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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키디데스 함정과 우크라이나 전쟁 [Law談-권경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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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필연적이었던 것은 아테네의 부상과 그에 따른 스파르타에 스며든 두려움 때문이었다.” 격화되는 미·중 패권 전쟁을 고대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저자의 이름을 따서 ‘투키디데스 함정’이라 명명한 그레이엄 엘리슨의 책 제목은『예정된 전쟁』이다. 미국과 중국의 전쟁은 예정돼 있다는 뜻이고, 역사의 교훈을 통해 피할 방법을 찾자는 것이다.

친러시아 반군 소속 병사가 지난달 28일(현지시간) 러시아군 공격으로 처참히 파괴된 우크라이나 남부 항구도시 마리우폴의 한 아파트 앞을 지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친러시아 반군 소속 병사가 지난달 28일(현지시간) 러시아군 공격으로 처참히 파괴된 우크라이나 남부 항구도시 마리우폴의 한 아파트 앞을 지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전쟁은 ‘예정된’ 미국과 중국이 아니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서 벌어졌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 세계를 30년간의 참혹한 학살의 피로 물들인 펠로폰네소스 전쟁도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충돌로 시작되지 않았다. 발단은 에피담노스의 내전이었다. 에피담노스의 분열된 정치 세력이 주변국들에 원조를 요청하고 코린토스가 분열된 양 정치 세력의 편으로 참전하자, 코르키라가 옛 식민지 에피담노스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아테네에 도움을 요청했다.

아테네는 코린토스가 코르키라를 궤멸시킬 경우 스파르타의 제해권이 강해질 것을 두려워했다. 아테네의 제1시민 페리클레스는 작은 함대를 코르키라에 파견하되 공격을 받지 않는 한 전쟁에 직접 개입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전쟁을 막기에는 너무 미약했고, 스파르타를 자극하기에는 충분한 조치였다.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부상에 대한 비이성적 공포에 사로잡혔다. 공포심과 명예심은 위험을 과장했다. 전쟁은 불가항력에 의해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 스파르타의 왕 아르키다모스 2세는 아테네를 악마로 만들지 말라고 의회에 호소했지만, 각국의 안보 공포에 잇따르는 오판과 악수(惡手)의 연쇄를 막지 못했다.

각국의 내부 정치 지형은 상대국에 맞서지 못하면 그것은 불명예이자 재앙이라고 믿는 강경파 정치 세력이 언제나 득세했다. 전쟁은 참혹했고, 수백년간 그리스가 지켜온 전투 규칙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동맹은 망가졌고, 그리스는 이후 2000년 동안 뭉치지 못했다. 투키디데스는 헤게모니가 충돌하는 전환기의 해석에 있어서 구조적 힘의 결정론적 해석을 경계하기 위해 ‘공포’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투키디데스 함정’은 로버트 저비스(Rovert Jervis)가 명명한 ‘안보 딜레마’와 같은 맥락이다. 안보 딜레마는 방어적 차원에서 이뤄지는 적정한 수준의 안보 추구조차도 상호 의심과 공포를 증폭시키고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방어적 현실주의의 경고이다. 국제 질서를 무정부(anarchy) 상태로 파악하는 현실주의에는 존 미어셰이머 같은 공격적 현실주의자도 있다. 공격적 현실주의 이론은 무정부 상태에서 국가들의 유일한 생존 전략은 힘의 극대화 추구라고 본다. 존 미어셰이머는 러시아가 2008년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 신청을 ‘실존적 위협’으로 인식했고, 나토의 동진을 우크라이나 사태의 근원이라고 봤다.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추진 일지.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추진 일지.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존 미어셰이머는 친러 학자로 소환돼 뭇매를 맞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자유주의 국제 질서가 위기에 빠지자 안보 딜레마의 고전적 명제에 의거해 강대국의 힘의 절제를 경고해 왔던 현실주의 이론의 대가는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독일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의 안보 딜레마를 관리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도 폄훼되고 공격받고 있다.

러시아의 침략 전쟁과 우크라이나 국민의 학살 현장은 세계인의 보편적 인권 의식을 공격하고 마음을 어지럽힌다. 국제사회는 러시아의 전범을 국제 재판에 세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지정학적으로 강대국이 충돌하는 중간 지대에 놓인 우크라이나에 대한 심각한 우려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가 우크라이나 내분으로 표출될 때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다. 우크라이나의 비극은 피할 수 없었던 것일까.

2008년 금융위기가 전 유럽을 덮쳤을 때, 우크라이나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았다. IMF의 강도 높은 증세와 정부 보조금 삭감 요구는 정권의 정당성을 유지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2009년 우크라이나 국민의 69%는 IMF 사태의 가장 큰 책임이 오렌지 혁명의 주역에게 있다고 답했다. 당시 가장 우크라이나에서 인기 있는 인물은 2004년 부정선거로 오렌지 혁명을 불러온 빅토르 야누코비치였다.

2009년 1월 당시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사이에 채무문제, 천연가스 가격문제로 갈등이 불거지자 서유럽으로 연결된 우크라이나의 가스 공급을 차단했음에도, IMF의 가혹한 요구사항은 우크라이나 국민의 친서방 여론을 확산시키지 못했다. IMF의 지원금은 서방 채권자들의 채무를 변제하는 데 쓰였고, 우크라이나 국민은 서방의 금융 채권자와 그와 연결된 국내의 부자들을 위해 긴축재정과 증세 부담의 고통을 떠안아야 했기 때문이다.

2009년 당시 오스트리아의 외무부 장관 요제프 프뢸은 “우크라이나는 대단히 중요한 위치에 있는 국가이며 만일 이렇게 이웃하고 있는 거대한 국가에서 정치적·경제적 재난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유럽연합(EU) 안에서 그에 따른 도미노 효과가 일어나는 것을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2013년까지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양적완화 정책으로 달러가 우크라이나에 쏟아져 들어왔고 늘어나는 채무는 국가부도에 이를 지경이 됐다.

EU와 러시아를 오가던 우크라이나 정부는 국제금융 환경에 대처할 결정을 내려야 했다. 세계 곡창 지대인 우크라이나는 2013년 중국에 벨기에에 맞먹는 크기의 농경지를 임대해 주고 크림반도 항구 시설에 100억 달러를 투자받기로 약속했다.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의 일환이었고, 경상수지 적자를 해결하기 위한 우크라이나의 이해와 맞닿았다. 2013년 러시아도 할인된 가격에 천연가스를 공급하고 거기에 150억 달러 대출까지 제안했다. 그러나 당시 우크라이나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경상수지 적자를 위해 12억5000만 유로달러의 국채를 발행했기에, 중국, 러시아 관계보다 유럽연합과의 관계가 더 중요했다.

하지만 늘 그랬듯이 EU와 IMF가 제시한 조건은 가혹했다. IMF는 겨우 50억 달러 지원을 제안했고, 그중 37억 달러는 2014년 만기가 도래하는 2008년 IMF 구제금융을 갚아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EU는 6억1000만 유로 지원만을 약속했다. 2013년 우크라이나 여론조사에서 EU 가입 찬성은 39%, 러시아 관세동맹 찬성은 41%였다. EU와 IMF의 가혹한 조건이 알려지지 않은 상태의 조사였음에도 그러했다. 야누코비치의 갑작스러운 EU와의 협상 파기 소식이 알려지자 키이우 시가지로 쏟아져 나온 시민들은 EU의 조건을 거부한 야누코비치의 결정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고, 2주 후 그를 축출했다.

"정국을 주도한 건 열정과 분노로 가득 찬 소수파들이었고 그런 그들을 일깨운 건 러시아와 서유럽에 대한 희망과 두려움, 그리고 정치 판도의 모든 측면에서 도출된 다양한 모습의 정치적 결과물이었다." (애덤 투즈,『붕괴』) EU는 오렌지 혁명을 이끌었던 율리아 티모센코 전 우크라이나 총리를 내세워 새로운 금융협정을 맺으려 했고, 러시아는 친러 주민의 반발을 이용해 2014년 크림반도를 장악했다.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돈바스 지역 분리주의자 반군과의 종전을 위한 2014년과 2015년 두 차례의 민스크협정 이행 여부를 조사하는 유럽안보협력기구(OSCE)의 2022년 2월 보고서에 의하면, 1월 24일부터 2월 6일 사이에 3323건의 협정 위반이 있었고, 도네츠크와 루한스크 지역 ‘내부’의 무력 충돌은 급증하고 있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제국주의적 침공의 명분과 목표로 내세운 돈바스의 ‘인권’과 우크라이나 비무장화와 탈나치화의 근거가 될만한 실증적 징후들을 자유주의 진영 국제사회가 놓치고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왼)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AFP=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왼)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AFP=연합뉴스

미국은 무기대여법을 통과시켰다. 우크라이나 전쟁 국면은 전환되고 있다. 유럽 각국의 러시아에 대한 규탄은 여전히 거세지만, 방어무기 지원을 넘어선 공격무기 지원에는 아직 소극적이다. 누구도 자국으로 전쟁이 확산되길 원하지 않는다. 국제사회는 확전을 막으며 핵보유국 러시아를 패퇴시키는 어려운 과제에 직면했다. 에피담노스 내전이 발단이 돼 국제 패권정치의 복잡한 개입을 불러온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같은 경로를 따라가지 않도록, 국제사회가 지혜를 모을 때이다. 그 지혜는 ‘우크라이나 전쟁은 신자유주의 금융체제의 폐해와 국제사회의 안보딜레마 관리 실패로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막지 못한 불행의 결과’임을 직시하는 용기로부터 나올 것이다.

Law談 칼럼 : 권경애의 로-노마드(law-nomad)

대한민국의 헌법 및 법률 질서를 구성하는 핵심 철학인 법치주의와 민주주의, 자유와 정의의 역사 및 법적 가치가 세상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의 이해를 통해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 법적 상상력은 무엇인지 사유하고자 합니다.

권경애 변호사.

권경애 변호사.

※권경애 법무법인 해미르 변호사. 한국관광공사 법무팀장/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참여연대 활동/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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