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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하’ 작가 스가, 대구 찾아 돼지국밥에 막걸리 즐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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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4호 27면

황인 예술가의 한끼 

스가 기시오는 일본 모노하를 이끈 대표적인 작가다. 모노하는 1960년대 후반 서양미술사의 전통과 시선이 아닌 일본인의 미학과 사유로 현대미술의 성립가능성을 타진한 실험적인 미술운동이었다. 한국에서는 대구에 방문해 작가들과 교류했다. [사진 갤러리신라]

스가 기시오는 일본 모노하를 이끈 대표적인 작가다. 모노하는 1960년대 후반 서양미술사의 전통과 시선이 아닌 일본인의 미학과 사유로 현대미술의 성립가능성을 타진한 실험적인 미술운동이었다. 한국에서는 대구에 방문해 작가들과 교류했다. [사진 갤러리신라]

한때 한국의 현대미술가들이 가장 관심을 많이 가졌던 일본의 현대미술은 ‘모노하’(もの派)다. 미국의 팝아트와 미니멀아트, 프랑스의 쉬포르쉬르파스처럼 자국을 대표하는 현대미술 운동이 있다. 한국에 단색화가 있다면 일본에는 모노하가 있다. 1970년대 초반에 일어난 단색화 운동과 1960년대 후반에 일어난 모노하는 출발 시기가 비슷하다. 모노하의 중심작가인 이우환(1936~ )은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양국의 현대미술을 소개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나카하라 유스케, 미네무라 도시아키 등 모노하의 이론을 뒷받침한 일본의 평론가들은 한국의 단색화에 관한 많은 비평문을 썼다.

그러나 미술가 사이의 교류는 없었다. 1930년대생이 주축인 단색화 작가들에 비해 스가 기시오(菅木志雄, 1944~ ), 세키네 노부오(関根伸夫, 1942~2019), 고시미즈 스스무(小清水漸, 1944~ ), 요시다 가츠로(吉田克朗, 1943~1999) 등 모노하 작가들의 대부분은 10년 정도 젊었다. 이들은 모두가 다마대학의 교수 사이토 요시시게(斎藤義重, 1904~2001)의 제자들이었다.

황현욱 등 주도로 일본 작가 초청

(왼쪽부터) 고야마 토미오, 황인, 스가 기시오, 이강소, 최병소, 김영진, 갤러리신라 마당, 2016년. [사진 갤러리신라]

(왼쪽부터) 고야마 토미오, 황인, 스가 기시오, 이강소, 최병소, 김영진, 갤러리신라 마당, 2016년. [사진 갤러리신라]

1985년 모노하와 관련된 두 명의 일본 작가가 한국을 방문했다. 모노하의 대부격인 사이토는 동경화랑 소속으로 서울의 현대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대구 수화랑에는 큰 키에 청바지 차림의 스가 기시오가 나타났다. 스가는 판단이 빠르고 동작이 민첩한 일본인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설치작업에 쓰일 동판 두루마리를 사러 화가 이교준과 함께 북성동으로 향했다. 돌멩이를 구하러 이명미, 백미혜 등 젊은 화가들과 함께 대구 근교 가창의 개울가를 찾았다.

이우석이 대표로 있는 수화랑의 큐레이터는 황현욱이었다. 황현욱과 대구의 젊은 미술인들은 모여서 일본의 월간 미술잡지 ‘미술수첩’을 보고 공부하며 국제미술의 흐름을 파악하려 했다. 모노하는 주요 관심사였다. 황현욱 등의 주도로 다섯 차례 열린 대구현대미술제(1974~1979)를 통해서 에비즈카 고이치(海老塚耕一, 1951~) 등 많은 일본인 작가들이 대구를 왕래했다. 정작 일본인 모노하 작가는 만남이 없었다. 모노하는 이우환의 소개로 국내에 많이 알려졌다. 이우환 자신도 대구를 자주 찾아왔다. 그러나 이우석과 황현욱은 모노하의 대표적인 일본인 작가를 대구로 초대하여 모노하의 실체를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스가는 작가이자 동시에 매서운 필봉을 날리는 이론가로 미술수첩에 단골로 등장했다. 초대작가로는 스가가 적격이었다.

스가에겐 이우환 말고도 한국인 지인들이 있었다. 1970년대에 동경에서 활동한 김구림과는 의기투합할 정도였다. 한국이 왠지 친근했다. 처음 방문한 한국의 도시가 대구였다. 나지막한 건물 때문에 더욱 높아 보이는 플라타너스 가로수를 따라 걷는 기분이 좋았다. 이때 스가가 대구에 체류한 시간은 삼사일에 불과했다. 설치를 마치자마자 일본으로 떠났다. 대구 청년작가들과 접점을 남기고 기억을 공유할 시간이 없었다.

스가가 두 번째로 대구를 찾은 건 20년이 지난 2005년 5월이었다. 한 해전 서울의 코엑스에서 열린 키아프(KIAF) 아트페어에 동경의 가네코화랑이 스가 등의 작품을 갖고 참가했다. 이때 대구 갤러리신라의 이광호 대표는 스가의 개인전을 이듬해 자신의 화랑에서 열 것을 가네코화랑과 약속했다.

스가는 오랜만에 다시 찾아온 대구가 반가웠다. 이번에는 3주일을 체류했다. 박종규 등 대구의 젊은 작가 4명과 계명대 미술대학의 학생 6명이 그의 작업을 도왔다. 스가는 머리에 흰 수건을 동여매고 한쪽 귀에는 목수처럼 몽당연필을 꽂고 일했다. 대구의 젊은 작가들과 학생들은 스가로부터 자신들의 작품에 관한 견해를 듣기 위해 자신들의 작품사진이 실린 포트폴리오를 들고 나타났다. 스가는 그들의 작업을 꼼꼼하게 살핀 후 좋은 점만을 집어내어서 격려했다. 경북대에 가서는 현대미술에 관한 특강도 했다. 아침에는 갤러리신라 마당에서 자라고 있는 ‘세이지’를 뜯어다가 따뜻한 물에 넣어 허브차를 만들어 마셨다. 저녁에는 하루의 노동을 위로하는 파티가 벌어졌다. 대구의 미술인들이 합석했다. 소주를 참치 눈에 넣어 만든 참치눈물주라는 걸 난생처음으로 마셔 보고는 신기해했다.

스가 기시오, 장이성(場性), 벽돌, 20x985x422㎝, 갤러리신라, 2016년. [사진 갤러리신라]

스가 기시오, 장이성(場性), 벽돌, 20x985x422㎝, 갤러리신라, 2016년. [사진 갤러리신라]

2010년을 전후하여 모노하는 세계미술계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작품은 팔고 싶은데 모노하의 작품은 대부분 현장에서 전시되고 철거되는 설치미술의 형식을 취했기에 남은 작품이 없었다. 다행히 사진작가 안자이 시게오(安齊重男, 1939~2020)가 모노하의 전시가 열리는 곳이면 빠지지 않고 찾아가서 전시장면을 촬영하여 기록을 남겼다. 이 기록을 근거로 스가의 작품을 비롯한 많은 모노하의 작품들이 이 무렵 재제작되었다.

스가는 2013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개관전 작가 중의 한 명으로 출품하기 위해 서울을 처음 방문했다. 그러나 스가의 얼굴을 알아보는 서울의 미술인들은 드물었다. 2016년 스가는 또다시 대구를 찾았다. 이번에는 동경의 ‘토미오 고야마’ 갤러리 소속작가로 왔다. 모노하의 부상에 따라 스가에게는 뉴욕, 밀라노 등 전 세계의 유수한 화랑과 미술관으로부터 전시회 요청이 빗발쳤다. 바빠졌다. ‘토미오 고야마’갤러리의 직원이 며칠 먼저 대구로 와서 구미의 벽돌공장에서 특수제작한 시멘트 벽돌로 작품을 설치했다. 스가는 전시 하루 전에 도착하여 벽돌 위에 선을 긋거나 일부를 비닐로 싸는 등 손을 대가며 작품을 완성했다. 스가 작품의 컬렉터였다가 스가의 작업을 모두 촬영하기 위해 전 세계의 전시장을 동행하는 사진가로 변신한 사토 쓰요시(佐藤剛)가 기록을 했다.

2박 3일의 짧은 일정이었다. 오프닝 행사가 열리던 날, 동경에서 온 스가 일행은 점심을 먹으러 돼지국밥집이 몰려 있는 봉덕시장으로 갔다. 청도, 김천 등 대구 인근의 지명을 상호로 한 가게들이 시장 안 골목과 바깥에 즐비했다. 돼지고기를 삶는 커다란 솥이 뜨거운 김을 내뿜었다. 일본에서는 보기 힘든 압도적인 장면이었다. 뜨끈하게 토렴한 돼지국밥과 수육이 나왔다. 된장에 고추도 나왔다. 스가는 막걸리를 한잔 마셨다. 대구의 기운이 느껴졌다.

2박3일 일정에도 봉덕시장 찾아가

스가 기시오는 일본 이와테현 모리오카 출신이다. 스가 가문은 수렵경제와 조몬(縄文)문화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동북지방에서 살아왔다. 동일한 노동의 반복이 행해지는 농경사회와는 달리 수렵경제 사회의 삶에는 늘 새롭고 두렵고 낯선 사건과의 만남이 일어난다. 그 만남은 대상과 나의 변화무쌍한 상황적 전개라는 장소적 감각을 요구한다. 스가가 일정한 형태를 반복하는 작풍을 거부하는 이유다. 스가에게 작품행위는 삼차원공간을 다 활용해야 하는 사냥과 비슷하다. 스가의 작품은 야요이(弥生)문화에 익숙한 대부분의 일본 미술인들에게도 낯설다. 펼쳐진 논밭처럼 평면적인 공간감을 내재하고 있는 한국의 작가들에게는 더욱 낯설다.

일본어로 ‘모노’(物)란 단순히 물건, 물질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모노는 사건, 시간을 의미하기도 한다. 모노를 다른 말로 ‘현상’(現象)이라고 해도 좋다. 장소 속에서 생멸하는 일체의 현상적인 상황을 모노라 할 수 있다. 예측불허의 사건성, 장소성 등은 스가의 작업에서 잘 구현되고 있다. “인간은 결국 죽고, 나무 등은 시들거나 타서 흙으로 변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동일한 과정, 즉, 존재에서 무(無)로 이동하는 과정을 겪습니다. 이 과정에서 사물은 존재하며 변화를 만든다는 것은 무(無)를 향한 변화를 의미합니다.”(스가 기시오)

스가는 시즈오카현의 이토(伊東)에 살고 있다. 아침 10시에 작업실로 출근한다. 오전에는 설렁설렁 시간을 보낸다. 오후부터 작업을 시작하여 오후 6시에 퇴근을 한다. 거의 매일 퇴근길에 온천에 가서 휴식을 취한다. 가끔 가라오케에 가서 엔카를 부른다. 좋아하는 가수는 후지 게이코(藤圭子)다. 서둘러 무(無)를 택한 여자였다.

황인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문학·무용·음악 등 다른 장르의 문화인들과도 교유를 확장해 나갔다. 골목기행과 홍대 앞 게릴라 문화를 즐기며 가성비가 높은 중저가 음식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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