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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강국 한국, 국력에 걸맞은 해외정보기관 만들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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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채인택
채인택 기자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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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 국제전문기자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7주가 되도록 난마 속에서 허덕이는 이유는 책으로 써도 몇 권은 족히 될 것이다. 그중 가장 쉽게 다가오는 것이 ‘상대를 얕봤다’는 점이다.

군사 하드웨어나 경제력만 보면 러시아는 침공 며칠 안에 우크라이나 정부를 전복하고 괴뢰 정권으로 대체할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인은 6·25 전쟁 당시 한국인처럼 침략에 맞서 피와 눈물로 기적을 만들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살아남아 11일 한국 국회를 상대로 화상으로 연설했다. 한국이 최근 아랍에미리트(UAE) 수출을 홍보했던 미사일 요격미사일 ‘천궁Ⅱ’ 등으로 짐작되는 방어 무기의 지원을 요청했다.

푸틴의 우크라 침공 시간만 허비
사전 정보전쟁서 실패했을 수도
미국은 9·11 후 국가정보국 설립
정권과 독립된 이스라엘 모사드

러시아의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부 방관도 최근 중국과 북한에 미사일 지원을 요청했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사실이라면 엄청난 물량을 투입하고도 전쟁을 뜻대로 이끌지 못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서방이 반도체 등 전략물자의 대러 수출을 막아 부품이 부족하자 중고 무기를 얻어 부품을 확보하려는 의도일 수도 있다.

앞으로 전쟁이 언제까지 어떻게 진행될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런 상황까지 이른 건 러시아에 ‘정보실패’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전 세계는 1989년 소련에 이어 지난해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하는 걸 목격하면서 전쟁 승패가 군사 하드웨어나 경제력으로만 결정되진 않는다는 점을 재확인했다. 그런데도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전쟁에 나선 건 배경에 정보실패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1968년 미국의 베트남전 오판

우크라이나 키이우 근처에 버려진 러시아군 전차·장갑차.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정세오판이 원인의 하나로 지목된다. [AFP=언합뉴스]

우크라이나 키이우 근처에 버려진 러시아군 전차·장갑차.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정세오판이 원인의 하나로 지목된다. [AFP=언합뉴스]

정보의 수집과 분석, 상황·정세 판단은 전문 분야다. 정치적 잡음이나 심리적 허세 등은 오판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특히 전쟁과 전투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8년 1월 31일 미군과 남베트남군은 베트콩의 구정 대공세에 허를 찔렸다. 설마가 화를 불렀다. 73년 10월 욤 키푸르 전쟁(제4차 중동전쟁) 당시 이스라엘은 소련제 지대공·대전차 미사일로 무장한 이집트의 기습으로 항공·기갑 전력의 상당수를 잃고 절망적인 상황에 빠졌다가 미국 지원으로 가까스로 일어섰다. 침공 징후를 사전에 포착했지만 무시됐다. 67년 ‘6일 전쟁’의 압승에 취해 적을 얕보고 판단을 그르친 대가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국제정세 판단을 그르쳐 두고두고 화근이 될 수도 있다. 미국은 79년 1월 이란 이슬람혁명을 예상하지 못하고 허둥댔다. 심지어 CIA는 혁명 직전인 78년 8월 “지금 혁명이나 혁명 전 단계가 아니다”라는 보고서를 냈을 정도였다. 넘치는 혁명 기운을 감지하지 못한 대가를 미국은 지금까지도 치르고 있는 셈이다. 제대로 키운 지역 전문가의 부족도 한몫했을 것이다.

미 정보당국은 91년 소련 붕괴도 예상하지 못해 체제전환의 극심한 혼란기를 유발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당시 경험이 현재 러시아의 공세적인 대외 정책의 바탕이 됐을 수도 있다.

2001년 9·11테러도 마찬가지다. 미 정보당국은 개별적으론 수많은 징후를 포착했지만, 기관별 벽과 판단 실수로 비극을 막지 못했다. 미국은 실패를 바탕으로 2004년 ‘국가정보 개혁과 테러리즘 방지법’을 제정했다. 2005년 국가정보국(DNI)을 설립해 다음 주인 22일 창립 17주년을 맞는다. DNI는 중앙정보국(CIA)·연방수사국(FBI)과 각 군 정보국 등 16개 정보조직과 자신을 포함해 모두 17개 기관을 지휘·통솔한다. 정보 그물을 더욱 촘촘하게 치고 시너지를 높이기 위해서다.

눈에 띄는 것은 DNI가 대통령 직속이 아니라 독립 기관이라는 사실이다. 정보 공동체가 정치와 권력의 입김에서 자유로운 것은 물론, 조직의 수장이나 간부들이 외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소신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오로지 국민과 국가를 위해 일할 수 있도록 하는 기본 장치다.

지난해 조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한 뒤로 DNI 국장은 모든 국무회의에 참석하고, 백악관 및 각 부처와 면밀하게 연락망을 유지한다. 정보기관과 정부 간 쌍방 정보교류의 중요성을 인식한 결과다. 미국에서 정보 개혁이란 정보 강화를 위해 기관 통합과 위상 강화와 동의어인 셈이다. 정보의 가치를 존중하는 지도자와 정치인의 인식을 확인할 수 있다.

지역전문가 육성 강화해야

이스라엘의 대외정보·공작 기관인 모사드도 마찬가지다. 이 기관은 오직 정부 수장인 총리에게만 보고 의무가 있다. 국장도 평균 재임 기간도 5년 6개월 정도다. 정권이나 정부가 바뀌어도 국장이 그대로인 게 일반적이다. 1949년 창설 이래 13대째인 다비드 바르네아 국장도 마찬가지다. 정보기관은 기본적으로 전문 조직으로 보는 지도자와 정치권, 그리고 국민의 인식 때문이다. 그만큼 위험한 정보활동과 공작으로 국민을 지켜온 업적이 이를 뒷받침한다.

한국은 이제 세계 10대 경제 대국의 위상, 자랑스러운 민주주의 체제, 군사적 하드웨어에 걸맞은 해외정보기관이 필요할 때다. 정확한 국제정세 판단을 위해 지역 전문가와 해외 정보망을 한층 강화해야 한다. 국제정보의 중요성을 저평가하고 북한과 주변국 정보에만 집중해선 미래를 보기 힘들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저항과 민주주의 수호의 상징이 된 젤렌스키의 연설이 유독 한국 국회에서만 초라하게 열린 것은 정치권이 국제사회의 흐름을 제대로 인식하고 못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일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라도 독립 해외정보기관의 체계적인 활동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