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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 부차 학살도 정당한가" 베트남인, 피고 대한민국에 물었다 [그법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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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전쟁 중이라도, 1명의 적대적인 사람이 있다는 이유로 그 마을 민간인을 다 죽여도 되는 겁니까? 그런 논리로 우크라이나 학살이 벌어지는 것 아닙니까?"

이런 공방이 오가는 법정이 있습니다.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 한국 정부가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며 시작된 사건인데요. 서울중앙지법 민사68단독 박진수 부장판사가 심리하는 이 사건의 원고는 '퐁니·퐁넛 민간인 학살 사건'의 생존자 응우옌 티탄, 피고는 대한민국입니다. 지난 2020년 4월 소장이 접수된 지 2년여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 재판, 어디까지 와 있는지 그법알에서 짚어보겠습니다.

지난 2020년 서울 서초구 중앙지방법원 앞에서 열린 '베트남전쟁 시기 민간인학살 사건에 관한 국가배상청구 소장 접수 기자회견'에서 생존자 응우옌티탄 씨가 베트남에서 화상통화를 통해 발언하고 있다. 뉴스1

지난 2020년 서울 서초구 중앙지방법원 앞에서 열린 '베트남전쟁 시기 민간인학살 사건에 관한 국가배상청구 소장 접수 기자회견'에서 생존자 응우옌티탄 씨가 베트남에서 화상통화를 통해 발언하고 있다. 뉴스1

[그법알 사건번호 21]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 국가배상 소송, 어디까지 와 있나

1968년 2월, 퐁니 마을에 살던 만 7살의 응우옌 티탄은 한국군의 공격으로 5명의 가족을 잃었다고 합니다. 자신도 배에 총상을 입었고, 수술로 겨우 목숨을 건졌다고 합니다. 당시 마을에선 노인, 아이 등 70여명의 민간인이 숨졌습니다.

응우옌 티탄씨를 비롯한 피해자들은 수십년간 한국 정부의 책임을 물어왔습니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이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법정에 선 정부 측 변호인은 "한국군으로 위장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베트콩)이 벌인 일이다", "설령 한국군이 저지른 짓이라 하더라도, 전쟁 중이라 용인될 수 있는 상황이다"라는 입장입니다.

그날 퐁니 마을에는 무슨 일이

◇"한국군으로 위장한 베트콩" vs "참전군인들도 증언"

정부 측 주장은 이렇습니다. 1969년 10월, 베트남 린투안성에 있는 고찰 '린선사'에서 승려들이 살해되거나 다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한국군의 소행이라는 한 승려의 증언이 나왔지만, 1971년 베트남 정부 조사 결과 한국군으로 위장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저지른 일이라는 결론이 나온 적이 있습니다. 정부 측은 '린선사 사건'처럼 퐁니 마을에서도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군인들이 이런 일을 저질렀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응우옌 티탄씨 측 이야기는 좀 다릅니다. 퐁니 마을에는 남베트남군 병사 가족들도 많이 살고 있었는데, 자신들 편일 수 있는 사람들까지 모조리 무자비하게 죽였겠냐는 것입니다. 학살 후의 마을 상황을 목격한 미군들의 진술이 담긴 감찰보고서도 증거로 제출했습니다.

한국군이 저지른 일이 맞다고 증언한 군인들도 있습니다. 당시 마을에서 작전을 수행했던 류진성씨는 지난해 11월 증인으로 나와 "다른 소대원들이 주민들을 죽인 얘기를 무용담처럼 늘어놓았다"고 말했습니다. 베트남을 오가며 이 일을 오랫동안 취재해온 한겨레 고경태 기자도 지난 12일 법정에 나왔습니다. 고 기자는 "미군, 남베트남군, 피해자, 생존자, 유가족이 모두 한국군이라고 일치된 증언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당시 작전을 수행했던 청룡부대의 중대원들과 소대장들을 여러 차례 만나 취재한 결과라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정부 측은 "오래전 일이라 여러 기억이 중복되거나 사소한 왜곡으로 변질할 수 가능성이 있다"는 입장입니다.

베트남 전쟁 민간인 학살 피해자의 삶을 다룬 이길보라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기억의 전쟁' [사진 시네마달]

베트남 전쟁 민간인 학살 피해자의 삶을 다룬 이길보라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기억의 전쟁' [사진 시네마달]


◇"전쟁 중이라면 있을 수 있는 일" vs "마을에 아이와 여성만"

정부 측은 당시 한국군이 선제 기습 공격을 받아 군인 한 명이 다쳤기 때문에 마을에 진입한 것이라고 봅니다. 정부 측 변호인은 고 기자에게 "(민간인이라도) 무기와 관련한 작은 손의 움직임, 무기를 찾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면 우발적인 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한국군이 위협을 느껴 정당방위의 차원에서 살상이 이뤄졌을 가능성도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응우옌 티탄씨 측은 당시 "마을에는 어린아이와 여성과 노인만 남아있었고, 교전이 있거나 저항이 있던 상황은 아니었다"는 참전 군인들의 진술을 제시했습니다. 또 "마을이 사격제한구역으로 설정돼 있었던 데다, 마을 바로 옆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어서 아군에 우호적인 지역으로 분류돼 있었다"고 했습니다.

고 기자도 "사건 벌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마을 사람들이 명찰에 적힌 Kim으로 한국군들을 알아보고, 쌍꺼풀이 별로 없다는 얘기도 하면서 농담하던 사이였다"고 자신의 취재 내용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사건이 벌어지니 마을 사람들도 "한국군이 돌변한 모습을 보고 놀랐다"고 했다는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학살이 벌어지니 당시 한국 해병대 안에서도 '사고를 쳤다'며 크게 이슈가 됐고, 중대장이 책임을 지고 조기 귀국했다"고도 했습니다.

고 기자는 또 "설령 마을 사람 중 한 사람이 위협적인 행동을 했다고 해서, 마을 사람들 전체를 모조리 죽여야 했느냐"고 정부 측 변호인에게 되물었습니다. 그러면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민간인 학살도 같은 논리로 일어나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습니다. 현재 집단학살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키이우 외곽의 부차 마을도 예로 들었습니다.

 베트남 전쟁 민간인 학살 피해자의 삶을 다룬 이길보라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기억의 전쟁' [사진 시네마달]

베트남 전쟁 민간인 학살 피해자의 삶을 다룬 이길보라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기억의 전쟁' [사진 시네마달]

◇"학살의 정의가 뭐냐"

이 재판에서는 '학살'이라는 표현을 두고도 양측이 불꽃을 튀깁니다. 정부 측 변호인은 증인신문 도중 고 기자에게 "왜 학살이라는 표현을 쓰냐"고 물었고, 고 기자는 "수많은 사람이 잔혹한 형태의 시신으로 발견된 사건"이라고 답했습니다.

이번에는 응우옌 티탄씨 측 변호인이 "정부 측 논리라면, 한국전쟁 당시 벌어진 양민 학살 사건 역시 '학살' 표현이 잘못된 것이냐"고 증인에게 물었습니다. 또 "비무장 무저항 민간인을 집단으로 살해한 사건"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관련 법령은? 베트남인 피해자도 한국 정부에 손배소 낼 수 있나

국가나 지자체의 손해배상 책임을 규정하고 있는 국가배상법에는 외국인 피해자에 대한 조항도 있습니다. 외국인이 피해자인 경우, 해당 국가와 '상호 보증'이 있을 때만 법을 적용합니다. 국제관계에서 한국이 불이익을 입는 걸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항인데요. 그렇다고 양 국가 사이에 특별한 조약이나 협정이 필요한 건 아닙니다. 해당 국가와 한국이 정한 국가배상청구권의 요건이 비슷한지 살펴보면 됩니다.

중앙정보부의 고문을 받았던 피해자 허모씨가 일본으로 귀화한 뒤, 한국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한 사건에서 정부는 이 '상호보증' 이 없다며 각하해달라고 주장했었는데요. 한국 법원은 '상호보증'을 인정해 허씨의 손을 들어준 적이 있습니다. 지난 2015년 대법원은 "일본의 국가배상법 규정에 비춰보면 한국 국민도 일본에서 국가배상청구를 할 경우 그 청구가 인정될 것이 기대되고 있고, 실제로 인정되고 있는 점"을 들었습니다. 일본의 국가배상청구권 발생요건과 국내법이 정한 내용이 비슷하다는 겁니다.

응우옌 티탄씨의 대리인들도 상호 보증은 인정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다만 정부 측은 1956년 남베트남과 맺은 군사 실무 약정에 민간인 피해 보상에 관한 별도 규정이 있고, 실제 청구도 이뤄졌다는 입장입니다. 여기에 대해 응우옌 티탄씨 측은 "관련 성명서가 있었으나, 이는 한국군 학살 사실이 억울하니 전모를 밝혀달라는 취지"였다고 반박하고 있습니다. 또 보상 관련 별도 규정 자체가 따로 없다는 주장입니다. 양측은 소멸시효가 지났는지 아닌지를 두고도 법정 공방을 이어갈 예정입니다.

지난해 11월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알리기 위한 청소년직접행동 미안해요 베트남'에 참가한 청소년들이 베트남 전통 모자 농을 착용한 채 베트남 국화 연꽃을 들고 있다. 뉴스1

지난해 11월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알리기 위한 청소년직접행동 미안해요 베트남'에 참가한 청소년들이 베트남 전통 모자 농을 착용한 채 베트남 국화 연꽃을 들고 있다. 뉴스1

관련 판례는?

한국전쟁 당시 일어난 민간인 학살 사건의 국가 배상 사건 판결문들을 살펴봤습니다. 양측이 첨예하게 다투는 사실관계가 정리됐다고 가정하면요. 한국 법원은 전쟁 중 민간인 학살 범죄를 중대한 불법행위로 보고 있습니다. "민간인을 적법한 절차 없이 살해하는 건 신체의 자유, 생명권을 침해하는 불법행위"라는 겁니다. 또 한 재판부는 소멸시효가 지났다는 정부 주장을 다음과 같은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전시 중에 이뤄진 위법행위는 객관적으로 외부에서 알기 어렵고, 국가기관의 조사를 거치지 않고는 손해배상청구권이 있는지 확정하기 곤란해 피해자가 제때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겁니다.

응우옌 티탄씨는 오는 8월 한국 법정에 나와 직접 피해 사실을 진술할 예정입니다. 응우옌 티탄씨 측은 당시 사건을 목격한 추가 베트남인 증인도 한국에 함께 와 증언할 수 있을지도 논의하고 있습니다.

그법알

어려워서 다가가기 힘든 ‘그 법’을 콕 집어 알려드립니다. 우리 생활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이야기로 쉽게 풀어드립니다. 함께 고민해볼만한 법적 쟁점과 사회 변화로 달라지는 새로운 법률 해석도 발빠르게 전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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