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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미술관 하나 생겼을 뿐인데 울산이 뜨겁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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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서울에서 기차로 2시간 거리. 최근 이곳에 가봤다면 ‘전자융합예술의 선구자’라는 알도 탐벨리니(1930~2020) 작품 앞에서 잠시 넋을 잃어봤을 것이다. 전시장 안에 발을 들였을 뿐인데 빛과 어둠, 웅장한 사운드가 폭풍처럼 휘몰아친다. 작가는 관람객을 무한의 시공간 안에 내던지고 ‘우리는 모두 우주에 떠다니는 작은 먼지 같은 존재’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울산시립미술관 RX(확장현실) 랩에서 선보이고 있는 탐벨리니의 유작 ‘우리는 새로운 시대의 원주민들이다’(2020) 이야기다.

지난 1월 6일 개관한 울산시립미술관에 벌써 8만6000여 명이 다녀갔다. 개관을 기다렸다는 듯 관람객 반응이 뜨겁다. 하루 평균 1000명이 꾸준히 찾은 셈이다. 개관과 동시에 울산 젊은이들의 성지이자 가족과 함께 찾는 명소가 됐다. 국내에서 이토록 뜨겁게 환영받은 공공 미술관이 있었을까. 시민들은 앞다퉈 SNS에 방문 후기를 올리며 홍보 요원을 자처했다. 전국 미술관의 관장과 큐레이터의 필수 탐방 코스로도 떠올랐다. 공공 미술관 하나가 바꿔놓은 울산의 새 풍경이다.

1·2·3호 소장품이 백남준 작품

알도 탐벨리니, ‘우리는 새로운 시대의 원주민들이다’. 2020, Immersive Video . [사진 이은주]

알도 탐벨리니, ‘우리는 새로운 시대의 원주민들이다’. 2020, Immersive Video . [사진 이은주]

시민들이 이토록 반긴 이유가 있다. 광역시 승격 25년 만에 처음 생긴 공공미술관이기 때문이다. 준비에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논의는 10여 년 전에 시작됐고, 부지는 2016년 7월 확정됐다. 2019년 8월 착공해 6182㎡의 부지에 지하 3층, 지상 2층의 건물 연면적 1만2770㎡ 규모로 완성됐다. 건립 예산은 총 677억 원. 이제 울산 시민들은 소문난 전시를 보기 위해 서울이나 고속열차로 20~30분 걸리는 부산·대구로 가지 않아도 된다.

미술관의 정체성도 뚜렷하다. ‘한국 산업수도’라는 지역 특성을 살려 미디어아트 중심의 미술관을 자처했다. 도시가 자연과 기술, 산업과 조화를 이룬 것처럼 예술로 삶의 질을 한층 올리겠다는 차별화 전략이다. 미술관의 1호 소장품 ‘거북’부터 이런 의지를 보여준다. ‘거북’은 미디어 아트 창시자 백남준이 텔레비전 166대를 거북 형상으로 만든 대형 비디오 조각 작품(10m×6m×1.5m)이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와 연결되고 테크놀로지에 대한 선견지명, 아름다움, 위용을 모두 갖춘 걸작이다.

백남준, 거북(1994) 166대 모니터, 3대의 재생장치, 3종의 영상 이미지, 영상분배기, 철 구조물, 150x600x1000㎝.[사진 울산시립미술관]

백남준, 거북(1994) 166대 모니터, 3대의 재생장치, 3종의 영상 이미지, 영상분배기, 철 구조물, 150x600x1000㎝.[사진 울산시립미술관]

2, 3호 소장품도 백남준 작품이다. 울산시가 국내 최초로 도입한 ‘소장품 기금제’가 작품 확보를 뒷받침한다. 울산시는 개관 전인 2017년부터 지금까지 5년간 140억 원을 적립했다. 대부분의 국공립미술관이 한해 5억~10억 원의 예산을 책정해 1년 단위로 소장품을 사는 것과 달리, 울산은 적립 재원 안에서 융통성 있게 작품을 사들이는 제도를 마련했다. 서진석 울산시립미술관장은 “소장품을 공모 방식으로 구입하는 게 아니라 좋은 작품이 나올 때마다 ‘국제 소장품 제안위원회’ 가 제안하는 방식으로 사들여나가는 아시아 최초의 컬렉션”이라고 말했다.

3개의 전시실과 함께 국내 공공미술관 최초로 실감 미디어아트 전용관(XR랩)을 갖춘 것도 특징이다. XR 랩(Extended Reality Lab)은 가상현실(VR), 증강현실(AR), 혼합현실(MR) 등 최신 디지털 기술의 미디어아트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노래하는 고래, 잠수하는 별’이 열리고 있는 어린이 전시장. [사진 이은주]

‘노래하는 고래, 잠수하는 별’이 열리고 있는 어린이 전시장. [사진 이은주]

체험 전시는 어린이를 위한 기획전인 ‘노래하는 고래, 잠수하는 별’(5월 8일까지, 참여작가 추미림·김다움)로도 이어진다. 규모는 작지만 상상력을 자극하는 전시장 안에서 사람과 자연, 기술이 공존하는 도시 ‘울산’을 주제로 아이들이 참여해 작품을 완성하는 전시다. 유치원생 아들을 데리고 이곳을 찾은 30대 주부는 “그동안 미술관이 붐빈다는 소문이 있어 일부러 기다렸다가 이제 왔다”며 “앞으로 더 자주 오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신선했다, 바닷가 옆 미술관 특별전

건축가 안용대 가 설계한 울산 복정동 울산시립 미술관 전경. [사진 울산시립미술관]

건축가 안용대 가 설계한 울산 복정동 울산시립 미술관 전경. [사진 울산시립미술관]

타지 방문객의 탄성을 자아낸 특별 전시도 있었다. 울창한 솔숲으로 유명한 대왕암 옆 울산교육연수원(옛 방어진중학교)에서 열린 ‘소장품전: 찬란한 날들’이다. 대왕암공원의 빼어난 풍광을 바라보며 폐교에서 빠져드는 미디어아트 전시가 남다른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정필주 울산시립미술관 학예사는 “임시로 전시공간으로 썼지만, 주변 풍광 자체가 작품이 된 곳”이라며 “많은 타지 관람객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술관’을 보고 간다는 소감을 남겼다”고 전했다.

서진석 울산시립미술관장은 “개관을 준비할 때는 기대감을 가질 여유조차 없었다”며 “막상 열고 보니 시민들이 이런 문화공간을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며 “호응 자체가 큰 보람”이라고 말했다. 서 관장은 “울산엔 외지에서 유입된 젊은 인구가 많고, 그 어느 도시보다 중산층이 두텁다”며 “첨단 기술·문화에 대한 이해와 포용도 넓어 실험적 작품에도 열려 있기 때문에 앞으로 지속해서 연구하며 미디어아트 중심 미술관의 흐름을 이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미술관은 지난 10일 일부 개관전을 종료하고 새 전시를 준비 중이다. 오는 28일부터 5월 5일까지 80여 팀의 작가가 ‘부기우기 미술관’을 선보이고, XR 랩에선 울산의 모습을 실감형 디지털 영상으로 제작한 정연두의 ‘오감도(烏瞰圖)’를 28일부터 7월 31일까지 전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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