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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공기살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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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장주영 기자 중앙일보 기자
장주영 사회에디터

장주영 사회에디터

대학병원 교수인 정태훈의 가족에게 어느 날 비극이 찾아온다. 6살 아들이 폐가 굳어버리는 원인 불명의 급성 간질성 폐질환 진단을 받은 것. 아들을 간호하던 아내마저 갑자기 비슷한 증상으로 사망하면서 의문이 증폭된다. 태훈은 가족들의 죽음에 의문을 품고 원인을 찾아나선다. 22일 개봉하는 영화 ‘공기살인’의 내용이다. 이 영화는 가습기 살균제 참사를 다루고 있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는 국내 환경 보건 분야에서 발생한 최악의 사건으로 기록될 만하다.

1994년부터 17년간 1000만 병가량이 팔린 가습기 살균제에 포함된 독성물질은 수많은 사람의 목숨과 건강을 앗아갔다. 기업들은 유해성 검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고, 일부 기업은 유해성을 알고도 묵인했다. 얄팍한 상술이 만들어낸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다. 2020년 사회적 참사 특별조사위원는 피해자만 95만 명, 사망자는 2만 명으로 추산했다.

최근엔 11년 만에 나온 피해 구제 조정안마저 사실상 무산됐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 구제 조정위원회는 지난달 말 피해자 유족에 2억~4억원을 지급하고, 최중증 피해자에게 연령에 따라 최대 5억원을 지원하는 내용의 최종 조정안을 공개했다. 하지만 조정에 참여한 9개 기업 중 애경산업과 옥시레킷벤키저 등 2개 기업이 반대하고 나섰다. 두 기업은 최대 9240억원인 조정액의 60% 이상을 부담한다.

조정안 무산의 책임을 두고 두 기업은 물론 정부와 정치권에 대한 비판이 나온다. 기업·피해자 간 협의라는 사적 조정 원칙을 이유로 뒤로 빠져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조정위 안팎에서는 “정부가 자잘한 간섭은 하면서, 막상 적극적인 역할을 요구하면 발을 뺀다”는 불만이 나온다고 한다. 정치권 역시 피해자들 앞에서만 요란을 떨 뿐, 정작 조정안 무산 이후에는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거나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지난 8일 ‘공기살인’ 시사회에서 주연 배우 김상경은 이 영화에 남다른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공기살인’ 시나리오를 받고 하늘에서 나에게 주는 소임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털어놨다. 정부는 그리고 정치인들은,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의 피해 복구를 위한 노력을 충분히 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그것이 그들의 소임이었다. 멀리서 ‘원만한 합의’만 응원했다면, 공기살인을 묵인한 것과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