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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조가 있는 아침

(119) 춘산(春山)에 불이 나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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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춘산(春山)에 불이 나니
김덕령(1567∼1596)

춘산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에 내 없는 불 나니 끌 물 없어 하노라
-김충장공유사(金忠壯公遺事)

적보다 무서운 내부의 모함

올들어 웬 산불이 이리 잦은가. 봄철 산에 불이 나니 피지도 못한 꽃들이 다 불붙는구나. 저 산에 일어난 저 불은 끌 수 있는 물이라도 있지만, 내 마음 속에 연기도 없는 불이 나니 끌 물조차 없구나.

김덕령(金德齡)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서른 살 젊은 나이에 죽은 무인(武人)이 남긴 연시(戀詩)일까. 그러나 이 시조는 매우 절박한 사연을 담고 있다. 그가 형조좌랑(刑曹佐郎)이었을 때 전쟁이 일어나자 담양부사 이경린(李景麟) 등의 천거로 종군 명령이 내려졌고, 광해군의 분조(分朝)로부터 익호장군(翼虎將軍)의 군호를 받았다. 전쟁이 화의(和議) 분위기에 들었을 때 이몽학(李夢鶴)의 난이 일어난다. 도원수 권율의 명으로 운봉(雲峯)까지 진군했다가 진압됐다는 소식에 진주로 회군했다. 이때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무고로 곽재우 등과 함께 체포됐다. 용력(勇力)이 뛰어났던 그는 20일 동안에 여섯 차례의 혹독한 고문으로 옥사했다.

이 시조는 옥중에서 쓴 것으로 전해진다. ‘춘산에 불이 나니’는 임진왜란을, ‘못다 핀 꽃’은 왜병과 싸운 젊은이들을, 적과의 싸움은 무찌를 수 있지만 내부의 모함으로 고초를 겪는 억울함은 해결할 방도조차 없다는 피맺힌 한을 읊은 것이다.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