스의 모습과 대조적이었다.

에꼴42의 모델은 기존 제도권 교육의 틀을 깨보겠다는 한 기업가의 문제제기로부터 시작되었다. 프랑스의 이동통신사업자인 자비에 니엘 프리모바일 회장이 260여억원을 출연했다. 소프트웨어 인재가 많이 필요한 회사이니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인재를 길러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회사의 이익을 넘어 변화된 시대에 인간의 능력이 어떻게 커나가는 것인지에 대한 통찰과 맞닿아 있다. 열린 마음으로 협력하면서 도전적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에꼴42를 거쳐 간 수강생들의 후기에서 코딩능력이 늘었다는 이야기만큼이나 겸손함, 협력, 자기관리의 중요성에 대해 크게 깨달았다는 이야기가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모두 제도권 학교가 교과서에 매여있느라 미처 돌아보지 못하고 있는 요소들이고, 자비에 니엘 회장이 사회인으로서 살아가면서 느낀 것들이다. 이러한 현실의 경험을 반영한 교육모델을 설계하는데 기업가로서 축적한 부를 기꺼이 내놓은 것이다.

프랑스의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밍 훈련기관 에꼴42. 전공과 경력ㆍ국적을 불문하고 누구나 지원할 수 있다. [사진 에꼴42]

프랑스의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밍 훈련기관 에꼴42. 전공과 경력ㆍ국적을 불문하고 누구나 지원할 수 있다. [사진 에꼴42]

요즘들어 기업가가 혁신적 교육모델을 만드는데 적극적으로 투자하는 사례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2005년 혁신적인 디자인 교육의 실험을 주창하며 시작된 스탠퍼드의 디스쿨(d.School)도 독일의 소프트웨어 대기업인 SAP의 창업자인 하쏘 플래트너가 3500만달러(약 360억원)를 투자하여 만들어진 프로그램이다. 공학을 포함해 예술·경영·법·의약학·인문학까지 가로지르는 새로운 융합적 사고방식으로서 디자인 씽킹이라는 개념을 체계화하여 전 세계에 전파하고 있다. 하쏘 플래트너는 기업의 단기적인 문제해결을 넘어 인류를 더 행복하게 하기 위한 기업가 정신을 디자인이라는 수단으로 구현할 수 있다고 믿는다. 역시 글로벌 기술 챔피언 기업을 일구면서 몸으로 체득한 교과서에 없는 교훈이다. 디스쿨은 그가 사회로부터 얻은 교훈을 사회로 다시 돌려주는 하나의 방법이다.

코로나 사태 이전인 2014년부터 완전 온라인 교육을 지향하면서 캠퍼스 없는 대학으로 출발한 미네르바 스쿨도 마찬가지다. 이 경우에는 아예 벤처투자 모형을 지향했다. 벤처사업가였던 벤 넬슨이 기존 교육의 문제를 완전히 뛰어넘는 새로운 실험적 모델을 제시하고, 투자자금을 모았다. 실리콘밸리의 ‘벤치마크 캐피탈’이라는 곳으로부터 2500만달러(약 300억원)를 투자받아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기업가의 시도가 곳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국판 미네르바 대학이 될 태재대학은 한샘의 창업자가 경영권을 포기하면서까지 3000억원의 사재를 투자하여 만들어지고 있다. 7개국에 흩어져있는 기숙사를 돌아가면서 생활하고, 모든 수업은 첨단의 온라인 플랫폼 위에서 이루어진다. 글로벌 리더를 양성하고자 하는 그 비전이 기존의 교육제도에 미칠 파급효과가 기대된다.

몇 년전 서울시내에 있는 한 대안학교를 방문했을 때도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이 대안학교는 1세대 벤처 창업가들이 한국 교육의 문제점을 그냥 두고볼 수 없다는 취지로 투자를 해서 만들어진 학교다. 중·고등학교에 해당하는 비인가 교육과정으로 학년도 없고, 공부 주제도 학생들 스스로 정하고 있었다. 방문 한 날 마침 학부모들을 포함해 나와 같은 외부인들도 학생들이 몇 달 동안 팀으로 작업한 프로젝트 결과를 구경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강당 이곳저곳에 팀별로 부스를 차려놓았고, 사람들은 자유롭게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앳된 얼굴의 학생 서너명이 발표하는 부스에 발걸음이 멈추었는데, 발표하는 학생의 카랑카랑한 목소리 때문이었다. 신문기사들을 여러가지 방법으로 분석한 결과를 보여주면서 결국 하고 싶은 이야기는 신문사들의 정치적 성향을 지표로 표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잊어버렸지만, 발표하던 학생의 눈빛은 또렷이 기억난다. 숙제검사를 맡듯 수동적 태도가 아니라 자신들의 주장을 설득해보겠다고 덤벼드는 적극적인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재미있지 않나요?’를 연발하면서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는 그 어린 학생을 보면서 ‘나는 언제 내 연구에 대해 저런 마음가짐을 가진 적이 있었던가’ 되돌아보게 되었다.

기업은 늘 인재를 갈급해한다. 그러나 위의 사례들은 당장 내 기업에 필요한 인재를 어떻게 구할 것인가라는 문제보다 더 넓은 시야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 사회 전반에 우수한 인재가 육성되지 않는다면, 기업 또한 물 밖에 나온 물고기처럼 숨 쉴 수 없게 되리라는 더 큰 문제의식에 기반하고 있다. 그래서 사회적 책임의식을 크게 느끼는 글로벌 선도기업일수록 혁신적인 교육모델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한국 사회에도 더 많은 기업들이 교육투자에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 특히 제도권에 얽매이지 않은 더 혁신적인 시도를 하는데 투자함으로써 제도권 교육을 깨우는 촉매제가 되기를 기대한다. 기업으로서는 이만큼 시급하고도 효과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주 프로젝트도 없다.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