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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김영춘의 길, 송영길의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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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김형구 기자 중앙일보 기자
김형구 정치에디터

김형구 정치에디터

“이제 더 이상 가슴이 뛰지 않는다.”

‘86그룹 정치인의 맏형’ 김영춘 전 해양수산부 장관이 지난 6일 한 언론 인터뷰에서 밝힌 정계 은퇴의 변이다. 군정 종식과 남북 통일 등 자신을 정치로 이끈 거대 담론의 시대가 가고, 먹고사는 민생 문제에 유권자들이 적극 반응하는 생활정치의 시대가 왔다고 진단한 김 전 장관은 바뀐 시대에 걸맞은 역할을 후배 정치인들에게 맡기며 길을 떠났다.

1984년 고려대 총학생회장→1987년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비서→2000년 총선 서울 광진갑 한나라당 후보로 당선→2003년 탈당 후 열린우리당 창당 참여. 평탄하지 않았던 정치 궤적에 또 하나의 변곡점을 만든 건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이었다고 한다. “그분이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제가 (부산으로) 귀향하지 않고 서울에서 편하게 정치를 했을 건데, 이어달리기를 해야 된다는 마음이었다.”(6일 인터뷰)

지역주의와 싸운 김, 정치 은퇴
같은 81학번 송, 대비되는 행보
‘원칙 있는 패배’ 보기 힘든 민주당

김영춘 전 해양수산부 장관이 2020년 4월 27일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중앙포토]

김영춘 전 해양수산부 장관이 2020년 4월 27일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중앙포토]

민주당엔 험지였던 부산에서 지역주의 벽에 맞선 그의 국회의원 선거 도전 결과는 1승(2016년 부산진갑 당선) 2패(2012년·2020년 부산진갑 낙선). 지는 선거, 명분 없는 선거여서 피하려 했지만 반쯤 끌려가다시피 한 2021년 부산시장 보선에서도 예상대로 대패했다.

대한민국 땅 한쪽을 파란색(더불어민주당 당색)으로, 다른 한쪽을 빨간색(국민의힘 당색)으로 물들인 3·9 대선 결과는 젠더 갈등, 세대 갈등 이전에 우리 사회 뿌리깊은 지역 갈등이 여전히 해묵은 숙제임을 환기시켰다. 지역주의 타파를 외친 김 전 장관이 흘린 땀은 그래서 평가해줄 대목이 있다고 생각한다. 대구의 김부겸(국무총리), 전남 순천의 이정현(국민의힘 전 의원)도 마찬가지다.

또 다른 86그룹 대표 정치인의 대비되는 행보가 민주당에 파열음을 내고 있다. 김 전 장관과 같은 81학번이고 1984년도에 연세대 총학생회장을 지내 또 하나의 ‘86그룹 맏형’으로 불리는 송영길 전 민주당 대표다. 송 전 대표는 지난 7일 서울시장 선거 불쏘시개를 자임하며 당내 경선 후보로 등록했다. 대선 패배 다음날 ‘책임정치’를 강조하며 당 대표직에서 물러난 지 28일 만이다. 대표직을 사퇴하며 “앞으로 반구제기(反求諸己·잘못을 자기에게서 찾음)의 시간을 갖겠다”고 했던 그는 28일이면 충분한 시간이라고 본 걸까.

그는 대선 때인 지난 1월 25일에는 86그룹 용퇴론에 힘을 싣는 듯한 말을 한 적도 있다. “정치교체를 위해 저부터 내려놓겠다”며 차기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그는 “586세대가 기득권이 됐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있다. 우리는 이제 다시 광야로 나설 때”라고 했다.

지난 10일 기자간담회를 연 송영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뉴스1]

지난 10일 기자간담회를 연 송영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뉴스1]

그랬던 송 전 대표의 출마 소식에 친문 계열 의원 모임인 민주주의4.0연구원(“당 전체를 오만과 내로남불의 나락으로 떨어뜨려”)은 물론 옛 민주화운동 동지인 86그룹 내에서도 우려와 비판이 쏟아진다. “하산 신호 내린 기수가 갑자기 나 홀로 등산 선언”(김민석 의원), “여러 카드를 다 무산시켰다”(우상호 의원), “송탐대실”(최재성 전 청와대 정무수석) 등.

그럼에도 출마를 강행한 송 전 대표는 인물 부재라는 상황 논리,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는 구청장·시의원·구의원 후보를 견인하기 위한 것이란 ‘보호막 논리’를 내세운다. 지난 11일 기자간담회를 열어선 “지방선거가 다가오는데 모든 걸 내려놓고 앉아있는 것이 책임지는 것인가, 아니면 정면에 나가 싸우는 것이 책임지는 것인가”라고 물었다. 하지만 (서울시장)선거를 이끄는 책임을, (대통령)선거에서 패배한 책임 때문에 물러난 사람이 굳이 져야 하는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 지역구 인천 계양을에서 5선을 하고 인천시장까지 지낸 송 전 대표가 주소지를 급히 서울 송파로 옮겨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한다는 건 도대체 무슨 명분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오히려 송 전 대표의 결행은 민주당이 ‘원칙’과 ‘현실’의 딜레마에 처할 때마다 ‘당원의 뜻’을 이유로 현실을 택한 과거 숱한 사례들과 더 닮은 듯하다. 2014년 기초단체선거 무공천 약속을 지방선거 두 달 전 백지화한 일, 2020년 선거제 개혁 취지에 역행한다는 비판에도 비례 위성정당 창당을 결정한 일, 2021년 ‘재·보선 원인 제공시 후보 무공천’을 규정한 당헌을 뜯어고쳐 서울·부산시장 보선에 참전한 일 등 말이다.

‘바보 노무현’을 잇겠다던 김 전 장관이 정치 은퇴를 선언하면서 그 다음을 누가 어떻게 이어갈 수 있을까 궁금해진다. “원칙 없는 승리보다 원칙 있는 패배가 결국 이기는 길”이라던 ‘노무현 정신’을 민주당에서 찾아보기가 갈수록 어려워지는 건 확실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