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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대통령 관저의 품격 위해, 소통·검이불루 정신 담아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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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선진국 대통령이나 총리 업무 공간의 공통점은 대부분 집무실과 관저가 같은 건물에 있다는 것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9일(현지시간) 워싱턴 백악관 가든투어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손을 흔드는 모습. [AP=연합뉴스]

선진국 대통령이나 총리 업무 공간의 공통점은 대부분 집무실과 관저가 같은 건물에 있다는 것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9일(현지시간) 워싱턴 백악관 가든투어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손을 흔드는 모습. [AP=연합뉴스]

다음 달 10일 윤석열 정부의 출범과 함께 ‘청와대 시대’는 끝나고 ‘용산 시대’가 열린다. 대통령 집무실뿐 아니라 관저를 포함한 청와대 시설 전체를 쓰지 않기로 한 만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서울 용산구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을 고친 뒤 관저로 쓴다.

윤 당선인은 지난달 20일 ‘탈(脫)청와대’를 공식 선언하며 새 관저를 짓는 문제에 대해 “지금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용산 집무실 인근 부지에 새 관저를 지을 가능성이 크다고 정치권은 보고 있다. 대통령 출퇴근 때 교통 통제로 인한 시민 불편과 경호 문제 등을 고려하면 대통령 동선을 최소화하는 게 합리적인 까닭이다.

그동안 한국에서 대통령 관저는 ‘불통의 공간’이었고 ‘금단의 구역’이었다. 때로는 ‘대통령이 누구와 만찬을 자주 한다더라’는 소문이 대통령 주변의 권력관계를 드러내는 척도로 여겨지곤 했다. 그러나 관저(官邸) 혹은 공관(公館)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관저와 공관은 온전히 사적인 공간이 아니다. 고위 관료의 공적인 활동을 뒷받침하는 공적인 기능도 중요한 부분이다.

그럼에도 한국의 관저는 상당히 폐쇄적으로 운용됐다. 문재인 대통령이 역대 대통령 중 처음으로 가족 식사비와 생활용품 구매비 등 사적 비용을 급여에서 공제하고 있지만, 여전히 대통령 관저에 투입되는 실제 예산이 얼마인지에 대해선 청와대가 공개를 거부하고 있다.

“너무 호화롭다” 국회의장 공관 입주거부

영국 런던 다우닝가 10번지에 위치한 총리 관저. [EAP=연합뉴스]

영국 런던 다우닝가 10번지에 위치한 총리 관저. [EAP=연합뉴스]

한국에선 고관대작의 공관을 크고 화려하게 짓는 경향이 있었다. 1994년 1월 완공된 한남동 국회의장 공관의 경우 이만섭 당시 국회의장이 “새 공관이 너무 넓고 호화로우며,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유로 입주를 거부해 한동안 건물이 비어 있던 일도 있었다. 당시 165억원을 들여 7698.3㎡(2329평) 부지에 연면적 2183.6㎡(660평) 규모의 3층 건물을 지었는데 1층엔 연회실과 응접실, 비서실을 갖추고 2·3층엔 5개의 침실과 거실, 식당 등을 배치했다. 건물 외부에는 가든파티를 할 수 있는 정원도 꾸몄다.

거주 공간 445㎡(135평)를 포함해 전체 연면적 1095㎡(331평) 규모의 전통 한옥풍 전남지사 공관도 34억원을 들여 2005년 건립됐지만 “들인 돈에 비해 쓰임새가 적다”는 ‘호화판’ 비판에 시달렸다. 그러다 2018년 7월 김영록 전남지사가 입주하지 않는 일도 있었다. 매번 전국 지방선거를 전후해 광역·기초단체장의 관사가 논란이 되는 건 비일비재하다. 각 군 부대 공관에서 벌어지는 ‘갑질 사건’의 피해를 본 공관병 또한 숱하게 많다.

이에 비해 1990년 10월 완공된 청와대 관저는 외려 남루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국가건축정책위원 자격으로 청와대 관저를 둘러본 경험이 있는 세종시 초대 총괄건축가 출신의 김인철(전 중앙대 건축학부 교수) 아르키움 대표는 “우리나라 대통령의 관저가 이런 정도인가 놀랐다”며 “콘크리트로 지어진 한옥이란 게 망신스럽기도 하지만 국가 원수의 공간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격조도 떨어졌다”고 말했다.

“대통령 관저는 집무실과 인접해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2020년 6월 29일 파리 엘리제궁에서 연설하는 모습. [AP=연합뉴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2020년 6월 29일 파리 엘리제궁에서 연설하는 모습. [AP=연합뉴스]

윤 당선인이 청와대 폐지를 공식 선언했고, 장기적으로는 새 관저를 신축할 가능성이 큰 만큼 “대통령 관저부터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미국 백악관, 영국 다우닝가 10번지, 프랑스 엘리제궁, 독일 분데스칸츨러암트 등 선진국 대통령이나 총리 공간의 공통점은 대부분 집무실과 관저가 같은 건물에 있다는 것이다. 참모의 공간 또한 같은 건물에 배치돼 수시로 마주치기 쉬운 구조다.

전문가들은 대통령 관저를 새로 짓게 된다면 차제에 올바른 건축 철학을 반영해야 한다고 말한다. 김인철 대표는 “만약 신축하게 된다면 제대로 된 건물을 짓는 게 중요하다”며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은 검이불루(儉而不陋)가 좋겠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도 민주주의를 시작한 지 100년을 향해 가는데, 그런 격에 맞는 관저가 필요하다”고 했다.

‘청와대와 백악관의 공간구조 비교 연구’ 논문의 저자인 김영욱 세종대 건축학과 교수는 “대통령 관저는 임기 5년 동안 24시간 내내 국민에게 봉사하기 위한 공간”이라며 “미국·영국·프랑스·독일과 마찬가지로 관저가 집무실과 붙어 있고 비서진과도 같은 건물에 있어야 한다는 게 중요하다. 공간 배치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고 조언했다. 미국학을 전공한 안병진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도 “민주적 공간은 자연스럽게 민주적이고 순발력 있는 협의를 이끌어낸다”며 “미국 대통령제 성공의 비밀은 백악관의 ‘공간 정치’에 있다”고 말했다. 윤 당선인도 지난달 20일 기자회견에서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고 했었다.

다만 올바른 관저 문화의 정착을 위해선 다양한 여론을 수렴해야 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승효상 건축가는 “앞으로 계속 쓰일 대한민국의 대통령 관저이기 때문에 (만일 새로 짓게 된다면) 졸속으로 하지 말고 시간을 두고 마스터플랜을 만들어 차근차근 진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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