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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탄 고시원 속 멀쩡한 '돈뭉치'…화마도 '10년 피땀' 못 삼켰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멀쩡해야 하는데 제발, 제발….”
지난 12일 오후 3시쯤 서울 영등포구 한 고시원 앞. 회색 운동복을 입은 15명은 연신 한숨을 내쉬며 걱정을 했다. “그것 때문에 잠도 못 잤다”는 말도 나왔다. 이들은 전날 새벽 2명의 생명을 앗아간 ‘영등포 고시원 화재’의 이재민들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목숨은 건졌지만, 화재 때 미처 챙기지 못한 물건들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휴대폰, 현금과 카드, 신분증, 약 등 소중한 물건들이 불에 타지 않았을까 염려한 것이다. 속옷만 입은 채로 맨발로 불길을 피했던 이들은 모두 긴급 구호 물품으로 받은 같은 운동복을 입고 있었다.

[현장에서]

불이 난 서울 영등포구 고시원 복도. 오후 3시에도 빛이 잘 들어오지 않고 있다. 안대훈 기자

불이 난 서울 영등포구 고시원 복도. 오후 3시에도 빛이 잘 들어오지 않고 있다. 안대훈 기자

“언제 들어갈 수 있냐”며 영등포구청 직원을 재촉하기도 하던 이재민들은 막상 고시원 입구에 서자 멈칫했다. 지상 3층 건물의 1층 입구까지는 빛이 들었지만, 2층에 위치한 고시원 입구부터는 시야를 확보할 수 없을 만큼 어두웠기 때문이다. 화재로 전기가 차단된 고시원 복도와 방은 암실과 다름없었다. ‘굿모닝’이라는 고시원 이름이 무색하게도 오후 3시인데도 저녁 같았다. 이재민들은 구청 직원의 스마트폰 전등과 창문이 있는 방에서 조금씩 들어오는 빛에 기대어 벽을 짚으며 각자의 방을 찾아갔다. 새까맣게 타버린 고시원 복도 벽면을 만진 그들의 손에 그을음이 묻었다.

지난 12일 서울 영등포구 고시원 화재 현장에서 이재민들이 미처 챙기지 못한 짐을 챙기고 있다. 구청 직원이 휴대폰 전등으로 빛을 비춰주고 있다. 안대훈 기자

지난 12일 서울 영등포구 고시원 화재 현장에서 이재민들이 미처 챙기지 못한 짐을 챙기고 있다. 구청 직원이 휴대폰 전등으로 빛을 비춰주고 있다. 안대훈 기자

불이 완전히 꺼진 지 30시간 가까이 흘렀지만, 탄내도 여전했다. 90cm가 되지 않는 복도의 바닥은 검은 재와 소방용수로 범벅이 돼 발걸음을 옮기기 쉽지 않았다. 불이 시작된 곳으로 조사된 26호실 바로 옆방에 살았던 60대 윤모씨는 화재 당시 기억이 떠올랐는지 “죽다 살아난 여길 내가 왜 다시 왔나”라고 혼잣말을 했다. 윤씨는 “문을 열자마자 시커먼 연기가 나를 덮쳤다. 1cm 앞도 보이지 않았는데, 좁은 복도에서 뭔가 발에 걸렸는데 그게 사망자였던 것 같다”며 아비규환이었던 당시 상황을 전했다.

 서울 영등포구 고시원 화재 현장에서 한 이재민이 옷주머니에 모아둔 돈을 찾고 있다. 안대훈 기자

서울 영등포구 고시원 화재 현장에서 한 이재민이 옷주머니에 모아둔 돈을 찾고 있다. 안대훈 기자

“아이고 다행이다. 여기 벗어나려고 10년 모은 돈 불탔을까 봐.”

이재민들이 ‘귀가’한 뒤 10여 분쯤 지났을 때, 일부 방에서는 안도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고물상에서 일하는 50대 김모씨는 작은 원룸을 구할 돈이었던 현금 400여만 원을 방에서 찾은 뒤 연신 ‘아이고, 아이고’라고 읊조렸다. 노부모 생계비, 고시원 월세, 식비를 빼고 남은 급여를 10년 넘게 모은 돈이었다. 밝힐 수 없는 개인 사정으로 계좌를 만들 수 없었다는 김씨는 현금으로 받은 급여를 여러 옷의 주머니에 모아두고 있었다고 했다. 일터에서 화재 소식을 접한 뒤 밤잠을 설칠 수밖에 없었다. 김씨는 “새벽 5시 출근해 일하고 있는데, 불났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옷이고 뭐고 다 필요 없었다. 이 돈이 탔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만 했다”고 했다.

지난 12일 서울 영등포구 고시원 화재 현장에서 발견한 거주민의 틀니. 안대훈 기자

지난 12일 서울 영등포구 고시원 화재 현장에서 발견한 거주민의 틀니. 안대훈 기자

2명이 숨진 서울 영등포구 고시원 화재 현장에서 개인 물건을 찾고 나온 이재민의 손에 그을음이 묻어 있다. 안대훈 기자

2명이 숨진 서울 영등포구 고시원 화재 현장에서 개인 물건을 찾고 나온 이재민의 손에 그을음이 묻어 있다. 안대훈 기자

서울 영등포구 고시원 화재 현장에서 소방대원들이 화재 원인을 조사 중이다. 안대훈 기자

서울 영등포구 고시원 화재 현장에서 소방대원들이 화재 원인을 조사 중이다. 안대훈 기자

화마가 덮친 서울 한복판의 고시원에는 도시 빈민의 한숨이 계속되고 있다. 길 건너에 고급 신축 아파트에서는 들리지 않을 작디 작은 숨소리다. 직선거리로 1㎞ 떨어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주변에선 이날 벚꽃의 축제가 한창이었다. 2021년 소방청 백서에 따르면, 2020년 기준 전국의 1만1734개 고시원 가운데 절반가량인 5741개가 서울에 밀집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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