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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정탁의 인문지리기행

산과 물의 선계, 한국의 아나키즘을 키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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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경남 함양 안의면 용추계곡

김정탁 노장사상가

김정탁 노장사상가

안의(安義)는 경남 함양의 한 고을이다. 덕유산 맥이 남쪽으로 뻗어 내려오다가 다시 솟아오른 황석산과 기백산 아래에 위치한다. 여기에는 남강을 거쳐 낙동강으로 흐르는 지천이 줄줄이 있어 좋은 계곡이 많다. 안의 용추계곡도 그중 하나다. 용추계곡이 있는 심진동과 그 이웃의 화림동·원학동은 남한을 대표하는 선계(仙界)다. 용추계곡 폭포는 무주 덕유산의 용추폭포, 삼척 무릉계의 용추폭포와 더불어 우리나라 삼대 용추폭포를 자랑한다. 안의 용추폭포는 무주나 삼척과 달리 사람의 발길이 적은 탓인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안의는 조선 최고의 인문학자 연암 박지원이 처음 벼슬한 곳이다. 연암은 현감으로 있을 때 물레방아를 처음 만들어 보급했다. 조선시대 안의는 경상도 진주에서 전라도 장수와 전주로 향하는 육십령의 길목이었다. 그래서 정유재란 당시 7만5000명의 왜군이 여기를 거쳐서 전주로 가려 했는데 뜻밖에 이곳 백성의 거센 저항을 만나 주력 부대가 와해될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 그 대가는 혹독해 황석산성에서 싸운 조선인 7000여 명이 거의 다 죽었다. 숙종은 이들을 기리기 위해 황암사를 세웠는데 일제는 조선을 병탄하자마자 이 사당을 불태웠다. 또 안의군을 면으로 강등시키고 현청을 허문 뒤 근처에 초등학교를 세웠다.

해방 후 첫 아나키스트 대회 열려
용추사·안의중학교가 거점 역할

국가에 억눌린 개인의 자유 옹호
일제강점기 신채호·이회영 등 심취

‘모든 백성은 평등’ 근본적 순수성
해방공간 좌우대립 속 사라져가

시인 유치환, 안의중 초대 교장

해방 이후 첫 아나키스트 대표자 대회가 열린 경남 함양군 안의면 용추사 전경. [사진 함양군청, 김정탁]

해방 이후 첫 아나키스트 대표자 대회가 열린 경남 함양군 안의면 용추사 전경. [사진 함양군청, 김정탁]

현대사와 관련해서도 안의를 소홀히 지나칠 수 없는 대목이 하나 있다. 해방 후 좌우대립으로 인한 혼란한 정국 속에서 첫 아나키스트 대표자 대회가 용추폭포 옆 용추사에서 열렸는데 600명이나 되는 사람이 몰려서 성황을 이뤘다.

그리고 해방 후 정부로부터 인가받아 처음 세워진 학교가 이진언이 설립한 안의중학교인데, 이 학교 초대 교장이 골수 아나키스트인 시인 유치환이다. 이진언은 아나키스트 운동의 대부 하기락을 열렬히 후원했으니 안의중학교는 당시 한국 아나키즘 운동의 거점이라 할 수 있다. 아나키스트 대회가 서울서 멀리 떨어진 조그만 마을 안의에서 열린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거라고 본다.

시인 유치환이 초대 교장을 지낸 안의 중학교. [사진 함양군청, 김정탁]

시인 유치환이 초대 교장을 지낸 안의 중학교. [사진 함양군청, 김정탁]

아나키스트를 흔히 무정부주의자로 부르는데 아나키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처사이다. 아나키즘은 자율국가 내지 자치정부를 지향하는 정치이념이다. 국가가 모든 걸 알아서 처리한다는 국가주의와는 반대이다. 국가주의가 강조될수록 개인의 권리는 약화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정치학 담론의 핵심은 국가주의와 자율국가 이념 간의 관계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루소의 민약론(民約論)도 이런 고민 끝에 나왔다고 본다. 참고로 시민사회 운동은 자율국가 이념과 관련이 많은데, 우리나라 시민사회 운동은 오히려 국가주의 함정에 빠졌다. 이는 시민사회 운동을 이끄는 사람들 상당수가 정치권에 편입된 탓으로 본다.

유치환

유치환

국가주의와 자율국가 이념 간 충돌은 미국 건국 과정에서도 잘 나타난다. 미국은 건국 당시부터 연방주의와 주분권주의로 분열되었다. 이 갈등으로 연방주의자 해밀턴과 주분권주의자 제퍼슨의 대결 구도가 형성되었는데, 이 구도를 해소한 건 해밀턴이 제퍼슨의 의견을 수용해 ‘수정헌법’을 헌법 초안에 첨부해서이다. 그 1조가 ‘의회는 종교의 자유, 집회의 자유, 언론과 표현의 자유, 탄원의 자유를 제한하는 어떤 법도 만들 수 없다’이다. 이 문구는 예나 지금이나 개인의 권리를 국가로부터 가장 확실히 보장받을 수 있는 장치다. 그런데 100년도 채 안 되어서 똑같은 이유로 남과 북이 분열되어 남북전쟁이란 큰 내홍을 겪었다.

공산주의·나치즘·파시즘에 반기

안의면에서 바라본 황석산 전경. [사진 함양군청, 김정탁]

안의면에서 바라본 황석산 전경. [사진 함양군청, 김정탁]

자율국가 이념이 아나키즘이란 이름으로 새로이 활동을 시작한 건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해서다. 당시 서구 열강은 제국주의 탈을 쓰고 식민지 확보를 통해 자신들의 자본주의 체제를 공고히 해 나갔다. 또 이에 대항하며 세를 불린 공산주의·나치즘·파시즘 등 온갖 전체주의도 전 세계를 뒤흔들었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 염증을 느낀 지식인과 청년들이 분노해서 찾았던 탈출구가 아나키즘이다. 이와 비슷한 시기 전 세계 지성계의 주목을 받았던 실존주의도 아나키즘과 같은 이유에서 출발했다고 본다. 실존주의는 ‘(개인의) 존재가 (국가의) 본질보다 선행한다’는 점을 강조해서다.

그런데 자율국가를 지향하는 소국주의 뿌리는 동아시아가 서구에 비해 오랜 전통을 자랑한다. 노자의 정치사상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소국과민(小國寡民), 즉 나라는 작고 백성이 적어야 하는 게 단적인 예다. 장자는 노자 생각을 확장해 소국주의에 대한 신념을 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 이런 태도는 동덕(同德), 즉 사람은 선천적으로 함께 살아가는 덕을 갖고 태어났기에 권력이란 통제 장치가 굳이 필요 없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게다가 법을 만들수록 사람의 앎은 더욱 교묘해져 법의 효력을 무력화시키면서 사람의 생각만 나빠져서다. 따라서 동덕을 믿고 의지해 나라를 다스리는 게 오히려 백성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

이회영

이회영

우리나라에서 아나키즘 운동은 나라를 일제에 빼앗기면서 시작됐다.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이상룡 일가와 한양의 명문 사족 이회영 일가가 함께 망명해서 정착한 곳이 만주 서간도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 1911년 경학사(經學社)를 결성했는데, 그 후 서간도에 조선인이 많이 모여들자 조직을 확대 개편해 부민회(扶民會)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 단체를 결성한 사람들이 꿈꾸었던 건 조선왕조의 재건이나 부흥이 아니라 모든 백성이 평등하고,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고, 서로가 상부상조하는 나라를 건설하는 일이었다. 나라를 빼앗긴 원인을 조선왕조라는 국가의 무능으로 보고 그 대안으로 자율국가를 지향했기 때문이다.

항일 무장투쟁의 사상적 뿌리

사계절 경관이 수려한 함양 용추폭포. [사진 함양군청, 김정탁]

사계절 경관이 수려한 함양 용추폭포. [사진 함양군청, 김정탁]

경학사와 부민회의 초대 회장이었던 이상룡은 그의 『만주기사』에서 부민단 설립과 관련해서 “정부 규모는 자치를 명분으로 삼고, 삼권분립은 문명국을 따른다”라고 밝힌다. 이 점에 미루어봐 이상룡과 그의 망명 동반자였던 이회영, 그리고 무장 항일 독립투쟁을 위해 부민회 산하 신흥무관학교에 모여든 김원봉 등은 망명 초기부터 아나키즘에 입각한 나라를 건설하는 게 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신채호

신채호

신채호도 아나키즘에 적극적으로 호응했던 인물이다. 민족주의 사학자라는 명성에 가리어져 이런 점이 잘 알려지지 않았어도 그는 당당한 아나키스트였다. 그가 쓴 소설 『용과 용의 대격전』을 읽으면 그가 아나키즘에 얼마나 심취했는지 잘 알 수 있다. 또 신채호는 서구 아나키스트를 대표하는 표트르 크로폿킨이란 한 러시아 공작의 ‘청년에게 고함’을 읽고 감명해서 그를 예수급의 성인 반열에 올려놓기도 했다. 그리고 중국 텐진에서 열린 아나키스트 대회에선 정부를 무산계급을 착취하는 기득권의 ‘인육분쇄소’로 강도 높게 비판한 적도 있다.

이상룡

이상룡

우리는 이상룡, 이회영, 하기락, 신채호와 같은 아나키스트들을 어째서 잘 기억하지 못할까? 김원봉조차 남쪽에선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히고, 북쪽에선 수정주의자로 숙청당해 혁혁한 그의 독립운동 행적이 양쪽에서 지워져 있다. 이들 아나키스트가 제기한 문제는 ‘래디컬(radical)’, 즉 근본적이다. 이런 근본적 문제가 해결된 후에 좌와 우의 방향 설정을 두고 논쟁이 벌어지는 게 순서이다. 이들은 너무나 순수했던 탓에 헤게모니 싸움에 익숙하지 못해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했다. 그 결과 해방 공간에서 설 땅을 잃고 역사의 뒤 안으로 밀려났다. 대신 우익과 좌익은 남과 북에서 꽈리를 트는 데 성공해 이름을 잘 남기고 있다.

용추계곡을 걸으면서 비틀스 일원이었던 존 레넌의 대표곡 ‘이매진(Imagine)’을 한번 불러본다. ‘오늘 하루 충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상상해 봐요. 국가라는 구분이 없다고 생각해 봐요. 어렵지 않아요.’ 이 가사도 꽤 아나키스트적이다. 그런데 아나키스트들이 꿈꾸던 나라는 지금 우리 마음에 이매진(상상)으로만 남아 있을까.

김정탁 노장사상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