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상·박성용의 꿈이 일궜다, 영호남 화합의 무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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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3호 18면

20주년 맞은 통영국제음악제 

통영국제음악제 기간 중 4월 3일 소프라노 박혜상이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와 함께 공연하는 장면. [사진 통영국제음악재단]

통영국제음악제 기간 중 4월 3일 소프라노 박혜상이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와 함께 공연하는 장면. [사진 통영국제음악재단]

한국의 남해안은 부산에서 목포에 이른다. 그 중간 지점에 경상남도 통영이 있다. 금호아시아나그룹 박성용(1932~2005) 회장이 그토록 염원하던 음악제를 출범시킨 곳이 통영인 이유다. 그는 호남인으로서 한국 정치의 편파적 의식이 조장한 영호남 분열을 심각하게 걱정했고, 아름다운 한국의 남해안이 나뉘어 대립하게 된 폐습을 안타까워했다. 그 중간 지점인 통영에서 세계가 주목하는 국제음악제가 열린다면 영남과 호남을 가르는 생각에도 변화가 생기지 않겠냐는 게 그의 뜻이었다.

한국 음악의 국제성을 대표하는 인물로 과연 누구를 꼽을까에 대한 대답도 이미 준비했던 분이 박 회장이다. 서양 음악, 특히 현대 음악 발전의 중심지로 많은 한국 유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던 독일에서 뛰어난 작곡가로 활동한 윤이상(1917~95) 선생은 독일을 넘어 세계적으로도 이미 명성이 자자했다.

윤이상

윤이상

그렇게 윤이상 선생의 고향인 통영에서 2002년 ‘통영국제음악제’가 시작됐는데 ‘시작이 반’이라더니 벌써 20주년을 맞았다. 시작부터 지금까지 음악제가 명성을 이어올 수 있었던 데는 누가 뭐라 해도 박성용·윤이상 두 분의 이름을 빼놓을 수 없다. 이 두 분이 없었다면 한반도 남쪽 통영에서 매년 봄 세계적 수준의 음악이 연주될 수 있었을까. 또한 매년 가을 피아노·바이올린·첼로 신인을 돌아가며 발굴하는 국제 콩쿠르가 열릴 수 있었을까. 통영의 축제를 자연스런 역사의 한 페이지만으로 넘기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통영국제음악제는 어떻게 시작됐으며, 음악을 즐겨 듣는 취미를 넘어 음악과 특별한 관계를 연계할 만큼 재능을 갖추지 못한 나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을까.

우선 박성용 회장과 필자의 관계를 간단히 소개할 필요가 있다. 1959년 가을 예일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고 보니 10여 명의 한국 유학생 중 나보다 먼저 유학 와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있던 박 회장이 눈에 띄었다. 같은 기숙사였고, 특히 클래식 음악 매니어로 자기 방에 고급 하이파이를 갖고 있던 박 회장과 한가한 저녁이면 한두 시간씩 음악감상 기회를 가지며 우리는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1968년 서울로 돌아왔을 때 그는 가업인 광주고속과 금호를 토대로 금호아시아나까지 두루 발전시켰고, 이에 더해 예술, 특히 그가 좋아하는 클래식 음악에 대한 열정을 사회에 환원하는 업적을 쌓고 있었다. 예술의전당, 금호아트홀 등 음악인을 위한 폭넓은 무대 제공은 물론이고 악기 대여 등 많은 젊은 음악인에게 값진 기회를 제공하고 용기를 불어넣는 더없이 훌륭한 큰 후원자 역할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큰일을 하면서도 과시하지 않고 군자적 품성답게 묵묵히 자신의 할 일을 찾아 도움을 주고 있었기에 더 빛을 발할 수 있었다.

언젠가 박 회장이 통영국제음악제에 세계적 지휘자인 주빈 메타와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출연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비행기로도 닿을 수 없는 외진 곳에 그 세계적 연주자들이 온다니 별로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2003년 부산에서 버스를 타고 통영에 도착해 베토벤 교향곡 ‘영웅’을 연주했다. “모든 조건이 좋지만 오는 길이 힘들다”고 했던 메타는 통영의 신선한 해산물로 저녁을 먹고 “언제든지 올 수만 있다면 오고 싶다”며 만족스러워했다. 이처럼 난해해 보이는 일도 박 회장이 꿈꾸던 통영의 음악제에서는 가능했다.

박성용

박성용

당시 통영시민문화회관에서 성공적으로 통영국제음악제를 시작한 박 회장은 세계 어느 곳에 내놓아도 자랑할 만한 콘서트홀을 짓겠다는 꿈도 피력하기 시작했다. 지방색이나 국가를 넘어 국제적 성격을 지닌 음악당이 꿈이었던 그는 아름답지만 넓지는 않은 통영에서 충무관광호텔이 있던 자리를 콘서트홀의 최적 위치로 찾아냈다. 통영시는 물론 통영국제음악제 이사진들의 부단한 노력으로 통영국제음악당은 박 회장 사후인 2013년 완성됐고, 한려수도 남해바다를 바라보며 우뚝 서 통영을 대표하고 있다. 지하에서 그는 본인의 뜻이 옳았다며 빙그레 웃고 있을 것이다.

반면, 안타깝게도 윤이상 선생은 음악제가 뻗어나가는 통영에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1967년 동백림 사건으로 구속됐고, 북에도 왕래했던 그는 말년에 통영에 돌아와 지내기를 원했다. 당시 정부에서 통일 업무를 맡고 있던 나는 그에게 편지를 썼다. ‘그간의 법적 문제는 통일로 가려는 일념에서 일어난 것이니 국민들의 너그러운 이해를 부탁한다’는 내용으로 입장을 발표하신다면 귀국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귀국을 권고했지만 긍정적인 답이 없었고, 결국 윤 선생은 1995년 독일에서 타계했다.

2004년 말, 박 회장은 어려운 신병을 치료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나며 통영국제음악제 이사장직을 내게 넘겨줬다. 그리고 이듬해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떠나셨다. 박 회장이 그렇게 야망을 갖고 추진하던 콘서트홀은 그가 점찍어 놓은 바로 그 자리에서 음악제와 20년을 함께했다. 또한 음악제의 모든 운영과 관리책임이 통영시로 넘어가면서 남해안의 문화를 품은 통영시민은 역사·문화적 사업의 주인이 됐다.

20주년 음악제는 새로운 예술감독 진은숙과 함께 지난달 25일부터 이달 3일까지 열렸다.

이홍구 전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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