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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무기보다 무서운 가짜뉴스, SNS ‘신정보전’ 시작됐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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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3호 22면

김진경의 ‘호이, 채메’ 

유럽연합(EU)이 역내에서 방송을 차단하기로 한 TV 채널 러시아투데이(RT)와 러시아 라디오 방송 스푸트니크의 로고. [로이터=연합뉴스]

유럽연합(EU)이 역내에서 방송을 차단하기로 한 TV 채널 러시아투데이(RT)와 러시아 라디오 방송 스푸트니크의 로고. [로이터=연합뉴스]

내가 다니는 대학원의 학생 중 약 10%는 중국인이다. 지난 학기에 표현의 자유를 주제로 하는 수업에서 중국인 학생 둘이 발표를 맡았다. 검열이 심한 것으로 알려진 나라 출신이니 흥미로운 사례가 많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기대가 무색하게 이 중국인들의 발표에는 별 내용이 없었다. 답답해서 질문을 했다. 몇 년 전 중국에서 어린이 영화 ‘곰돌이 푸’ 상영이 (푸 캐릭터가 시진핑 국가주석을 닮았다는 이유로) 금지된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중국의 유명 테니스 선수 펑솨이가 중국 고위 관리의 성폭행 의혹을 인터넷에 올린 후 실종된 사건에 대한 중국인들의 반응은 어떤가?

중립국 스위스, 표현의 자유 기대치 높아

방송 중단된 프랑스 러시아투데이의 보도 장면. [AFP=연합뉴스]

방송 중단된 프랑스 러시아투데이의 보도 장면. [AFP=연합뉴스]

발표자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곰돌이 푸와 시진핑이요? 그런 얘긴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데요. 영화 상영이 금지된 것도 몰랐습니다. 테니스 선수 기사는 언뜻 본 것 같은데 자세한 전후 사정을 모르니 뭐라 말하기가 어렵네요”. 분위기를 보아하니 말을 가리는 게 아니라 정말 잘 모르는 듯했다. 발표자 중 한 명이 덧붙였다. “중국처럼 큰 나라가 정치적 안정을 위해 표현을 어느 정도 통제하는 건 당연합니다. 나는 내 나라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그걸 이해해요”. 사랑이라. 나라를 사랑하면 어린이 영화 상영이 금지되고 운동선수가 사라지는 것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건가. 내가 생각하는 애국심과는 거리가 꽤 멀다고 느꼈다. 정부의 조직적 센서십(검열)이 이 젊은 학생들의 비판 정신에 어떤 영향을 미친 것인가.

중국 학생들로 얘기를 시작했지만 검열이 특정 국가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중국, 러시아, 북한 등 검열 없이는 체제 유지가 어려운 국가들도 있고, 한국처럼 특정 콘텐트(북한 매체) 접근이 제한된 나라도 있다.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북미나 서유럽에서도 상황에 따라 검열이 이뤄지고 그에 대한 찬반 논란은 늘 뜨겁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한창인 지금, 유럽에서 다시 센서십이 도마에 올랐다. 지난 3월 둘째 주 유럽연합(EU)이 일부 러시아 관영 매체를 역내에서 차단하기로 결정하면서다. 차단 대상은 TV 방송인 ‘러시아투데이’와 뉴스 통신사 겸 라디오 방송인 ‘스푸트니크’다. 아예 접근이 안 되는 건 아니다. 케이블 채널 목록에서 삭제하거나 스마트폰에서 관련 앱 사용을 막는 등 1차적 접근을 차단했다.

차단에 대한 반대 의견도 많았다. 특정 국가의 미디어를 차단하는 것은 검열이고 표현의 자유에 대한 침해라는 것이다. 그러나 EU 전략 통신 태스크포스 리더로서 가짜뉴스 및 음모론 대응을 맡고 있는 루츠 귈너는 한마디로 반대 의견을 물리친다. “러시아투데이와 스푸트니크는 미디어가 아니라 무기다.” 그의 말을 더 들어보자. “이 매체들은 편집의 자유와 균형 잡힌 보도를 내세우는 전통적 의미의 미디어가 아니다. 러시아 정부가 조정하고 특정 방식으로 사용하는 도구다. 이런 매체를 차단하는 건 센서십이 아니다.” 러시아투데이와 스푸트니크가 정보전의 무기라면 방송 차단은 그 무기를 막아 내는 최소한의 방패라는 소리다.

지난 2일 취리히 도심. 거리 곳곳에 우크라이나 국기가 걸려 있다. [사진 김진경]

지난 2일 취리히 도심. 거리 곳곳에 우크라이나 국기가 걸려 있다. [사진 김진경]

흥미로운 건 EU에 속하지 않은 스위스의 대응이다. 스위스 연방 정부는 3월 25일 긴급회의를 열었다. 각 부서 장관을 맡고 있는 7인의 연방 각료들이 모여 토론을 벌였다. 러시아 방송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은 국방부 장관(비올라 암헤르트)과 에너지교통환경통신부 장관(시모네타 소마루가)뿐이었다. 나머지 장관 5명은 러시아 방송 차단이 센서십이라며 반대했다. 결국 다수결에 의해 스위스에서는 전쟁에 대한 러시아 정부의 주장이 여과 없이 방송되고 있다. 대러 경제 제재에는 비록 늦게나마 동참했지만, 미디어 제재에는 반대함으로써 스위스는 다른 EU 국가들과 다른 길을 걷게 됐다. 방송 차단에 반대한 경제부 장관 기 파멜린은 스위스 일간 타게스 안차이거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국민은 무엇이 비합리적인 프로파간다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는 미디어 스킬을 갖고 있다.”

파멜린 장관의 말대로 스위스 국민의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가 다른 유럽인들에 비해 더 나은가? 어디에도 그런 근거는 없다. 그저 표현의 자유에 대한 기대치가 주변 국가들보다 좀 더 높을 뿐이다. 스위스는 중립국으로서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치 독일과 관련된 혐오 발언 규정이 다른 나라보다 약하다. 또 역사적, 문화적 배경이 제각각인 칸톤(주)들이 모여 구성된 연방 국가라는 점도 표현의 자유를 통해 다양한 입장을 포용하는 과정을 중요하게 만들었다. 스위스에서 법적으로 인터넷 검열이 이뤄지는 영역은 두 개뿐이다. 하나는 특정 포르노(아동 포르노와 하드코어 포르노), 다른 하나는 불법 도박이다.

스위스가 러시아 관영 매체의 프로파간다 유포를 막지 않는다고 해서 이번 전쟁에서 러시아를 지지한다는 뜻은 아니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지금까지 우크라이나 난민 약 2만 명을 받아들였다. 현재 스위스 취리히 도심의 호숫가에는 우크라이나 국기들이 펄럭이고, 주말마다 전쟁 반대 집회가 열린다. 그러나 스위스 정부는 우크라이나와 정치적으로 연대하는 것과 러시아 매체를 차단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판단했다. 다른 유럽 국가들과 스위스의 대응을 비교해보면 의문이 꼬리를 문다. 정보전(戰)에서 가짜뉴스의 위력은 어느 정도인가. 가짜뉴스를 차단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인가. 어떤 사람들이 특히 가짜뉴스에 취약하고, 그 취약성을 개선할 방법은 무엇인가.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팬데믹 내내 기승을 부린 가짜뉴스와 관련해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과 대담을 나눈 적이 있다(유튜브 ‘Global Trends Shaping Humankind’, 2021). 하라리에 따르면 가짜뉴스에 관한 한 지금이 최악의 시기는 결코 아니다. 그는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1440년 인쇄술을 발명한 이후 베스트셀러가 된 최초의 책 중 하나인 『마녀들의 망치(Malleus Maleficarum)』(1486)를 언급한다. 주변에서 마녀를 찾아내 처치하는 방법을 쓴 일종의 지침서인데, 인쇄술이라는 당시의 신기술 덕에 마녀에 대한 가짜뉴스가 널리 퍼졌다는 것이다. 새로운 기술을 나쁜 의도와 우선 결합시키는 건 인간 본성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21세기의 가짜뉴스 유포 과정에는 과거와 전혀 다른 특징이 있다. 속도와 규모다. 지금처럼 빠른 속도로 수많은 사람에게 가짜뉴스가 전달된 적은 일찍이 없었다. 소셜미디어 때문이다. 가짜뉴스 자체가 아니라, 바로잡을 틈도 없이 퍼지는 스케일이 우리의 당면 과제다.

소셜미디어 타고 가짜뉴스 빠르게 번져 

지난 4일 취리히 시내 트램(전차) 안. 한 여성이 우크라이나의 상징인 해바라기로 된 머리띠를 했다. [사진 김진경]

지난 4일 취리히 시내 트램(전차) 안. 한 여성이 우크라이나의 상징인 해바라기로 된 머리띠를 했다. [사진 김진경]

소셜미디어에 책임을 지우라는 주장이 나오는 건 그래서다. 하지만 여기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소셜미디어의 필터링도 늘 정확하지는 않다. 코로나19 백신 반대론자들은 페이스북 그룹 이름을 ‘댄스파티’로 바꿔 필터링을 피해 갔다. 그간 가짜뉴스를 찾아내는 알고리즘이 많이 개발됐지만, 유포자들은 늘 그것을 한발 앞선다.

둘째, 당장 급한 불을 끄느라 소셜미디어에 검열권이라는 힘을 실어 주면 장기적으로 미국의 몇몇 거대 테크 기업이 세계 여론을 좌우하는 일이 생길 수 있다.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독일해적당은 이렇게 논평했다. “푸틴의 도발을 막기 위해 러시아 관영 매체를 검열하면 푸틴도 러시아에서 유럽 공공 매체를 차단할 구실이 생긴다. 또한 빅테크 기업들에 프로파간다로 의심되는 콘텐트를 걸러 달라고 요청하는 건 미래에 위험한 전례를 만든다. 프로파간다와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구분하는 건 빅테크 기업이 아니라 시민들 스스로 해야 한다”.

당장 전쟁터에서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데 표현의 자유나 미디어 리터러시 타령은 한가한 소리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계속 양극화되는 세계에서 소셜미디어를 통해 벌어지는 신정보전은 이제 겨우 시작이다. 모두 우왕좌왕이고, 한배를 탄 듯 보이는 유럽 국가들도 가짜뉴스의 공격 앞에서 다른 결정을 내린다. 어쩌면 기껏 일군 민주주의 세계는 핵무기가 아니라 실체 없이 바이트(byte)로 존재하는 가짜뉴스 때문에 무너질지도 모른다. 우리는 얼마나 준비되어 있는가.

김진경 스위스 거주 작가. 한국에서 일간지 기자로 일했다. 스페인 남자와 결혼해 스위스 취리히로 이주한 뒤 한국과 스위스의 매체에 글을 기고해 왔다. 저서로 『오래된 유럽』이 있다. 현재 취리히대학에서 인터넷 플랫폼과 그것을 둘러싼 사회의 변화에 대해 공부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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