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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 못된 유산만 물려받은 러, 이래도 군사강국 이라고? [Focus 인사이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예상을 벗어난 전쟁

지난해 10월경 대규모의 러시아군이 훈련을 명분으로 우크라이나 국경 일대에 집결하고 있음이 관측됐다. 그리고 올 1월에 와서 미국은 전쟁이 벌어질 것이 확실하다며 경고하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우크라이나를 압박하기 위한 무력 시위 정도로 상황이 끝날 것이라고 낙관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어했다. 하지만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전쟁이 발발했다. 그것도 대규모 전면전이었다.

2월 25일 러시아군 트럭이 우크라이나 국경을 넘어 이동하고 있다. 이때만 해도 대부분 3~4일이면 전쟁이 러시아의 승리로 끝날 것으로 예상했다. AFP=연합

2월 25일 러시아군 트럭이 우크라이나 국경을 넘어 이동하고 있다. 이때만 해도 대부분 3~4일이면 전쟁이 러시아의 승리로 끝날 것으로 예상했다. AFP=연합

세계는 러시아를 규탄했으나 그와 별개로 전쟁은 3~4일 안에 끝날 것으로 예상했다. 워낙 양국의 전력 차이가 큰 데다 지난 2014년에 있었던 러시아의 크름 반도 합병 시에 우크라이나가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전쟁의 발발 못지않게 이후의 진행 과정도 모두의 예상을 벗어났다. 전쟁의 주도권을 러시아가 잡고는 있으나 우크라이나가 상당히 잘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초조함 때문인지 푸틴이핵무기 사용을 암시하는 발언까지 하자 3월 23일 미국이 만일 러시아가 핵무기를 사용하면 전쟁 개입도 마다치 않겠다는 보도까지 흘러나왔다. 어쨌든 속전속결로 끝내겠다는 러시아의 의도가 좌절된 것은 틀림없다. 그에 대한 분풀이인지는 몰라도 민간인 거주 지역에 대한 무차별 폭격이나 학살 같은 파렴치하고 악랄한 범죄 행위까지 자행하기에 이르렀다.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 인근 소도시 부차에서 우크라이나 시민들이 학살된 친인척 주검 앞에서 울고 있다. 의도대로 전쟁이 진행되지 못하자 러시아는 분풀이로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 AP=연합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 인근 소도시 부차에서 우크라이나 시민들이 학살된 친인척 주검 앞에서 울고 있다. 의도대로 전쟁이 진행되지 못하자 러시아는 분풀이로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 AP=연합

이처럼 전쟁이 예상과 달리 흘러가게 된 이유는 상당히 많다. 러시아군의 졸전도 그중 하나다. 단순히 전력 측면에서 보자면 압도적으로 우세한 러시아가 속전속결로 이겨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현재까지도 우크라이나군을 완벽하게 제압하지 못하고 체첸, 시리아 등지에서 용병까지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현재 러시아군이 생각보다 무능하다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다.

생각보다 못 싸웠다

전쟁 시작 후 최초 한 달 동안 약 7000~1만 5000명의 러시아군이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9년 동안 벌어진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약 1만 5000명의 소련군이 전사한 것과 비교하면 현재 얼마나 고전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면서 20세기에 있었던 제1, 2차 세계대전에서 제정 러시아군, 소련군의 희생이 엄청났다는 사실이 다른 의미에서 새롭게 부각되기 시작했다.

전사한 러시아군 병사와 격파된 장갑차. 현재까지 전사자가 7,000~15,000명으로 추산되는데 이는 러시아가 예측했던 범위를 한참 벗어난 수준이다. 이처럼 러시아군의 전투력이 생각보다 떨어지는 것으로 드러났다. CNN 캡처

전사한 러시아군 병사와 격파된 장갑차. 현재까지 전사자가 7,000~15,000명으로 추산되는데 이는 러시아가 예측했던 범위를 한참 벗어난 수준이다. 이처럼 러시아군의 전투력이 생각보다 떨어지는 것으로 드러났다. CNN 캡처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은 승리했어도 최소 추산으로 약 2000만의 소련인이 전쟁의 폭풍 속에 사라졌는데, 그중 소련군의 전사·실종자가 약 800만 정도다. 이런 통계는 전쟁의 규모가 엄청나게 컸다는 지표로 인용되지만, 문제는 패배한 독일보다 소련의 피해가 더 컸다는 사실이다. 당시 독일군은 약 320만 정도가 희생되었다. 더구나 독일은 동시에 미국·영국 등과도 싸웠다.

이 때문에 독소전쟁 초기에 입은 피해가 컸고 독일군의 전투력이 뛰어나서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그런데 독일군이 잘 싸운 것은 사실이나 교전비로만 따질 때 여타 연합군보다 소련군의 피해가 유독 컸다. 1942년을 기점으로 소련군이 우위를 점했는데도 전쟁이 끝나는 순간까지 더 많은 피해를 입었다. 하다못해 대미를 장식한 베를린 전투에서도 소련은 독일보다 3배의 병력을 동원했으나 전사자 수는 비슷했다.

1942년 9월 포로가 된 소련군. 비록 전쟁에서는 소련군이 승리했지만 독일군보다 훨씬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만큼 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군에게서도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다. Archiwum Dokumentocji Mechanizney

1942년 9월 포로가 된 소련군. 비록 전쟁에서는 소련군이 승리했지만 독일군보다 훨씬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만큼 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군에게서도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다. Archiwum Dokumentocji Mechanizney

결론적으로 소련군이 못 싸워서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이었다. 가장 큰 이유는 지휘 체계가 경직됐다는 점이다. 지휘관과 별개로 정치지도원이 존재했던 것만으로도 부대 통솔이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모든 문제의 출발점은 소련의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이었다. 전쟁 초기 민스크 전투에서 전멸을 피하려고 서부전선군 사령관 드미트리 파블로프가 부대를 후퇴시키자 사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고 격노한 스탈린이 그를 사형시켰다.

답을 알고 있지만

가뜩이나 1930년대 말에 있었던 피의 대숙청을 경험했던 군부는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두 달 후 벌어진 키이브 전투에서 소련군 최고사령부가 후퇴 명령을 내렸을 때 현지 지휘관인 미하일 키르포노스가 공식 문서를 보내주지 않으면 따르지 않겠다고 했을 정도였다. 결국 그렇게 시간이 지체되면서 이때 무려 70만명의 소련군이 격파됐다. 전쟁 중반을 지나면서 간섭이 줄어들기는 했어도 군부는 항상 스탈린의 눈치를 봐야 했다.

스탈린이 스타브카(소련군 최고사령부)에서 전쟁 지휘를 하는 것처럼 묘사한 체제 선전화. 시간이 흐를수록 간섭이 줄기는 했으나 전쟁 내내 군부는 절대 권력자의 눈치를 봐야 했다. nemaloknig.net

스탈린이 스타브카(소련군 최고사령부)에서 전쟁 지휘를 하는 것처럼 묘사한 체제 선전화. 시간이 흐를수록 간섭이 줄기는 했으나 전쟁 내내 군부는 절대 권력자의 눈치를 봐야 했다. nemaloknig.net

이 때문에 소련은 아래로 갈수록 허락된 범위 내에서만 작전을 펼쳤다. A방향으로 돌격하다 실패했으면 B방향, C방향도 고려해야 했지만 어지간해서 다른 대안을 택하지 않았다. 더구나 인명 경시 풍조까지 있었기에 희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같은 방법을 고수했다. 결과적으로 소련은 독일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물량에서 앞섰기에 승리한 것이었다. 그런데 현재 러시아군이 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

헤르손 인근의 공항 점령에 나선 러시아군이 무려 10차례나 똑같은 공격 방식을 고수하다가 장군 두 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보고 패퇴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또한 한반도 3배의 공간에서 전쟁을 벌이면서 현장 지휘관에 재량을 주지 않고 모스크바에서 전쟁을 지휘한다는 것만 보아도 옛 소련군 방식에서 변한 것이 없다. 더구나 군부의 핵심 관계자들이 절대 권력자인 블라디미르 푸틴의 예스맨들이고 직언을 못 한다는 점도 80년 전과 같다.

블라디미르푸틴에게 보고하는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과 발레리 게라시모프 총참모장 . 이너서클이 이 정도이니 사진만으로도 러시아군의 지휘 체계가 얼마나 경직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EPA=연합

블라디미르푸틴에게 보고하는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과 발레리 게라시모프 총참모장 . 이너서클이 이 정도이니 사진만으로도 러시아군의 지휘 체계가 얼마나 경직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EPA=연합

분명히 하드웨어로 따지면 러시아군은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2위의 강군이다. 그런데도 소련군의 가장 나쁜 유산들을 그대로 물려받으면서 전투력이 보유한 전력에 비례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번 사례만으로 모든 것을 단정할 수 없고 분명히 그들도 모범 답안을 알고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독재자와 그를 추종하는 이들만 득세 중인 러시아의 체제를 보면 결코 쉽게 해결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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