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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달의 예술

격동의 시대, 음악의 의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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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오희숙 음악학자·서울대 음대 교수

오희숙 음악학자·서울대 음대 교수

새봄과 함께 2022 교향악 축제가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진행되고 있다. 음악적으로 풍성한 4월을 선사하는 교향악 축제는 국내 20개 오케스트라가 참여하는 명실상부한 대규모 음악축제이며, 동시에 현재 한국을 대표하는 지휘자들과 독주자들의 기량을 확인할 수 있는 장이다. 지난 2일 부천 필하모니오케스트라와 6일 수원 시립교향악단의 공연은 사회·정치적 격동 속에서 창작의 혼을 펼친 작품들을 중심으로 개성있는 기획과 예술성을 보였다.

장윤성이 이끄는 부천필의 프로그램은 독특했다. 금지와 저주를 다룬 문학 작품을 소재로 한 프랑크의 교향시 ‘저주받은 사냥꾼 op. 44’, 스탈린 사후에야 초연된 쇼스타코비치의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 가단조 op. 99’, 구원과 메시아에 대한 찬송가를 주제로 한 본 윌리엄스의 ‘토마스 탈리스 주제에 의한 환상곡’, 예술을 통해 세계의 구원을 꿈꾸었던 스크랴빈의 ‘교향곡 제4번 법열의 시’. 현실적 삶의 현장에서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열망을 담은 음악을 겹겹이 담은 부천필의 이번 공연은 높은 음악적 완성도를 보여줬다.

2022 교향악 축제가 말하는 것
부천필·수원시향의 개성적 사운드
현실을 넘어서는 음악의 힘

국내 20개 오케스트라가 참여해 4월 한 달간 펼쳐지는 2022 교향악 축제. [사진 예술의전당]

국내 20개 오케스트라가 참여해 4월 한 달간 펼쳐지는 2022 교향악 축제. [사진 예술의전당]

쇼스타코비치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은 이번 공연의 백미였다. 바이올리니스트 임지영은 숨을 멎게 하는 예리함과 강력한 추진력으로 쉬지 않고 질주하여 이 작품을 완벽하게 구현했다. 불규칙한 1악장의 긴 프레이즈를 자신만의 호흡으로 끌고 나가면서 현파트와 대위적으로 화합하고 플루트와 대화를 나누며 내면으로 파고드는 추상적인 세계를 드러냈고, 깊은 내공을 요하는 카덴차 역시 여유 있게 소화했다.

신지학과 니체에 심취했던 스크랴빈의 철학이 집대성된 ‘법열의 시’는 다채로운 음악적 단상이 연속적으로 나오는 작품이다. 난해하게 느껴질 법한 이 작품을 부천필은 설득력 있게 접근했다. 갑작스러운 음향의 폭발은 강렬했고, 유미주의적 사운드는 유혹적으로 연주했으며, 형형색색의 음색은 생생하게 드러났다. 지휘봉 없이 손과 팔을 쭉쭉 뻗으며 온몸으로 음악적 흐름을 이끈 장윤성의 카리스마와 함께한 사운드에서 진지한 철학적 사유의 세계를 실감할 수 있었다.

최희준이 이끈 수원시향은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과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을 자신감 있게 무대에 올렸다. 쇼팽이 고국 폴란드를 떠나면서 인생의 대전환점을 예고한 작품과, 쇼스타코비치가 작곡가로서 목숨이 위태로운 긴장된 상황에서 발표된 작품은 모두 작곡가의 삶의 굴곡점에서 창작되었다는 연결점을 보였다. 피아니스트 김도현이 협연한 담백한 쇼팽의 협주곡 후,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에서 수원시향은 이 교향곡에 기대할 수 있는 바로 그 적확한 사운드를 들려주었다.

긴장감 속에서 울린 날카로운 첫 시작은 풍성하면서 임팩트 있었고, 이후 등장하는 현의 울림은 황량한 벌판을 연상시키며, 쇼스타코비치의 외로움과 두려움을 상기시켰다. 쇼스타코비치가 현악과 관악 파트의 음향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색채를 표현했는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쇼스타코비치 특유의 왈츠 리듬이 매력적으로 나오는 2악장은 죽음의 그림자를 연상시키는 사운드를 보여주었고, 박력 있는 4악장에서는 빠른 템포 속에서 음향의 폭발과 안정감 그리고 클라리넷 선율에서 울리는 회상의 곡선이 아름답게 구현됐다. 음색·음량·리듬 등 모든 음악적 요소를 치밀하게 조절하면서 음악을 끌어내는 최희준 지휘자의 지휘봉에 따라 울리는 사운드에서 쇼스타코비치의 진수가 느껴졌다.

앙코르곡에서 부천필과 수원시향은 자신만의 개성을 한 번 더 드러냈다. 민요 선율을 주제로 한 본 윌리엄스의 ‘푸른 옷소매 변주곡’을 선택한 부천필은 현 파트의 부드러운 음향으로 청중을 내면 깊숙한 세계로 이끌었다. “우크라이나의 지휘자 친구의 소식이 끊겨서 애도의 마음으로 연주했다”는 장윤성의 설명과 함께, 시대를 짓누르는 긴박한 삶 속에서 음악의 의미를 찾는 부천필을 느낄 수 있었다. 수원시향은 차이콥스키의 ‘호두까기 인형’ 중 ‘갈잎 피리의 춤’을 연주했다. 플루트의 깜짝 놀란 만한 밝고 화려한 색채감으로 시작한 이 곡은 그야말로 음색의 향연을 보여주었다. 음악 그 자체로 승부하고자 하는 최희준 지휘자와 수원시향의 마음이 그대로 전달되는 앙코르곡이었다.

21세기 우리의 삶, 20세기 쇼스타코비치의 삶, 19세기 쇼팽의 삶 모두 격동적이다. 그리고 음악은 그 격동의 현실을 승화시킨다. 교향악 축제에서 삶과 음악을 다시 생각해 본다.

오희숙 음악학자·서울대 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