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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죄 폐지 1년인데…"낙태약 언제까지 불법으로 구해야 하나"

중앙일보

입력

“미프진 구해요. 아직 학생이라 20(만원)이하에 구하고 있어요.”
“급한 분들 계실 것 같아서 양도합니다. 가격은 40입니다.”

SNS는 먹는 낙태약 ‘미프진’에 대한 수많은 수요와 공급을 보여주는 알림판이다. 10분에도 몇 개씩 미프진을 판매하는 게시글이 올라온다. 가격대는 20만원에서 45만원까지 다양하다. SNS에서 소개하는 미프진 판매 사이트 중 한 곳에는 ‘구매를 원한다’는 게시글이 하루 평균 10여 건 올라온다.

낙태죄는 사라졌지만, 낙태약은 불법?

먹는 낙태약 '미프진'을 판매하는 불법 사이트에는 구입을 원한다는 게시글이 하루에도 십수 건 올라온다. [출처 인터넷 사이트 캡처]

먹는 낙태약 '미프진'을 판매하는 불법 사이트에는 구입을 원한다는 게시글이 하루에도 십수 건 올라온다. [출처 인터넷 사이트 캡처]

3년 전 4월 11일, 헌법재판소는 ‘낙태죄’를 규정한 형법 조항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이에 2021년 1월 1일 0시부로 낙태한 여성과 이를 도운 의사를 처벌하는 법은 사라졌다. 그러나, 법 조항 개정과 낙태약 도입이 뒤따르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 “낙태는 불법은 아니되 합법도 아닌 상황”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낙태 관련 SNS에 자주 등장하는 미프진은 1980년대 초 개발돼 2005년 WHO가 필수의약품으로 지정했다. 지금은 76개국에서 쓰이고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미프진 사용이 ‘불법’이다. 아직 식품의약품안전처의 허가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대약품이 지난해 3월 영국 제약사 라인파마 인터네셔널과 공급 계약을 체결해 7월 식약처에 품목허가를 신청했으나 아직 허가 심사는 진행중이다.

지난 2019년 4월 11일 재판관들이 낙태죄 위헌 여부 선고를 위해 11일 오후 서울 재동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으로 들어서고 있다. 이날 헌재는 낙태죄를 규정한 형법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뉴스1

지난 2019년 4월 11일 재판관들이 낙태죄 위헌 여부 선고를 위해 11일 오후 서울 재동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으로 들어서고 있다. 이날 헌재는 낙태죄를 규정한 형법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뉴스1

따라서 국내에서 판매하는 미프진은 모두 약사법을 위반한 불법의약품에 해당한다. 여성들이 의심 반 간절함 반으로 운영 주체를 알 수 없는 인터넷 사이트에 기대게 되는 이유다.

구매 경로는 제한되고 가짜 약 섞여들어

네덜란드에서 시작된 국제 비영리단체 ‘위민온웹(women on web)’도 한국에서는 활동이 자유롭지 않다. 위민온웹은 낙태죄가 있는 국가의 여성들에게 미프진을 보내주는 단체다. 식약처의 신청과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심의에 따라 위민온웹 사이트는 2019년, 2021년 두 차례 차단됐다. 이에 시민단체들은 지난 3월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미프진을 보내주는 국제 비영리단체 위민온웹 사이트에 접속하면 '불법 식·의약품 관련 정보가 제공되고 있다'며 접속이 차단된다. [출처 인터넷 사이트 캡처]

미프진을 보내주는 국제 비영리단체 위민온웹 사이트에 접속하면 '불법 식·의약품 관련 정보가 제공되고 있다'며 접속이 차단된다. [출처 인터넷 사이트 캡처]

음지에서 유통되다 보니 ‘짝퉁’ 문제도 벌어지고 있다. 지난 2020년 5월에는 300여명 여성들에게 가짜 미프진을 팔아 1억 3000만원을 챙긴 일당이 입건됐다. 이들은 중국산 자연유산유도약을 FDA 승인을 받은 정품 ‘미프진’이라고 속이고 전문 지식 없이 복약지도까지 했다. 이 여성들 가운데 일부는 과다 출혈 등 부작용을 호소했다.

“낙태죄 폐지 1년…‘안전할 권리’ 미룰 수 없어”

10일 오후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열린 낙태죄 폐지 1년 4.10공동행동 '모두에게 안전한 임신중지가 보장될 때까지'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스1

10일 오후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열린 낙태죄 폐지 1년 4.10공동행동 '모두에게 안전한 임신중지가 보장될 때까지'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스1

현장의 혼란이 지속되는 가운데 낙태죄 폐지 1년을 맞아 행사가 열렸다. ‘낙태죄 폐지 1년 4·10 공동행동’은 10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기념행사를 열고 ‘모두에게 안전한 임신중지 보장’을 위한 목소리를 높였다.

참가자들은 “낙태죄가 공식적으로 법적 효력을 상실했음에도 정부와 국회가 관련 법·제도를 만들지 않은 채 방치하고 있다”며 유산유도제의 즉각 도입과 임신중지 의료서비스의 건강보험 보장, 재생산 및 성에 관한 권리 보장을 요구했다.

김보영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사무국장은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유산유도제를 공식적인 경로로 구하지 못해서 신뢰하기 어려운 성분의 약물들을 음성적인 경로로 구해야 하냐”며 식약처의 빠른 미프진 승인을 촉구했다.

10일 오후 낙태죄 폐지 1년 4·10 공동행동에 참여한 참가자들이 보신각 앞에서 세종대로를 향해 행진하고 있다. 최서인 기자

10일 오후 낙태죄 폐지 1년 4·10 공동행동에 참여한 참가자들이 보신각 앞에서 세종대로를 향해 행진하고 있다. 최서인 기자

이동근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 사무국장은 “과거에는 안전한 방법이 없어서 건강을 해치더라도 임신중지를 시도했다. 하지만 30년 전에 안전한 약품이 개발되었는데도 아직까지 한국에서 구입되지 못하고 있다”며 암암리에 약을 구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꼬집었다. 200여명 참가자들은 집회 후 “낙태죄 폐지가 1년 되었는데 아직 왜 이래”라는 가사의 노래를 부르며 행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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