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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문재인의 고해성사, 윤석열의 관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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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정민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민 논설실장

이정민 논설실장

새 정부 출범 한 달여를 앞둔 시기의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막장극은 신구 권력 정면충돌의 예고편이다. 민주당은 진영 내부를 향해 강렬한 메시지를 발신중이다. “선거 지면 없는 죄 만들어서 정치 보복할 것”(이재명 후보)이라던 ‘예언’이 곧 현실로 도래하기라도 할 듯, 공포의 애드벌룬 띄우기다.

민주당 정권은 불과 1년전 부패·경제 등 6대 범죄만 검찰이 직접 수사하고 나머지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와 경찰이 나눠 맡도록 하는 수사권 조정안을 강행 처리했다. 그러더니 권력교체를 앞두고 느닷없이 검찰은 6대범죄 수사에서도 완전히 손을 떼게 하겠다고 나섰다. 검찰 대신 어디서 수사할 것인지조차 마련하지 않은 수준 미달의 법 개정안을 억지로 밀어붙이고 있다.

신·구 권력 충돌 … 국민 불행해져
전임 감옥 가는 정치보복 끝내야
문, 재임 중 과오 국민에 사과하고
검수완박 법안 거부권 행사하길

명분도 없고 순수성도 의심받는 검수완박엔 정치보복의 공포가 자리 잡고 있다. 사실이든 아니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부엉이바위에서 뛰어내리게 한 원죄가 ‘정치 검찰’의 무리하고 무례한 수사에 있다는 집단적 믿음이 정치보복 기제를 가동시켰다. 정치보복 막으려면 검찰을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럴듯하다. 허나 이해 안 되는 건 그토록 검찰권 남용을 증오했으면서도 이명박·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을 감방에 넣는데 검찰을 한껏 이용한 점이다. 가증스러운 권력의 두 얼굴이다. 그러나 20년 집권 소망이 물거품이 되고 5년만에 권력을 내놓게되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울산시장 선거 개입, 월성 원전 경제성 조작, 대장동개발비리, 법인카드 유용 의혹 등 첩첩이 쌓인 수사 파일이 검찰에 대한 공포를 소환해냈는지 모른다. 피가 피를 부르는 복수극이 휘몰아칠 것이란 과장된 공포심과 콘크리트 지지를 보내는 강성 지지층에 둘러싸여 마지막 보루여야 할 집단지성마저 마비시킨 모양이다.

0.73%포인트 격차로 신승한 신 권력과 40%대 콘크리트 지지율로 결집한 구 권력. 팽팽히 맞선 이 둘이 충돌하면 국민은 불행해진다. 대 이은 복수와 보복, 두 진영으로 쪼개진 국민, 국익 실종 정치는 우리 자신을 파멸시킬뿐이다. 이런 불행을 막으려면 전직 대통령을 감방에 보내는 정치 보복의 악순환 고리를 이제는 끊어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이 과업을 이루길 소망한다. 어쩌면 그게 검찰총장에서 대통령으로 직행한 윤 당선인에게 운명지어진 숙명일지도 모른다. 국회의원 한번 안 해본 그가 정치입문 9개월 만에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정권교체를 갈망한 보수진영은 이미 절반의 소망을 이뤘다. 이제 남은 건 출마회견 때 밝힌대로 공정과 상식이 회복된 부강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일이다. 녹록지 않은 과제다. 더구나 국민 절반을 등 돌리게 해선 달성할 수 없는 꿈이다. 그런 점에서 윤 당선인이 같은 검찰 출신인 최측근 한동훈 사법연수원 부원장을 법무장관 후보자로 지명한 건 오해를 살 수 있는 신중치 못한 접근이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남긴 관용과 절제의 정신을 새겼으면 한다. DJ는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자신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고 정치적으로 탄압했던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을 사면복권하고,박정희 대통령 기념관 건립을 앞장서 추진했다. 그가 남긴 말이 있다.

“영국은 1649년 청교도혁명때 국왕 찰스 1세를 처형했다. 그러나 정적에 대한 보복은 혼란과 내분을 가져왔다. 그 결과 크롬웰이라는 더 지독한 독재자가 출현했다. 그후 1688년 명예혁명때는 제임스 2세를 축출했지만 프랑스로 도망가도록 퇴로를 열어줬다. 제임스 2세는 3대에 걸쳐 왕권을 수복하겠다고 영국 정부를 괴롭혔지만 정치 보복으로 입게될 정치·사회적 후유증에 비하면 오히려 그편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루이 16세와 왕비의 국외 탈출을 막고 처형한 프랑스나 니콜라이 2세 일가를 처형한 러시아 혁명과 비교하면 영국의 결단은 현명하고 위대했다. 영국은 관용과 질서 속에서 의회정치의 꽃을 피울 수 있었다. 영국인들의 용서와 화해를 떠올리며 진정 힘들었지만, 저들을 용서했다.”(『김대중 자서전』 2)

곧 청와대를 떠날 문재인 대통령도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있다. 재임 중 빚어진 과오와 실패에 대해 국민 앞에 고해성사하는 일이다. 문 대통령은 부동산, 코로나, 조국사태, 북핵문제 등 내정에서 외치에 이르기까지 잘못을 한번도 속시원하게 사과한 적이 없다. 선택적 사과, 선택적 침묵, 선택적 분노, 선택적 정의, 선택적 공정의 태도를 보였다. 국민을 부자와 빈자, 임대인과 임차인, 자본가와 노동자, 의사와 간호사, 친일과 반일, 여성과 남성으로 편갈랐다. 강성 지지자들의 문자 폭탄을 ‘양념’으로 용인함으로써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공론장이 황폐화되는 걸 방조했다. 그 결과는 대통령의 높은 지지율(43.2%, 4월11일 갤럽)과 5년만의 정권교체다.

가톨릭 신자인 문 대통령은 고해성사의 의미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건 일탈했던 하느님과의 화평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데 있다. 마찬가지로 지난 5년간 대한민국을 통치한 대통령으로서 국민과의 관계를 정상 회복하려면 고해성사를 피해선 안될 것이다. 논란 많은 검수완박 법안은 거부권을 행사하는 게 순리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