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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중앙] 500년 역사 앞세워 세계유산 된 조선왕릉 이모저모

중앙일보

입력

왕의 기운 서린 조선왕릉 산책500년 역사·문화·과학·예술 느껴지네요

이집트 왕족의 무덤인 피라미드와 영원한 삶을 향한 염원이 담긴 중국의 진시황릉 등은 소중 친구들도 잘 알고 있는 세계문화유산이죠. 우리나라에도 이와 비슷한 문화유산이 있답니다. 바로 조선(1392~1897)의 왕과 왕비, 그리고 대한제국(1897~1910) 황제와 황후가 잠든 조선왕릉이에요. 소중 학생기자단이 조선왕릉전시관과 태릉을 찾아 500년이 넘는 시간을 간직하고 있는 조선왕릉에 대한 여러 사실을 들여다봤습니다.

서연우(서울 월계초 5)·고명성(서울 강명초 6)·정해원(서울 중대초 4·왼쪽부터) 학생기자가 조선왕릉전시관과 태릉을 찾아 조선왕릉에 대해 알아봤다.

서연우(서울 월계초 5)·고명성(서울 강명초 6)·정해원(서울 중대초 4·왼쪽부터) 학생기자가 조선왕릉전시관과 태릉을 찾아 조선왕릉에 대해 알아봤다.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인 2009년, 유네스코(UNESCO)는 조선왕릉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했어요. 세계유산이란 유네스코에서 인류 전체를 위해 보호해야 할 보편적 가치가 있다고 인정한 문화유산을 뜻하죠. 그만큼 조선왕릉이 문화유산으로서 의미가 남다르다는 뜻이에요. 조선이라고 하니 먼 옛날 같지만, 불과 110여 년 전만 해도 지금의 서울인 한양 땅에는 임금님(황제)이 계셨답니다. 선왕에 대한 존경심이 담긴 왕릉은 500여 년간 차례대로 건립돼 우리나라 40기, 북한 2기를 포함해 총 42기가 있죠.

조선왕릉 분포도

우리나라의 조선왕릉은 제1대 태조의 건원릉(健元陵)부터 제27대 순종·원비 순명효황후·계비 순정효황후의 유릉(裕陵)까지 서울·경기 지역을 중심으로 총 40기가 분포해있어요.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제공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제공

과연 조선왕릉은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으며, 어떤 특징이 있을까요. 고명성·서연우·정해원 학생기자가 이를 알아보기 위해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있는 조선왕릉전시관을 찾았어요. 서울·경기도를 중심으로 42기의 왕릉 위치가 표시된 지도 앞에서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송진욱 전시큐레이터가 소중 학생기자단을 맞이했죠.

"왕릉에는 유교가 통치이념이던 조선왕조의 효와 예가 반영됐다고 들었어요. 왕릉의 위치를 선정하는 기준이 궁금해요." 명성 학생기자가 물었어요. "크게 두 가지 기준이 있어요. 첫 번째는 풍수지리적으로 좋은 명당이어야 해요. 뒤로는 높은 산(주산)이 있고, 산 아래로 시냇물이 가로지르는 위치를 선호했는데 이걸 배산임수(背山臨水)라고 해요. 두 번째로 왕이 선왕의 무덤에 제향을 지내러 가기 적당한 거리여야 했기 때문에 지금의 서울·경기도 쪽에 주로 만들었죠. 왕이 궁궐을 오래 비우면 안 되니까요."(송) 이 기준에서 예외가 바로 강원도 영월군에 있는 조선 제6대 왕 단종의 무덤인 장릉(莊陵)입니다. 단종은 작은 아버지인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뒤 영월로 유배를 갔고, 노산군으로 격하돼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죠. 이후 제19대 숙종 때 왕으로 복위되면서 단종의 능이 영월에 건립돼요.

송진욱(맨 오른쪽) 궁능유적본부 전시큐레이터가 소중 학생기자단에게 조선왕릉의 구조에 대해 설명했다.

송진욱(맨 오른쪽) 궁능유적본부 전시큐레이터가 소중 학생기자단에게 조선왕릉의 구조에 대해 설명했다.

"어떤 계급 사람들이 왕릉에 묻힐 수 있었나요?" 송 큐레이터의 설명을 듣던 연우 학생기자가 말했어요. "묻힌 사람의 신분에 따라 무덤의 종류가 달라졌죠. 조선왕실 무덤의 종류는 능·원·묘로 나뉘어요. 왕·왕비와 황제·황후의 무덤은 능이라고 해요. 왕의 친부모·왕세자·왕세자빈, 황태자와 황태자비의 무덤은 원, 왕족·후궁·폐위된 왕과 왕비의 무덤은 묘라고 해요. 능이 제일 규모가 크고 화려하며, 무덤 주변의 장식과 능역에 속한 건물 숫자도 많아요."(송) 여기서 황제·황후·황태자·황태자비가 등장하는 이유는 조선이 1897년을 기점으로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인 대한제국으로 바뀌었기 때문이죠.

소중 학생기자단은 왕릉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왕릉 건립은 왕이나 왕비가 돌아가셨을 때부터 시작되죠. 이를 임금이나 존귀한 사람이 세상을 떠남을 높여 이르던 말인 승하(昇遐)라고 하며, 나라에서 치르는 상을 국상(國喪)이라고 해요. 국상은 장례에 관한 의례인 상례(喪禮)에 따라 진행되는데, 왕과 왕비의 능을 만들고 이들의 시신을 모시는 걸 전부 포함하죠. 복잡한 국상 절차를 잘 치르기 위해 임시 관청인 도감이 설치되곤 했어요. 장례를 치르고 능으로 향하는 발인 전까지 왕의 시신을 빈전에 모시는 빈전도감, 장례를 총괄하는 국장도감, 왕릉을 조성하는 산릉도감이 바로 그것입니다.

『태상지』(1873)에 나오는 '왕릉 기일 제향 상차림 그림'을 재현한 모습. 신에게 드리는 글인 축문은 제향 의식 절차 중 독축 단계에서 읽는다.

『태상지』(1873)에 나오는 '왕릉 기일 제향 상차림 그림'을 재현한 모습. 신에게 드리는 글인 축문은 제향 의식 절차 중 독축 단계에서 읽는다.

"능침을 비롯한 능역에 속하는 각종 건물·석물들은 왕의 관을 능으로 모시는 발인 날에 맞춰 왕의 사망 후 약 5개월 안에 건립돼야 했어요. 이걸 산릉도감이 주관했죠. 산릉도감의 관원이 풍수지리에 통달한 지관과 함께 약 10곳의 명당을 골라 1차 능 후보지를 정한 뒤 왕에게 보고해 3곳 정도를 추리고, 이곳을 또 다른 지관들이 돌아보며 심사숙고해서 왕릉이 들어설 자리(능지)를 정했죠. 확정된 능지에는 사방에 경계를 표시하고, 그곳 땅의 신에게 제사를 지낸 뒤 왕릉을 조성했어요."(송) 산릉도감이 공사에 필요한 인원과 자재의 양을 계산해 각 관청에 요청해서 인력과 물자를 확보하면 작업장이 꾸려졌죠. 공사가 끝나면 산릉도감에서 다른 관청과 주고받은 문서와 작업 일지를 모아 나라에서 큰일을 치를 때 그 경과를 자세하게 적은 책인 의궤(儀軌)를 펴냈어요. 후대에 왕릉을 조성·보수할 때 좋은 자료로 활용됐죠.

왕릉에서 선왕과 왕비의 기일에 지내는 제사에 쓰였던 술 항아리 산뢰. 산뢰 위에는 멱이라 불리는 덮개를 덮고, 술을 뜨는 국자인 작을 올려뒀다.

왕릉에서 선왕과 왕비의 기일에 지내는 제사에 쓰였던 술 항아리 산뢰. 산뢰 위에는 멱이라 불리는 덮개를 덮고, 술을 뜨는 국자인 작을 올려뒀다.

왕릉은 능침 공간에 따라 여섯 종류로 분류됩니다. 왕·왕비 중 한 사람의 봉분만 있으면 단릉(單陵),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배치하면 쌍릉(雙陵), 왕과 왕비, 임금이 다시 장가를 가서 맞은 아내인 계비의 봉분까지 세 개를 나란히 배치하면 삼연릉(三連陵), 왕과 왕비의 무덤이 하나의 봉분 안에 같이 있으면 합장릉(合葬陵), 같은 능역 안에 있는 서로 다른 언덕에 봉분을 배치하면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한 언덕 위아래에 각각 봉분을 배치하면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이죠. "왕과 왕비가 한날한시에 승하한 게 아닌데 어떻게 같은 무덤에 묻었나요?" 명성 학생기자가 질문했어요. "조선 제4대 왕 세종과 소헌왕후가 함께 묻힌 영릉(英陵)의 경우 소헌왕후가 먼저 사망했을 때 세종이 본인의 능자리를 미리 만들었어요. 하지만 현존하는 조선왕릉 합장릉을 보면 거의 왕릉을 다른 곳으로 이장하면서 합장릉을 만들거나, 먼저 승하한 사람을 이장해 나중에 승하한 사람과 함께 묻는 경우가 더 많았죠."(송)

조선왕릉, 누가 만들고 어떻게 관리했을까

조선왕릉의 능역은 크게 진입 공간, 제향 공간, 능침 공간으로 구분할 수 있어요. 제1전시실엔 조선왕릉의 공간 구성을 순서대로 구현해뒀죠. 가장 먼저 왕릉 관리자인 능관이 지내는 업무 공간이자 제향을 준비하는 재실이 눈에 들어왔어요. 그다음에는 바닥에 돌다리 모양의 그림이 있었어요. 앞서 왕릉 앞에는 물이 흐른다고 했죠. 이 하천을 금천, 그 위에 놓인 돌다리는 금천교라고 해요. 금천을 건너면 신성한 장소를 보호하기 위해 세운 홍살문이 나오죠. 붉은 칠을 한 둥근 기둥 두 개 위에 가로대를 놓고, 화살 모양 나무살을 가로대 위에 꽂은 홍살문은 사당·관아·향교·서원 등에도 있어요.

홍살문과 정자각을 잇는 길인 향어로, 제향을 지내는 건물인 정자각, 제향에 올리는 음식을 준비하는 수라간, 능을 지키는 일꾼들이 머무는 수복방까지가 제향공간이에요. 왕의 무덤인 봉분과 그 주변을 꾸민 석물이 있는 곳은 능침 공간이죠.

조선왕릉의 기본 구조

 왕릉에 따라 차이가 다소 있지만, 조선왕릉의 기본 구조는 금천교와 재실을 포함하는 진입 공간, 홍살문·향어로·정자각·수라간·수복방을 포함하는 제향 공간, 왕의 무덤인 봉분과 그 주변의 석물을 포함하는 능침 공간으로 구분합니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제공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제공

모든 공간은 왕릉을 관리하는 능관(참봉 또는 영)과 그를 돕는 일꾼들에 의해 관리·유지됐어요. 기록으로 남아있는 제9대 성종과 정현왕후의 선릉 관리 업무 분장을 예로 들어볼까요. 능침 구역 청소·경비를 맡은 수복은 수라간 맞은 편에 있는 수복방에 머무르며 매일 능침과 정자각·비각·수라간을 청소하고, 아침마다 능관에게 능에서 일어났던 일을 보고했어요. 서원·청직은 능관의 일을 보좌했으며, 천호는 제사 음식 놓기와 능역의 나무를 몰래 베어 가는 도벌꾼 체포를 맡았죠. 군인은 땔나무, 화정은 음식 만들기를 담당했고요. 왕릉에 딸린 토지는 매우 넓어 이를 지키는 군사의 수도 상당했어요. 수호군은 70명, 수호군을 보좌하는 보군과 산직은 각각 140명과 30명에 달했죠. 주로 양인 신분의 백성들이 동원됐습니다.

"이집트 피라미드를 보면 왕의 시신과 함께 여러 보물을 묻었더라고요. 조선왕릉 안에는 어떤 부장품이 있었나요?" 해원 학생기자가 질문했어요. "왕·왕비의 관을 재궁이라 해요. 조선 시대에는 왕릉에 재궁을 모시고 나서 흙을 메우기 전 국장도감에서 마련한 부장품을 함께 넣었어요. 종류도 돌아가신 분을 위로하고자 예물로 올리는 옥과 비단, 생전에 착용했던 옷·장신구, 생전에 짓고 읽었던 책과 붓·벼루 등 다양했죠. 능은 왕이 승하한 뒤 머무는 공간이기 때문에 식기·제기·악기·무기 등을 실제보다 작은 크기로 만들어 넣기도 했어요. 이를 명기라고 해요."(송) 부장품은 종류별로 상자에 넣어 왕의 관을 능으로 모실 때 함께 운반했죠. 소중 학생기자단이 기록에 따라 복원한 명기들을 주의 깊게 살펴봤어요.

조선왕릉 봉분 주변에는 문석인·무석인·말·양·호랑이 등 화강암으로 만든 다양한 형태의 석물이 배치됐다.

조선왕릉 봉분 주변에는 문석인·무석인·말·양·호랑이 등 화강암으로 만든 다양한 형태의 석물이 배치됐다.

예로부터 왕의 무덤은 도굴이 잦았습니다. 한 나라의 권력자를 모신 무덤이니만큼 보물이 많기 때문이죠. 하지만 조선왕릉은 임진왜란 중이던 1592년 손상을 입은 제9대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선릉(宣陵)과 제11대 중종의 정릉(靖陵) 외에는 도굴당한 적이 없어요. 내부 구조에 쓰인 독특한 건축 기술 덕분이죠.

봉분 아래에는 재궁을 모시는 방이 있어요. 조선 초에는 재궁을 돌로 만든 방인 석실에 모셨지만, 제7대 세조 이후에는 석회·모래·황토 등 삼물을 섞어 만든 회격으로 방을 만들어 재궁을 모셨어요. 세조가 "국장에 있어 비용의 낭비와 백성의 수고가 심하니 석실을 만들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죠. 회격은 시간이 지날수록 단단해지기 때문에 쉽게 뚫을 수 없어요. 현대에 와서도 왕릉을 도굴하려는 시도가 종종 있지만, 요즘 기술로도 회격을 쉽게 무너뜨리기는 어렵기 때문에 왕릉은 잘 보존되고 있답니다.

소중 학생기자단이 송진욱 큐레이터와 조선왕릉전시관 근처에 있는 태릉을 방문했다.

소중 학생기자단이 송진욱 큐레이터와 조선왕릉전시관 근처에 있는 태릉을 방문했다.

문정왕후가 잠든 태릉에 얽힌 이야기

조선왕릉전시관 옆에는 조선 제11대 왕 중종의 세 번째 부인 문정왕후의 무덤인 태릉(泰陵)이 있어요. 명성·연우·해원 학생기자는 태릉으로 이동해 전시관에서 살펴본 내용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로 했죠. 소나무가 우거진 길을 걷다 보니 바닥에 돌로 만든 구조물이 보였어요. "이건 태릉 금천교의 흔적이에요. 한국전쟁 이후 훼손된 것으로 추정하죠."(송) 금천교를 뒤로하고 걸으니 홍살문이 눈앞에 나타났어요. "현재 태릉에는 재실이 없지만 원래 금천교와 재실까지가 진입 공간이에요. 태릉 재실의 원래 위치는 조선왕릉전시관 옆으로 약 180m 정도 떨어진 근처로 추정합니다."(송)

홍살문은 신성한 장소를 보호하기 위해 세우던 문이다. 왕릉 외에도 사당·관아·향교·서원 등에서도 볼 수 있다.

홍살문은 신성한 장소를 보호하기 위해 세우던 문이다. 왕릉 외에도 사당·관아·향교·서원 등에서도 볼 수 있다.

홍살문을 기점으로 돌로 만든 길인 향어로가 정자각까지 길게 뻗어있었어요. 그런데 한쪽은 높이가 좀 더 높았죠. 이건 용도에 따라 길을 둘로 구분한 겁니다. 높은 쪽이 향로인데 제향 시 향과 신명(神)께 고하는 글인 축문을 들고 가는 길이에요. 어로는 제향을 드리러 온 왕이 걷는 길이죠. 어로 위를 따라 걷다 보니 제향 공간인 정자각에 도착했어요.

ㄴ왕릉에 제향을 드리기 위해 봉분 앞에 고무래 정(丁)자 모양으로 지은 정자각. 대부분 지붕 좌우 측면이 시옷(ㅅ)자로 마주 보는 맞배지붕 형태지만, 여덟 팔(八)자를 닮은 팔작지붕으로 지은 경우도 있다.

ㄴ왕릉에 제향을 드리기 위해 봉분 앞에 고무래 정(丁)자 모양으로 지은 정자각. 대부분 지붕 좌우 측면이 시옷(ㅅ)자로 마주 보는 맞배지붕 형태지만, 여덟 팔(八)자를 닮은 팔작지붕으로 지은 경우도 있다.

"정자각은 제향 음식을 차려놓고 돌아가신 분을 모시는 공간인 정전과 제관들이 서있는 기둥만 있는 공간인 배위청이 합쳐져 있어요. 위에서 내려다본 건물 모양이 고무래 정(丁)자 같아 정자각이라 부르죠. 조선왕릉의 정자각은 대부분 지붕 좌우 측면이 시옷(ㅅ)자로 마주 보는 맞배지붕 형태인데, 여덟 팔(八)자를 닮은 팔작지붕으로 지은 경우도 있어요. 제18대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무덤인 숭릉의 정자각이 그런 형태죠. 정자각이 없는 왕릉도 있는데요. 고종 황제와 순종 황제가 묻힌 홍릉과 유릉은 황제의 무덤 양식을 취했기에 정자각 대신 일자형 건물인 침전을 세웠어요."(송)

태릉의 청소·경비를 맡은 수복이 머물렀던 건물인 수복방. 왕릉은 능관과 그를 돕는 일꾼들에 의해 관리 및 유지됐다.

태릉의 청소·경비를 맡은 수복이 머물렀던 건물인 수복방. 왕릉은 능관과 그를 돕는 일꾼들에 의해 관리 및 유지됐다.

조선 전기 왕릉의 제향은 크게 계절마다 지내는 사시제와 정월 초하루·한식·단오·추석·동지·납일 등에 지내는 속절제, 음력 초하룻날·보름날 등에 지내는 삭망제가 있었어요. 조선 후기에는 사시제를 없애고 왕과 왕비의 기일에 기신제를 지내는 거로 바뀌었죠. 그 외에 왕이 선왕의 능을 방문했을 때나 능을 수리할 때 비정기적으로 제향을 올렸어요. 제향 음식은 고기류를 사용하지 않고, 곡류·채소로 만든 음식 위주로 올리는 게 특징이에요. 떡과 과자, 면과 탕, 제철 과일과 술 등이죠.

왕릉 주인인 문정왕후가 누구인지 밝히고, 그의 생애를 요약한 글이 담긴 표석이 보관된 비각.

왕릉 주인인 문정왕후가 누구인지 밝히고, 그의 생애를 요약한 글이 담긴 표석이 보관된 비각.

정자각 오른쪽에는 비석(표석)이 보관된 작은 건물이 있습니다. 왕릉 주인이 누구이며 그의 생애·업적을 밝힌 신도비나 표석을 보호하는 비각이에요. 신도비는 주로 조선 초기에, 표석은 주로 조선 중후기에 세워졌죠. 16세기에 조성된 태릉에는 표석이 있어요. 앞면에 적힌 "조선국 문정왕후 태릉(朝鮮國 文定王后 泰陵)"은 조선이라는 나라의 문정왕후의 태릉이라는 뜻이죠. 뒷면에는 "문정왕후 윤씨는 중종대왕의 계비로, 홍치 14년인 신유년(연산7·1501) 10월 22일에 탄생하였다. 정덕 12년인 정축년(중종12·1517)에 왕비로 책봉되었고 가정 44년인 을축년(명종20·1565) 4월 7일에 승하하여 7월 15일에 양주 남쪽 노원면 임좌(북북서쪽을 등진 방향) 언덕에 장사 지냈으니, 향년은 65세이다. 숭정 기원후 126년(영조29·1753)에 세우다"라고 왕릉 주인의 일생을 요약했습니다.

표석에는 태릉에 잠든 조선 제11대 중종의 세 번째 왕비 문정왕후의 생애를 요약한 글이 조각됐다.

표석에는 태릉에 잠든 조선 제11대 중종의 세 번째 왕비 문정왕후의 생애를 요약한 글이 조각됐다.

이제 능침 공간으로 가볼까요. 문정왕후의 봉분은 언덕 위에 있고, 우거진 나무들이 능역을 감싼 형태였죠. "태릉 정도면 언덕 경사가 크지는 않은 편이에요. 이렇게 지형을 최대한 살려 능을 만들고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뤄 정자각 등 건물을 세우는 건 조선왕릉의 특징이에요."(송) 언덕 위를 한참 올라가자 정자각에서 봤을 때는 작아 보였던 봉분이 사실은 상당히 거대한 크기였다는 걸 알 수 있었죠. "이렇게나 큰 줄은 몰랐어요." 소중 학생기자단이 놀라워했죠.

서울 노원구에 있는 태릉은 조선 제11대 왕 중종의 세 번째 왕비 문정왕후의 무덤으로 왕릉이 조성된 16세기 시대상과 문화가 집약된 귀중한 유산이다.

서울 노원구에 있는 태릉은 조선 제11대 왕 중종의 세 번째 왕비 문정왕후의 무덤으로 왕릉이 조성된 16세기 시대상과 문화가 집약된 귀중한 유산이다.

능침 공간에는 봉분과 이를 둘러싼 돌로 만든 장식이 있습니다. 능침 앞에는 세 개의 길고 넓은 돌계단이 놓였고 이를 아래부터 하계, 중계, 상계라고 해요. 봉분의 동·서·북쪽을 둘러싼 담장은 곡장, 봉분 앞 중앙에 설치된 석등은 어두운 사후 세계를 밝힌다는 뜻의 장명등, 바로 뒤에 있는 거대한 탁자처럼 생긴 공간은 왕의 혼이 노니는 곳이라는 의미로 혼유석이라고 합니다.

관복을 입고 왕을 보좌하는 문인 모습의 석물인 문석인.

관복을 입고 왕을 보좌하는 문인 모습의 석물인 문석인.

봉분 주변에는 사람과 동물 형태의 커다란 석상들이 마치 호위하듯 둘러싸고 있었죠. "왕릉을 만들 때는 봉분 주위에 화강암으로 다양한 석물을 만들어 세웠어요. 관복을 입고 왕을 보좌하는 문인 모습의 석물은 문석인, 갑옷을 입고 왕을 호위하는 무인의 모습 석물은 무석인이죠. 문석인·무석인 뒤나 옆에는 말 모양의 석마를 두고, 봉분 뒤쪽에는 왕릉을 지킨다는 의미로 신성한 동물로 여겨졌던 양(석양)과 호랑이(석호)를 각각 4마리씩 교차해 배치했죠."(송)

문석인·무석인의 크기는 시대에 따라 달라졌어요. 조선 초기에는 약 2m 정도였는데 중종~명종 대(1506~1567)는 3m에 달했죠. 이후 18세기 전반엔 약 1.5~1.8m 정도로 작아졌어요. 하지만 정조가 아버지 장조(사도세자)를 위해 만든 현륭원(융릉)의 석물을 이전보다 훨씬 화려하게 조각하면서 다시 약 2.4m 정도로 커졌어요. 이러한 경향은 20세기 대한제국 황제릉인 홍릉·유릉에도 이어져 3m가 넘는 문석인과 무석인이 세워졌죠. 16세기 조성된 태릉의 문석인·무석인의 크기는 약 3.2m인데요. 선이 굵고 몸집이 큰 조선 중기 경향을 잘 보여주죠.

 갑옷을 입고 왕을 호위하는 무인의 모습을 한 석물 무석인.

갑옷을 입고 왕을 호위하는 무인의 모습을 한 석물 무석인.

이제 봉분의 구조를 살펴볼까요. 봉분을 보호하기 위해 아래에 둘러놓은 돌을 병풍석, 봉분을 둘러싼 울타리 모양의 돌을 난간석이라고 해요. 병풍석 위에는 방향과 시간을 지키고 보호하는 열두 동물인 십이지(十二支)를 뜻하는 한자와 해당 동물의 모습을 한 신들을 새겨 넣었죠. 입구부터 건물과 석물, 봉분까지. 조선왕릉에는 무엇 하나 의미가 담기지 않은 것이 없네요.

세계적으로 한 왕조의 무덤이 조선왕릉처럼 온전히 보전된 경우는 드물다고 해요. 약 5세기 동안 의례에 따라 조성된 조선왕릉은 왕실의 권위와 선조를 기리는 마음은 물론, 관련 유물과 유적의 변화를 통해 조경학·건축학·석조미술학은 물론 역사와 정치까지 당시 시대상과 문화까지 보여주죠. 이번 주말 조선왕릉을 찾아 우리 조상의 얼과 역사를 느껴보는 건 어떨까요.

꼭 가봐야 할 조선왕릉 4

 송진욱 큐레이터가 소중 친구들을 위해 대한민국에 있는 40기의 조선왕릉 중에서도 꼭 가보면 좋을 네 곳을 추천했어요.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제공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제공


동구릉 건원릉(태조):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197
1408년 조성된 조선 제1대 태조의 능이에요. 9개 왕릉(건원릉·현릉·목릉·휘릉·숭릉·혜릉·원릉·수릉·경릉)으로 이루어진 동구릉(東九陵) 경내에 있어요. 고려 왕릉의 영향을 받아 능침 공간을 구성한 건원릉은 조선을 개국한 태조의 무덤답게 후대 조선 왕릉 조성에 큰 영향을 줬어요.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제공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제공

영릉(세종·소헌왕후):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영릉로 269-10
1469년 조성된 조선 제4대 임금 세종과 소헌왕후의 능이에요. 조선왕릉 중 최초로 한 봉분에 다른 방을 갖춘 합장릉으로, 소헌왕후를 향한 세종의 지극한 사랑을 엿볼 수 있죠. 영릉의 배치는 조선 전기 왕릉 배치의 기본이라 할 수 있어요.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제공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제공

융건릉 융릉(장조): 경기도 화성시 효행로481번길 21

조선 제22대 왕 정조의 아버지 장조(사도세자)와 어머니 헌경왕후(혜경궁 홍씨)의 능이에요. 1762년 사망한 사도세자는 능이 아닌 묘에 묻혔어요. 이후 장조의 아들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묘를 원으로 격상시켰죠. 원으로 조성되었음에도 정조의 효성이 반영돼 능급으로 꾸며진 것이 특징이에요.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제공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제공

홍유릉 홍릉(고종·명성황후):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

1897년 세상을 떠난 명성왕후와 1919년에 승하한 고종황제의 능이에요. 고종은 대한제국의 황제였기 때문에 홍릉도 황제릉으로 조성됐죠. 고무래 정(丁)자의 정자각 대신 일(一)자형 침전이 들어섰으며, 주로 봉분 앞뒤에 배치되던 돌로 만든 동물(석수)들과 문석인·무석인 등이 침전 앞에 나오는 배열로 바뀌었어요.

학생기자 취재 후기

 조선왕릉전시관에서 조선 왕의 장례절차와 왕이 쓰던 물건들을 작게 만들어 넣었던 부장품에 대해 알게 됐어요. 취재 전 관련 영상을 찾아보다가 조선시대 사람들은 무덤을 망자의 생활공간으로 여겼다는 이야기를 봤는데 그런 의미에서 했던 행위 같아요. 전시관 옆에 있는 태릉도 둘러봤는데요. 입구를 지나 산책로를 지나면 볼 수 있는 능은 여러 석상이 둘러싼, 일반인의 무덤에 비하여 엄청나게 큰 규모였죠. 하지만 홀로 있는 단릉이라서 조금은 외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죠. 태릉에는 입구부터 엄청나게 많은 소나무가 있었어요. 덕분에 무덤이지만 무섭다는 생각보다는 숨을 쉬면 상쾌하고 마음이 편안하단 생각이 들었죠. 그리고 정돈이 잘된 공원 같아서 친구들과 소풍을 와도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다음에는 태릉 옆에 있는 강릉도 가보고 싶어요.

고명성(서울 강명초 6) 학생기자

최근 역사에 관심이 많이 생겼는데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인 조선왕릉을 취재할 수 있어서 너무 뿌듯했어요. 역사 현장을 직접 둘러보고 공부하려면 이동 거리도 길고,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고 여겼는데 가까운 곳에서 역사 탐방을 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먼저 방문한 조선왕릉전시관에서는 왕릉에 제향 시 무슨 음식을 올리는지, 왕릉의 종류와 조성 과정 등을 알 수 있었어요. 그 뒤 태릉에 갔는데 정자각에서 볼 때는 봉분과 석상이 작아 보였지만 실제로 언덕을 올라가 보니 커서 놀랐죠. 정자각에서 볼 때는 제 키 정도 될 것 같았는데 실제로는 제 예상보다 두 배 정도 컸거든요. 서울·경기 지역과 가까우면서도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인 만큼 여러분도 조선왕릉에 관심을 가져보면 좋을 것 같아요.

서연우(서울 월계초 5) 학생기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태릉에 대해 취재하게 돼 정말 기쁘고 설렜어요. 이집트 투탕카멘의 황금빛 무덤이나 중국 황제의 웅장한 무덤과 달리 인위적인 꾸밈보다는 자연과의 어우러짐을 중시하는 조선왕릉은 색다른 느낌이었죠. 무덤 안에는 멋진 귀금속 장신구나 값진 보물들이 있을 줄 알았는데 무기·악기·술잔·수저 등 작은 크기의 생활 소품들을 넣었다는 점에서 당시 사후세계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어요. 태릉에서 섬세하게 조각된 석물들과 정성스럽게 만든 무덤을 보고 조선시대 사람들의 왕에 대한 충성심을 느낄 수 있었죠. 정자각에서 봤을 때는 왕릉이 정말 작아 보였는데, 직접 올라가서 보니까 생각보다 훨씬 커서 그 웅장함에 놀랐어요.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인 태릉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었던 유익한 취재였죠. 왕릉을 지켜주는 하늘, 나무, 바람의 소리를 잊지 못할 것 같아요. 더 많은 사람이 왕릉의 가치를 알고 아껴줬으면 좋겠어요.

정해원(서울 중대초 4) 학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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