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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껄끄러운 ‘파친코’ 인기…미국 매체들 일제 강점기 조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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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미국 애플사가 만든 드라마 ‘파친코’는 일제강점기 부산 가난한 하숙집 딸 선자가 일본에 건너가며 펼쳐지는 자이니치 3대의 가족사를 그렸다. 배우 전유나·김민하·윤여정(왼쪽부터)이 1910·30·80년대 선자를 연기했다. 이민호(아래 사진)는 그와 연을 맺는 조선인 중개상을 맡았다. [사진 애플TV+]

미국 애플사가 만든 드라마 ‘파친코’는 일제강점기 부산 가난한 하숙집 딸 선자가 일본에 건너가며 펼쳐지는 자이니치 3대의 가족사를 그렸다. 배우 전유나·김민하·윤여정(왼쪽부터)이 1910·30·80년대 선자를 연기했다. 이민호(아래 사진)는 그와 연을 맺는 조선인 중개상을 맡았다. [사진 애플TV+]

지난 8일 애플TV+로 공개된 드라마 ‘파친코’ 5화에 일제강점기 조선 여성의 비극을 암시하는 장면이 나왔다. 1931년 일본 오사카에 건너갔던 주인공 선자(윤여정)는 50년 만에 고향 부산에 돌아가, 어머니의 하숙집 일을 도우며 친자매처럼 지낸 복희 언니(김영옥)와 해후한다. 복희는 선자가 떠난 후 일을 들려준다. “어떤 아재가 찾아와가 만주 공장에 좋은 일거리 있다고 우릴 소개시켜 준다카데….” 이렇게 운을 뗀 복희는 “전쟁 끝나고 와 보니 너희 어머니 안 계시더라. 솔직히 말해 다행이다 싶었다. 우리가 이래 변한 꼴, 보이고 싶지 않았다”며 상상 못 할 일을 겪었음을 암시한다. ‘일본군 위안부’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파친코’는 한국 배우가 출연하지만, 미국 애플이 만든 미국 드라마다. 시즌1(8부작) 제작비가 약 1000억원으로 알려졌다. 대규모 미국 드라마가 일제강점기 조선의 애환을 자세히 다룬 건 처음이다. 2017년 뉴욕타임스(NYT) 베스트셀러에 오른 재미교포 이민진 작가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는 대담한 첫 문장의 이 소설은 부산 영도의 하숙집 딸 선자(윤여정·김민하·전유나)를 중심으로 자이니치(在日·재일조선인) 3대의 가족사를 그렸다. 드라마는 이를 토대로, 각본 겸 총괄 프로듀서 수 휴, 공동 감독 코고나다, 저스틴 전 등 재미교포 제작진이 참여했다.

지난달 25일 1~3화가 한꺼번에 공개됐고, 이후 매주 금요일 1편씩 새 회차가 나오고 있다. 애플은 시청률이나 가입자 수 증가치를 밝히지 않는다. 다만 유튜브에 공개한 1화 조회 수가 1449만건(10일 기준)이다. 호평이 쏟아졌다. 글로벌 비평 사이트 ‘로튼토마토’의 신선도(10일 기준)는 언론·평단 98%, 대중 94%다. ‘파친코’ 출연자는 윤여정을 빼고는 김민하(젊은 선자 역)를 비롯해 이민호·정은채, 재미교포 진하, 자이니치 아라이 소지 등 영미권에선 낯선 한국계 배우다. 한국어·일본어·영어 대사가 뒤섞여 색깔로 자막을 구분할 정도인데도, “올해의 위대한 드라마가 아니라 지난 몇 년 중 최고”(영국 글로브앤메일)라는 극찬까지 나왔다.

 이민호. [사진 애플TV+]

이민호. [사진 애플TV+]

드라마 속 한국 문화·역사에 대한 관심도 높다. NYT는 9일 ‘파친코’에 나온 한복을 “한국 역사의 렌즈”라며 주목했다. 넷플릭스 좀비 사극 ‘킹덤’이 인기를 얻자 조선 전통 모자가 주목받은 것과 흡사하다. 워싱턴포스트는 지난달 25일 ‘파친코’ 리뷰 기사에서 “미국인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한국(및 일본) 역사인 1910년대에 시작된다”고 짚었다. 같은 날 뉴스위크는 ‘파친코’ 속 일제강점기를 조명한 기사에서 “일본은 한국문화를 말살하려고 했고, 거의 72만5000명의 (한국) 남성을 일본과 그 영토에서 일하도록 강요하고 수천 명의 한국 여성을 ‘위안부(comfort women)’, 즉 일본군의 성노예가 되도록 강요했다”고 보도했다.

재미교포인 공동 총괄 프로듀서 테레사 강 로우는 지난달 18일 한국 취재진 화상 간담회에서 원작을 처음 접한 뒤 느낀 공감을 이렇게 표현했다. “모든 가정에 저마다의 선자가 존재한다.” 흔히 남성 중심인 이민자 서사를 여성 시선에서 묘사한 점에 끌렸다는 거다. 테레사 강 로우는 기획 초반부터 미국의 이탈리아계 마피아를 그린 ‘대부’ 시리즈를 참고했다고 했다. 역사의 굴곡을 다루되 현재에 미치는 파장을 추적해 동시대성을 획득한 것도 장점이다. 코고나다 감독은 “생존에 관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많은 이민자 가정, 우리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현재진행형 스토리”라고 했다.

원작을 토대로 미국 작가팀이 영어로 쓴 각본을 한국말 대사로 번역하는 작업도 섬세하게 이뤄졌다는 평가다. 500여편의 영화 및 뮤지컬 대사를 한국말로 옮긴 황석희 번역가가 참여했다. 번역 작업만 1년 넘게 걸렸다. 해외 제작진이 한국말 작품을 만들며 생겨난 새로운 작업 과정이다. 황 번역가는 최근 화상 인터뷰에서 “영어와 한국말의 정서와 표현이 달라 한 회 분량 대본을 옮기는 데만 미국 제작진과 열댓 번씩 메일을 주고받았다”고 소개했다. 그는 “어린 선자의 ‘내는 죽어도 싫어예’라는 대사의 경우 영어로 ‘never’인 걸 ‘죽어도’로 번역한 다음, 영어로 다시 직역(Even if I die)해서 수 휴한테 보냈더니 ‘7살짜리가 그런 표현을 쓸 리 없다’고 했다. ‘한국에선 많이 쓴다’고 하나하나 설득했다”고 전했다. 영문 대본에 혁명·시위로 표현됐던 ‘3·1운동’도 정확한 명칭으로 바꿨다.

‘파친코’는 일본에서도 공개됐지만, 애플TV+는 홍보를 자제하는 분위기다. 일본 언론에는 관련 기사는 거의 없다. 다만 온라인에 “역사 왜곡 반일 드라마”라는 비난 목소리가 있다. 서경덕 성신여대 교양학부 교수는 4일 페이스북을 통해 일본 누리꾼의 비난을 전한 뒤 “글로벌 OTT를 통해 일본의 가해 역사가 전 세계에 제대로 알려질까 봐 두려워하는 현상”이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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