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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트맨, 우리의 가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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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장강명 소설가

장강명 소설가

글을 쓸 때 ‘노동요’로 삼는 음악이 있다. 원고 작업은 그다지 흥분되는 일이 아니고, 감흥에 잠기거나 심장이 너무 빨리 뛰면 오히려 집필에 방해가 된다. 그래서 단조롭고 우울한 곡을 선호한다. 최근에는 영화 ‘더 배트맨’의 사운드트랙을 자주 들었다. 결혼행진곡 첫 소절을 천천히 거꾸로 반복하는 듯한 어두운 분위기의 배트맨 테마곡이 일품이다.

그렇게 새로운 배트맨의 주제가는 수십 번, 어쩌면 수백 번을 들었는데, 정작 영화 ‘더 배트맨’은 보지 않았다. 보러 갈까 망설이는 사이에 우리 동네 극장의 상영시간표에서는 이 영화가 사라졌다. 큰 화면으로 볼 기회를 놓쳤다고 생각하니 그제서야 아쉬운 마음이 든다. 이놈의 우유부단이여. 좋은 평을 받은 모양이던데.

고담에서 산다고 느끼는 현대인
범죄·부패의 사회 시스템에 분노
우리 모두 신경증 앓는 것 같아

‘더 배트맨’ 관람을 주저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우선 영화가 너무 길었다. 상영 시간이 2시간 56분이나 된다. 과연 중간에 화장실에 안 가고 버틸 수 있을까. 그리고 배트맨 영화를 그간 너무 많이 본 것 같았다. 세어보니 내가 본 배트맨 실사 영화가 10편이나 된다. 어린 시절의 브루스 웨인이 등장하는 ‘조커’까지 포함하면 11편이다.

‘더 배트맨’이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도 솔직히 반갑다기보다는 ‘아니, 또 배트맨이야?’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배트맨, 물론 매력적인 히어로다. 캐릭터 사업을 펼치기도 좋다. 그런데 사골국도 아니고 도대체 몇 번을 우려먹는 거냐.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어둠의 기사라는 설정도 그만하면 여러 연출자가 온갖 각도로 해석하고 또 재해석하지 않았나.

원고가 안 풀리면 쓸데없는 상념에 잠기게 된다. 배트맨 테마곡을 들으며 배트맨은 어떻게 이렇게 꾸준히 인기가 있을까, 왜 사람들은 배트맨에 질리지 않을까, 생각했다. 근본 원인은 배트맨의 안이 아니라 밖에 있는 것 아닐까 싶었다. 세상이 점점 배트맨이 사는 도시처럼 변하고 있고 우리들이 모두 조금씩 배트맨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라는 가설이다.

슈퍼맨이 영화와 만화에서 활약하는 도시는 메트로폴리스다. 이 도시는 가끔 외계인의 습격도 받고 렉스 루터 같은 악당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밝다. 메트로폴리스 시민들은 진취적이며, 자기 도시를 믿고 사랑하는 것 같다. 배트맨의 배경인 고담의 시민들은 그렇지 않다. 고담은 총체적 난국이다. 범죄와 부패가 심각하고 빈부격차는 폭발 직전이다.

그래서 배트맨은 더러 가엾고 우스워 보인다. 그가 아무리 범죄자를 때려잡아도 고담의 상황은 달라지지 않을 게 확실하다. 심지어 배트맨 본인도 그 사실을 아는 듯 보인다. 그는 실패할 운명이다. 그럼에도 싸운다. 그래서 좀 멋있긴 하지만, 그러느니 그 많은 돈을 범죄예방 환경설계 프로젝트나 전과자 재활 사업에 투자하는 편이 더 현명하지 않을까?

그런데 현대인은 자신이 메트로폴리스가 아니라 고담에서 산다고 생각한다. 순수와 희망의 상징인 슈퍼맨의 인기가 두어 세대 전부터 시들해진 것은 그 때문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두어 세대 전부터 우리를 사로잡은 정서는 좌절과 분노 아닐까. 밤에 가면을 쓰고 밖에 나가 이 사태의 책임자를 두들겨 패고 싶어 하는 충동들이, 그 냄새가, 느껴지지 않나.

하지만 문명사회에서는 그런 욕망을 인정하는 것조차 위험하다. 그래서 브루스 웨인에게는 박쥐 가면과 망토가 필요하고, 우리에게는 배트맨 영화가 필요하다. 실명으로 운영하는 소셜미디어 계정에는 착한 말 정의로운 말만 쓰지만 익명 게시판은 시궁창이다. 모두 조금씩 위선자이고, 모두 조금씩 다크 히어로이며, 모두 조금씩 신경증 환자들이다.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의 목적이 뭔지 알 수 없어 무섭다며 너스레를 떠는 이들을 나는 기이하게 여겼다. 그 영화에서 조커는 의도가 분명한 중2병 환자였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위선자라고 믿었고, 그게 역겹다며 주변 인물을 타락시키고 시민들이 악행을 저지르게 하려고 애썼다. ‘다크 나이트’의 조커는 약간은 옳았기 때문에 무서웠다.

배트맨은 그래도 고결하다. 그는 자신이 내리막길 위에 있음을 알고 괴로워하며 거기에 저항한다. 불살(不殺) 같은 자신만의 규칙을 지키려 노력한다. 현대인은 배트맨을 사랑한다, 아직까지는. 그가 우리와 같은 병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마블이 얼마 전 디즈니플러스에서 공개한 드라마 ‘문나이트’의 수퍼히어로 문나이트는 해리성 정체감 장애를 앓고 있다고 한다. 온라인 정체성, 메타버스 정체성을 따로 만드는 세대에게 어울리는 영웅 같다.

장강명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