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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태진의 퍼스펙티브

근현대사 영욕 품은 청와대, 역사 교육 장소로 거듭나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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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대통령실 이전 후 청와대 활용 어떻게?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노산 이은상은 1929년 ‘경무대를 지나며’란 시조를 발표하였다. ‘융무대’와  ‘융문대’란 소제목을 붙인 2부작이다. 봄바람 넘나드는 융무대에 올랐더니 활 쏘고 칼 휘두르던 용사 간데없고, 융문대 넓은 뜰에 글 짓던 선비들 어디로 가고 없는데 부서진 섬돌만 옛정을 지닌 채 남아 노송 아래로 지나면서 혼자 울어 예노라고 읊었다.

시조는 두 가지 사실을 전한다. 경무대는 융무대와 융문대가 서 있던 곳으로, 1929년에도 경무대란 이름이 있었다는 것이다. 조선 건국 초 정도전이 경복궁을 설계할 때 경복궁 북쪽 신무문 밖에 융문루와 융무루를 세웠다.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불타고 1868년 고종 초에 다시 중창되었다. 이때는 두 누대를 융문당·융무당으로 이름을 고치고 그 일대를 경무대라고 불렀다. 경무대란 이름이 생긴 것은 이때였다. 노산이 읊었듯이 경무대는 고종 초반에 문과·무과 시험이 열리던 곳이다. 중창 전에 과거는 창덕궁 춘당대에서 주로 열렸으니 경무대는 곧 복원 경복궁의 춘당대이다. 두 곳은 다 경관이 빼어난 곳이다. 1886년 고종이 영어교육기관으로 육영공원을 설립했을 때 원생들의 시험도 여기서 시행한 기록이 있다.

청와대는 조선 초 신무문 밖 융문루·융무루가 있던 자리
1868년 고종이 중창하며 그 일대를 경무대라고 불러
일제 때 경무대 안에 총독 관저를 지어 식민지 조선 탄압
청와대가 시민 공간이 되면 근현대사 교육 장소로 활용해야

조선의 상징 건물 없앤 일제

대통령 집무 공간이 있는 청와대. 청와대는 조선 건국 초기 경복궁 북쪽 신무문 밖 융문루와 융무루가 있던 곳이었으며, 고종 때 이 일대를 경무대라고 불렀다. [중앙포토]

대통령 집무 공간이 있는 청와대. 청와대는 조선 건국 초기 경복궁 북쪽 신무문 밖 융문루와 융무루가 있던 곳이었으며, 고종 때 이 일대를 경무대라고 불렀다. [중앙포토]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청와대를 국민에게 돌려주겠다고 약속하였다. 1961년 윤보선 대통령이 이승만 대통령과 차별화하기 위해 관저 경무대의 이름을 청와대로 바꾸었다. 신무문 바깥 과거 시험 보던 곳의 명칭이던 경무대가 언제 대통령 관저 이름으로 바뀌었던가? 5월 10일 청와대가 국민에게 돌려지기 전에 그 경위를 알아보자.

1910년 일본제국은 대한제국을 강제로 빼앗았다. 1915년 조선총독부 시정(施政) 5년을 자랑하기 위해 경복궁을 헐고 공진회란 박람회를 열었다. 근정전·경회루 등 큰 건물 몇 채 남기고 그 많은 건물을 모두 헐어 전시장으로 만들었다. 일본 무사 사회는 정권이 바뀌면 앞 정권의 상징 건물을 없애는 전통이 있다. 일본의 자랑거리인 오사카성의 천수각(天守閣)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지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추종자들을 제압하고 막부를 연 뒤 꼭대기 3층을 헐어 새로 지어 올린 것이다. 도요토미의 권위 지우기였다.

메이지 왕정복고 후 천황이 교토에서 도쿄로 와서 도쿠가와 막부 쇼군의 어성(御城)에 들어갔다. 이때 성내의 모든 건물을 헐고 이름도 황거(皇居, 고코)로 바꾸었다. 조선총독부도 조선왕조의 최대 상징인 경복궁을 허물고 박람회장으로 만들었다. 그 행사를 끝내고 이듬해 지신제를 올리고 총독부 신청사 공사를 시작하였다. 10년 만인 1926년에 준공하여 남산 기슭에 있던 총독부를 이곳으로 옮겼다. 공사 진행 중에 인근 현 통의동과 효자동 일대에 일본 고관들의 관사가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공사 중의 총독부 건물 높이에 비례하여 주위 일본인 고급 주택 수가 늘어났다. 그러던 끝에 1937년에 경무대 안에 총독 관저를 지어 1939년 8월에 총독이 입주하였다. 이때 경무대가 총독 관저란 특정 건물의 이름이 되었다.

일제 총독 관저를 대통령 관저로

청일전쟁 중인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이 경복궁에 침입해 신무문 밖에서 조선군을 몰아내는 장면을 그린 일본 종군화가의 그림. 멀리 양관과 시계탑이 보인다. 시계탑은 사진도 있어 복원이 가능하다. [사진 이태진 명예교수]

청일전쟁 중인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이 경복궁에 침입해 신무문 밖에서 조선군을 몰아내는 장면을 그린 일본 종군화가의 그림. 멀리 양관과 시계탑이 보인다. 시계탑은 사진도 있어 복원이 가능하다. [사진 이태진 명예교수]

관저로서의 경무대 역사는 광복 후 대한민국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1948년 8월 22일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가 총독 관저 경무대를 대통령 관저로 삼아 입주하였다. 9월 29일자 신문에 대통령이 매주 목요일에 민의를 듣는 자리를 가지기로 했다고 보도되었다. 예나 제나 민의가 중요했다. 같은 해 11월 9일에는 경무대 폭파 미수범 6명을 잡아 송치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 사건 때문인지 이듬해 2월 25일에 창덕궁 경찰서를 폐지하고 경무대 경찰서를 신설하였다. 1910년 5월 제3대 통감으로 지명받은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창덕궁 안에 황궁 경찰서를 설립하여 순종황제가 외부와 접촉하는 것을 차단하였다. ‘한국 병합’ 공작의 첫 순서였다. 그 후 39년이 지난 1949년 2월 그 경찰서를 경무대로 옮겨 대통령 경호에 임하게 한 셈이다.

청일전쟁 중인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이 경복궁에 침입해 신무문 밖에서 조선군을 몰아내는 장면을 그린 일본 종군화가의 그림. 멀리 양관과 시계탑이 보인다. 시계탑은 사진도 있어 복원이 가능하다. [사진 이태진 명예교수]

청일전쟁 중인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이 경복궁에 침입해 신무문 밖에서 조선군을 몰아내는 장면을 그린 일본 종군화가의 그림. 멀리 양관과 시계탑이 보인다. 시계탑은 사진도 있어 복원이 가능하다. [사진 이태진 명예교수]

1939년 총독 관저가 들어서기 전 경무대 일원에 시민들의 발길이 닿고 있었다. 윤치호의 유명한 영어 일기에 1916년 12월 2일 경복궁 경무대로 가서 경찰과 헌병들의 운동회를 보았다고 하였다. 총독부 신축 공사장을 경호하는 병력이었을 것이다. 또 1925년 10월 23일 오후에 경복궁 뒤편 경무대에서 중앙 YMCA 출범 22주년 기념식을 거행했다고 하였다. 22년 전 이곳의 한 작은 건물 방에서 YMCA가 처음 출범한 것을 회상하는 행사였다. 윤치호는 이때 이미 일본인들이 발 빠르게 경복궁 주변 부지를 일본인 민간 주택과 관리들의 관저로 채우고 있으며 몇 년 뒤 이 일대에 거주하는 조선인은 없게 될 것이라고 걱정하였다.

청와대 인근은 개화의 현장

총독 관저가 들어서기 4년 전인 1935년 4월 25일에는 제1회 가정부인들의 대운동회가 경무대에서 열렸다. 가정부인협회 주최에 동아일보 학예부 후원 행사로써, 경무대 광장에 500여 부인들이 모여 달리기도 하고 가장행렬 행사도 열었다고 보도되었다. 미나미(南) 총독이 경무대 관저에 입주한 이듬해 1월 20일에 감리교회 관계자 120명을 불러 간담회를 열었다는 기사도 보인다. 감리교회 측의 항일 기세를 꺾기 위한 회유 모임이었을 것이다. 경무대 일원에 기독교 관련 역사가 있었던 것은 뜻밖이다.

경무대란 이름이 처음 생긴 고종 시대에도 주목할 역사가 많다. 1872년 9월 경복궁 중창 사업이 끝난 뒤 이듬해 봄 고종은 내탕금으로 신무문 안쪽에 건청궁과 집옥재 등 부속 건물 여럿을 새로 짓게 하였다. 건청궁은 왕과 왕비가 쓸 공간이었고, 집옥재는 창덕궁의 규장각을 본떠 지은 왕의 서재였다. 건청궁 일원은 곧 왕의 거주와 집무 공간으로, 신무문 바깥의 경무대 일원과 일상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건청궁은 고종 시대 근대화 사업이 처음 시작한 곳으로 주목할 장소다. 1883년 미국 에디슨전기회사와 전기 시설을 계약하여 1887년에 백열등이 처음 켜진 곳이다. 지금도 향원정 연못가에 전기 발상지가 표시되어 있다. 고종은 이곳에 전기로 작동하는 기계추 시계 탑을 세우기도 하였다. 세종대왕은 자동 물시계 자격루를 고안하여 경복궁 사정전 옆 보루각에 두고 나라의 표준 시계로 삼았다. 기계추 시계는 자격루의 현대판이었다. 건청궁 안에 반 3층으로 양식 건물을 지어 개화 의지를 표시하면서 이곳을 서양인 선교사와 외교관 접대 공간으로 삼았다. 경무대의 동편 삼청동 쪽 현재 인수위 일부가 쓰고 있는 금융위원회는 신식 무기를 제작하던 기기창 자리다. 경복궁 북단 건청궁 안팎은 초기 개화의 열정을 뿜던 곳이다.

문화공간과 역사 교육 장소로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면서 경복궁 건청궁 일원은 비운의 역사 현장이 되기도 하였다. 일본군이 청일전쟁을 일으키기 이틀 전 7월 23일 야반 1개 대대가 광화문을 넘어 궁으로 난입하여 임금을 수색하였다. 궁중 시위대와 3시간 이상 전투가 벌어졌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1개 대대 병력의 잔류 문제를 놓고 고종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왕비를 살해하는 만행이 저질러진 곳이기도 하다.

대통령 당선인의 청와대 공약 이행을 둘러싼 이런저런 갈등이 지난 3월 28일 상춘재 만찬 회동으로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당선인은 무슨 일이 있어도 취임식 다음 날인 5월 10일 청와대를 개방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최근 어느 신문 칼럼을 보니 인수위에서 청와대 안에 대통령 박물관을 짓는 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또 이곳을 문화공간으로 만들 계획도 알려졌다. 청와대 일원이 시민의 공간이 되면 당연히 역사 소개가 있어야 한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새 박물관 설립보다 이 지역의 오랜 역사로 보아 건청궁과 경무대 역사 부분은 고궁박물관이, 대한민국의 경무대와 청와대 역사는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이 각각 분담하여 공조하는 형태가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다. 이 지역이 문화 공연과 함께 바른 근현대사 교육의 장소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