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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한슬의 숫자읽기

어떤 오래 유예된 죽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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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박한슬 약사·작가

박한슬 약사·작가

한국장기조직기증원에 따르면 2021년 한 해에만 2480명이 장기이식을 기다리다 사망했다. 운 좋게 아직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버티는 사람만 하더라도 4만여 명. 이들 역시 장기이식을 받지 못하면 결국엔 사망할 수밖에 없으므로, 곧 끝이 보인다는 코로나19 누적 사망자 2만여 명과 비교해도 그리 적은 숫자는 아니다. 그런데 어쩌다 장기기증 대기자가 이렇게 늘어, 기다리다 사망에 이를 정도가 된 것일까.

국내에서 장기기증을 기다리는 사람의 75% 정도는 신장(kidney) 이식 대기자다. 보통은 신장을 소변이나 만드는 하찮은 장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신장은 혈액을 깨끗하게 걸러주는 필터 기능을 수행하는 무척 중요한 장기다. 정수기가 물에서 이물질이나 역한 냄새를 걸러내듯, 신장은 혈액에서 노폐물을 걸러 소변으로 배출하는 여과 기능을 수행한다. 신장에 손상을 입어 이와 같은 혈액 여과 기능이 작동하지 못하게 된 상태를 만성 신장병이라 부르는데, 이들이 2021년 기준 3만 명쯤 되는 신장 이식 대기자의 정체다.

친인척 장기이식을 제외하면, 뇌사자 장기기증 외엔 다른 이식 경로가 적다. 그 탓에 2020년 기준, 신장 이식을 받으려면 꼬박 4년 9개월을 기다려야만 한다. 그러니 기다리다 죽는 사람도 나오고, 막대한 금액을 지불하고라도 ‘기증’ 형식을 빌려 불법 장기매매를 시도하는 이들도 꾸준히 적발되는 식이다. 이런 비극을 막고자 뇌사자 장기기증을 활성화하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지만, 결국은 이것도 미봉책일 뿐이다. 신장 이식 대기자가 다른 장기이식 대기자와 비교하여 유독 많은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최근 10년간 장기이식 대기 중 사망자 수.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최근 10년간 장기이식 대기 중 사망자 수.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2018년 기준 만성 신장병 환자의 41%는 당뇨병을 앓고 있었다. 남들처럼 별것 아닌 성인병 하나 끼고 사는 게 아니다. 선후 관계를 따져보면 이들은 당뇨병 때문에 신장이 망가진 것에 가깝다. 혈당이 높아지면 혈액은 마치 시럽처럼 끈적해지는데, 신장에서 혈액 여과를 담당하는 미세혈관은 이런 병리적 상태를 버티지 못한다. 정수기 필터가 망가지는 것처럼 신장이 손상을 입는 것이다. 비슷한 일은 고혈압에서도 나타난다. 미세혈관이 과도한 혈압을 못 버텨서다.

그렇지만 환자들에게는 이런 내용이 너무 낯설다. 고혈압이나 당뇨병은 ‘뭔가 수치가 높다’라는 추상적 건강 위험일 뿐이라, 매일 약을 챙겨 먹을 이유도 적다. 별일 있겠냐는 낙관으로 치료 적기를 놓쳐 이식 대기자가 된 이들은 기약 없이 뇌사자를 기다리다 죽는다. 이것이 장기 부족이나 뇌사자 기증제도의 문제인가, 아니면 시민 보건교육이 부재해서 생긴 문제인가. 우리는 오래 유예됐던 죽음을 이제야 맞는 중이다. 노령화가 심화하기 전에 대책이 나오길 빈다.

박한슬 약사·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