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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70시간 사격' 노근리 72년 한…"4·3과 차별한 정부 서운" [영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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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72년이 됐습니다. 이제 노근리의 한(恨)을 풀어줄 때도 되지 않았나요?”

지난 7일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쌍굴다리. 정구도(67) 노근리국제평화재단 이사장이 쌍굴 콘크리트 벽 곳곳에 박힌 총알을 가리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쌍굴은 노근리 사건의 실체를 간직한 아픔의 공간이자, 한이 서려 있는 공간”이라고 했다. 정 이사장은 부친인 고(故) 정은용씨(2014년 작고)를 도와 1991년부터 노근리 사건을 국내·외에 알려왔다.

노근리 사건은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25일~29일 노근리 경부선 철로, 쌍굴다리 부근에서 미군의 공중 폭격과 총격으로 피란민 수백명이 숨진 사건이다. 한미 양국은 1999년 10월부터 2000년 1월까지 노근리 사건을 공동조사해 미군의 인권침해 사건으로 결론 내렸다.

정구도 노근리국제평화재단 이사장이 7일 오후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평화공원 앞 쌍굴다리에서 1950년 7월 사건 당시 총알이 박혀있는 지점을 설명하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정구도 노근리국제평화재단 이사장이 7일 오후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평화공원 앞 쌍굴다리에서 1950년 7월 사건 당시 총알이 박혀있는 지점을 설명하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피란민에 무차별 총격…희생자 72% 여성·아이 

정 이사장은 “당시 미군은 피란민이 모여있는 쌍굴을 향해 70시간 동안 기관총 사격을 했다”며 “무고한 주민 수백명이 희생을 당했고, 이중 여성과 노인, 아이가 72%였다”고 말했다.

그는 “쌍굴에 갇힌 피란민이 목을 축이러 한 발자국만 나와도 미군은 총을 쏴 댔다. 쌍굴 앞 작은 샘엔 희생당한 이들의 선혈이 낭자했다”며 “미군이 떠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주민들이 시체 사이를 누비며 가족을 찾았다”고 설명했다.

생존자 증언에 따르면 노근리 사건 당시 주민 400~500명이 목숨을 잃거나 다쳤다. 우리 정부는 희생자 226명(사망자 150명, 행방불명 13명, 후유장애 63명), 유족 2240명을 공식 인정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2001년 1월 노근리 사건 피해자들에게 유감을 표명하는 성명을 냈다. 미국이 전쟁 중에 벌어진 민간인 희생 사건을 인정하고, 50년 만에 사실상 사과를 한 이례적인 조처였다는 분석이 나왔다.

6.25 당시 수백명이 미군에게 학살된 충북 영동 노근리 굴다리. [중앙포토]

6.25 당시 수백명이 미군에게 학살된 충북 영동 노근리 굴다리. [중앙포토]

2004년 노근리특별법 제정…배·보상 조항 빠져

당시 미국 정부는 추모탑 건립(118만 달러)과 장학금 지급(280만 달러) 등 위로금을 제안했다. 그러나 노근리 유족은 미국이 위로 대상을 한국전쟁 당시 미군 관련 모든 민간인 피해 사건으로 정하자 이 제안을 거부했다. “한국전쟁 당시 진상조사가 이뤄지지 않은 다른 미군 유사 사건의 피해자 구제를 막을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관련 예산은 2006년 11월 미국 국고로 환수됐다.

정 이사장은 “노근리 사건은 미완의 과제”라고 지적했다. 그동안 조사를 통해 밝혀진 진실에 걸맞은 배려가 부족했다는 입장이다. 유족 측의 노력으로 국회는 2004년 ‘노근리사건 희생자심사 및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했다. 당시 법안에는 희생자에 대한 배·보상 조항이 빠졌다.

정 이사장은 “부친이 1960년 주한 미군에 소청서를 낼 때나 유족회가 노근리 특별법 제정을 추진할 때도 배·보상이 핵심이었다”며 “죽은 생명을 살리는 게 불가능한 만큼 배·보상은 피해자와 유족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라고 말했다.

정구도 노근리국제평화재단 이사장이 7일 오후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평화공원에서 본지와 단독 인터뷰를 하고 있다.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지난 1950년 7월, 미군이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터널(쌍굴다리) 속에 피신한 마을 주민들을 향해 기관총을 무차별 난사한 사건으로 민간인 수백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프리랜서 김성태

정구도 노근리국제평화재단 이사장이 7일 오후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평화공원에서 본지와 단독 인터뷰를 하고 있다.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지난 1950년 7월, 미군이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터널(쌍굴다리) 속에 피신한 마을 주민들을 향해 기관총을 무차별 난사한 사건으로 민간인 수백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프리랜서 김성태

“1인당 9000만 원 보상”…개정안 5개월째 제자리

특별법 제정 이후로도 노근리 희생자는 미국 정부와 한국 정부로부터 보상을 받은 게 없다. 그나마 노근리 특별법에 의해 2013년 13만㎡ 규모의 노근리평화공원이 조성되면서 매년 합동위령제가 열린다. 지난해 9월 특별법 개정이 한 차례 이뤄졌으나 위령 사업 예산지원과 희생자 치유사업을 돕는다는 내용 등만 추가됐다.

노근리 유족 등은 지난해 12월 개정된 ‘제주 4·3사건 특별법’처럼 노근리 사건의 배·보상을 포함한 법 개정을 촉구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더불어민주당 임호선 의원 등이 발의한 노근리 특별법 개정안은 희생자 1인당 8000만~9000만 원의 보상금을 지급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정 이사장은 “4·3 사건은 희생자 1인당 9000만 원의 보상금을 지급하는 내용의 법률개정안이 통과돼 6월부터 신청을 받는다”며 “노근리 사건 희생자도 4·3사건에 준하는 보상금을 지급하는 내용의 개정안이 발의됐으나 5개월 넘게 통과 소식이 없어 답답하다”고 말했다.

국방부에서 노근리 학살사건과 관련 한미관계자가 모여 2차 진상조사회의를 하고 있다. [중앙포토]

국방부에서 노근리 학살사건과 관련 한미관계자가 모여 2차 진상조사회의를 하고 있다. [중앙포토]

“방어선 통과 피란민 이동 금지” 참상 야기

유족들은 “노근리 사건의 발발 배경에 한국 정부도 책임이 있는 만큼 국내법으로 배·보상을 해줘야 한다”는 입장이다. 2001년 국방부가 발표한 조사 결과 보고서 등이 근거다.

보고서에 따르면 1950년 7월 25일 대구 임시정부청사에서 한미 주요 인사들이 ‘피란민대책’에 관한 첫 공식 회의를 했다. 노근리에 첫 공중 폭격이 일어나기 하루 전 일이다. 이날 양국은 미 제8군사령관이 피란민과 민간인 통제 권한을 갖는 데 합의하고, “아군 방어선을 넘는 피란민의 이동을 금지한다”는 전문을 예하 부대에 내린다.

정 이사장은 “전시 상황을 고려하면 이 합의는 미군 전선에 접근하는 민간인 대해서 총을 쏘도록 허용한 결정이라고 볼 수 있다”며 “한국의 내무부 차관, 경찰국장, 사회부 차관 등 주요 인사가 참석해 놓고도, 자국민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피란민 집결과 소개 책임이 있는 영동경찰서 경찰들은 노근리 사건이 벌어지기 하루 전인 7월 24일 마지막 기차로 영동을 떠나고 없었다”며 “노근리 피란민들은 방치된 상태에서 미군과 의사소통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채 사실상 ‘인간사냥’을 당했다”고 했다.

노근리 쌍굴 다리 외벽에 박힌 총알(빨간원)이 그대로 남아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노근리 쌍굴 다리 외벽에 박힌 총알(빨간원)이 그대로 남아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유족 “생존 피해자 30명…문 정부에 차별감 느껴”

정 이사장과 유족 등은 4·3사건과의 차별성 등을 이유로 문재인 정부와 국회에 대해 서운한 감정도 갖고 있다고 한다. 노근리 사건과는 달리 4·3사건은 정부가 보상 규모에 관한 연구용역을 별도로 진행한 데다 보상 조항을 추가한 법률개정안 발의·통과가 지난해 모두 이뤄졌다.

정 이사장은 “4·3사건 피해자들이 이제라도 보상받을 길이 열려 다행”이라면서도 “문재인 정부가 100대 국정과제를 통해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과거사 문제 해결’을 약속했지만, 노근리 사건 해결에는 소홀한 것 같다. 솔직히 차별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노근리국제평화재단에 따르면 노근리 사건 생존 피해자는 30여 명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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