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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기찬의 직격인터뷰

“노동행정을 운동하듯…시장경직되니 비정규직 늘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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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김기찬
김기찬 기자 중앙일보 고용노동전문기자

‘비정규직 제로’ 반대해 퇴출, 김영배 전 경총 부회장의 격정 토로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지 보름을 갓 넘긴 2017년 5월 26일이었다. 한국경영자총협회 부회장이던 그에겐 “민주주의 국가에서 상상할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악몽”이 시작됐다. 문 대통령을 필두로 정권 핵심부로부터 집중포화를 맞았다. 이른바 3단 경고다.

문 대통령은 취임 이틀 만에 인천국제공항공사를 방문해 ‘비정규직 제로 선언’을 했다. 고민을 거듭하던 그가 작심하고 나섰다. “세금을 쏟아부어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은 임시방편적 처방에 불과하다. 당장은 효과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논란의 본질은 정규직·비정규직 문제가 아니라 대·중소기업 간 임금 격차”라고 이의를 제기했다. 숨 쉴 틈도 없이 정권 차원의 압박이 들어왔다. 문 대통령이 직접 나서 “경총은 사회적 양극화를 만든 주요 당사자다. 진지한 성찰과 반성이 먼저 있어야 한다”고 정면으로 쏘아붙였다. 정권 관계자도 “아주 편협한 발상이다” “압박으로 느낄 땐 느껴야 한다”고 가세했다. 그 뒤 경총은 정부에 쓴소리는커녕 정책 건의 한 번 못하고 벙어리 단체로 전락했다. 적폐기관인 양 낙인 찍히며 그를 비롯한 일부는 수사 대상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이듬해 초 쓸쓸히 물러났다. 강제 퇴출과 다를 바 없었다.

비정규직 제로는 노동시장 질서 훼손한 권력형 시장 교란 정책
소주성, 세금만 잔뜩 걷어 펑펑 써 … 피처럼 돌 돈이 눈 먼 돈 돼
착시 부른 일자리 정책으로 기득권 잔치판 만들고 청년은 소외
ILO 협약 발효로 파업 족쇄 풀려 … 선진국처럼 기업 방어권 줘야

그리고 5년. 긴 칩거 생활을 끝내고 중앙일보를 통해 모습을 드러냈다. 김영배 전 경총 부회장이다. 그의 말은 격정적이었고, 거침이 없었다. 관록이 묻어났지만, 걱정과 분노도 읽혔다. 인터뷰가 끝난 뒤 “순화해 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김영배 전 경총 부회장은 “기득권 노조 중심의 정책이 청년의 희망을 꺾었다”고 말했다. “비판 목소리를 제압하는, 그들끼리의 편(編)민주주의만 통했다”고도 했다. 김경록 기자

김영배 전 경총 부회장은 “기득권 노조 중심의 정책이 청년의 희망을 꺾었다”고 말했다. “비판 목소리를 제압하는, 그들끼리의 편(編)민주주의만 통했다”고도 했다. 김경록 기자

퇴임 뒤 어떻게 지냈나.
“노사공포럼 공동대표를 맡아 학자들과 가끔 현안 얘기를 나누곤 했지만, 외부 활동을 자제했다. 지금은 중소기업에 컨설팅을 해주고 있다.”
비정규직 제로 선언에 대한 당시 김 부회장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나.
“노동시장의 현실이자 기본인데, 변할 수가 있는가. 비정규직 제로는 심한 갑질이다. 인천공항 내 협력업체는 졸지에 폐업했다. 시장질서를 훼손하는 정책이다. 정권 발, 권력형 시장 교란을 공식화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지난 5년간 비정규직이 얼마나 폭증했는가. 통계 작성 이후 최대다. 선언한 것과 정반대 아닌가. 노동시장을 왜곡한 결과다. 그런데도 진지한 성찰과 반성을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당시 서슬 퍼런 정권 초에 대통령의 구상을 문제 삼은 건 과도한 용기였다는 말도 나왔다.
“비정규직 제로 선언이 나오고 경총에 많은 항의가 쏟아졌다. 대응하라는 주문이었다. 나설 곳이 경총밖에 없었다. 문 대통령은 선거 운동 내내 ”넥타이 풀고 얘기하자“며 귀를 열겠다고 했다. 그 약속을 믿었다. 한데 강도 높은 압박과 비판으로 눌렀다. 경제단체는 업계의 고충을 전달하는, 일종의 신경전달망 역할을 한다. 그걸 마비시켰다. 고충을 전달하고, 토론하고, 그 결과에 승복하는 것이 민주주의다. 민주주의는 그들 편에서만 민주주의, 즉 편(編)민주주의였다.”
경영계도 비정규직 양산을 막는 데 노력해야 하지 않는가.
“분명 경영계도 비정규직이 늘어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문제는 비정규직 문제를 획일적으로 접근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노동시장이 경직되면 비정규직이 크게 증가한다. 정부 주도로 시장을 제어하려 들었던 지난 5년간의 결과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노동시장의 유연성과 자율성을 어떻게 올리고, 그 속에서 근로자의 권익을 보호할 것인지를 종합적으로 따져야 한다.”
당시 다른 경제단체는 나서지 않았는데.
“나설 수가 없는 상황 아니었는가. 오히려 대한상공회의소는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정부 심기를 건드리느냐’며 비난하더라. 대단히 실망스러웠다. 어쨌든 대한상의는 현 정부 내내 순탄했던 것 같다. 하지만 경제단체는 그 ‘쓸데없는 소리’를 포기하면 안 된다.”
정부의 압박 뒤 경총도 목소리를 감췄지 않았나.
“그랬다. 3단 경고 뒤 최저임금을 16.4%나 확 올리더라. 경영계는 관여도 못 했다. 시장은 안중에도 없다는 게 확실하게 드러났다. 찍소리 못하게 해놓고 마이웨이였다. 경총에선 목소리만 사라진 게 아니라 조직이 흔들렸다. 분열 정도가 아니라 와해 직전까지 갔다. 얼마 전 새 부회장이 부임하면서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데, 회복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최저임금 인상은 소득 주도 성장을 천명하면서 예견됐던 것 아닌가.
“소주성? 음주성장이다. 소득을 올리면 경제가 성장한다는데, 소득을 누가 올리나. 그 답부터 해야 한다. 정부가 시장 임금을 정하나. 최저임금 올리고 결국 어떤 일을 했나. 노동시장이 망가지자 일자리안정자금이란, 국가가 기업 근로자의 임금을 대신 주는, 듣도 보도 못한 시장교란 정책까지 동원하지 않았나. 세율을 떨어뜨리면 민간 생산이 늘고, 경제가 활황 하면서 세수가 늘어난다. 레이거노믹스가 대표적인 사례다. 민간이 쓸 돈을 정부가 세금으로 많이 거두면 경제가 성장하나. 효율적 집행이 안 되면서 동맥경화만 심화한다. 민간에 있었으면 피처럼 돌 돈이다. 소주성은 이와 정반대다. 세금을 거두는 게 소주성이다. 돈 거둬서 쓰는 데 엉망진창이다. 개인은 돈을 아끼는데 정부는 그게 없다. 피땀으로 일군 돈을 눈 먼 돈으로 만들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청와대에 일자리 상황판을 걸었다.
“정부 주도로 하는 일자리 창출, 더욱이 공공부문 일자리 창출은 허상이다. 시장이 없다는 얘기, 또는 시장을 보지 않겠다는 얘기 아닌가. 실제로 통계적 착시만 일으켰다. 예산을 퍼부어 나이 든 사람을 대상으로 공공근로 일자리만 만들었다. 그건 노동시장에서 말하는 온전한 일자리가 아니다. 그러니 청년과 같은 취약계층의 고용 문제는 심화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보호받아야 할 청년이나 저소득 근로계층 같은, 노동시장에 들어오려 하는 사람들을 팽개치는 결과를 낳았다. 그들을 소외시키고 기득권자의 목소리만 듣고 정책을 했다. 기득권 근로자의 잔치판이 벌어졌다. 노동 존중, 노조 중심의 정책이 빚은 사태다. 특히 청년은 가계 경제 속에 숨어있다. 집에 있는 실업자이다 보니 통계에 안 잡힌다.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 그들을 보호해야 하는데, 기득권 중심의 정책적 성곽을 높게 쌓아 희망을 꺾었다. 청년과 그 부모에게 이렇게 가혹해도 되는가.”
현 정부의 고용정책을 실패로 보는 것 같은데, 그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나.
“고용·노동 정책과 행정을 운동으로 보고 일하는 사람이 곳곳에 꽂혀 있다. 청와대부터 정부는 물론 각 지방 촌구석까지 포진해있다. 그 폐해가 심각하다. 아무리 촛불 청구서가 무섭기로서니 이럴 줄은 몰랐다. 기업이 노조에 무릎을 꿇는다. 정부가 방관하고 (노조를) 지원하니 기업으로선 도리가 없다. 이래서야 공장이 돌아가고, 경제가 살고, 일자리가 생기겠는가. 기업 내에서 해결 가능한 게 없다. 예전에는 노동계의 요구가 심할 때는 경총에 반대 요구를 내도록 요청하기도 했다. 정부는 그 뒤에서 조정하는 모양새를 취하며 균형을 잡아갔다. 조정하는 사람, 즉 정부의 운신 폭을 넓혀줘야 건전해지는데, 그걸 기대하기 힘든 구조다. 노사관계만 조정이 필요한 게 아니다. 경제와 일자리도 조정이 제대로 이뤄져야 성장한다. 운동하듯 해선 안 된다.”
국제노동기구(ILO) 핵심 협약이 20일 발효된다.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사업주가 컨트롤할 수 없는 정치·정책·경제 문제로도 파업할 수 있게 된다. 말 그대로 파업 족쇄가 풀린다. 국제사회의 위상이 높아졌으니 협약 비준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노동계의 활동 범위를 확 넓히면서 경영계는 옥죄고 있다는 것이다. 사업주가 다룰 수 없는 문제로 파업하는데, 왜 생산시설이 멈추고, 공장이 피해를 보아야 하나. 그런데도 이 정부는 그저 문 닫고 참으라고 한다. 파업 시 대체근로를 허용하고, 직장 점거를 금지하는 등 방어권을 하나도 안 줬다. 이 또한 운동하듯 밀어붙여서 생긴 일이다. 노동시장에 엄청난 대못을 박은 것이다. 뽑지도 못한다. 비준을 철회하면 국제사회로부터 노동탄압국이란 낙인과 비난이 일 게 자명해서, 그러지도 못한다. 대못을 뽑지 못하면 고통이라도 줄여야 하는데, 방어권이 없으니 답이 없다. 하루빨리 다른 나라처럼 제도를 선진화해야 한다. 경제가 망가진 뒤에야 방어권을 줄 텐가.”
근로기준법이 1980년대에 갇혀 있어 급격하게 변해온 환경을 수용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있다.
“산업현장의 변화 속도는 엄청나다. 기술 진보에 부응하는 제도적 선진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 노동시장에도 프리랜서가 늘어나는 등 크게 변했다. 이런 변화에 즉각적이고 효율적으로 대응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사적 자치의 기능을 회복시키는 게 급선무다. 그러려면 근로조건의 최저선을 명시한 근로기준법에 더해 근로계약법이 필연적이다. 당사자 간 계약의 효력을 우선하여 인정하는 다양한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30년 전부터 제기돼 온 임금체계 개편도 이와 맞물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