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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심은경의 미국에서 본 한국

한국 대선 휩쓴 ‘젠더 전쟁’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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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캐슬린 스티븐스 전 주한 미국대사·한미경제연구소장

캐슬린 스티븐스 전 주한 미국대사·한미경제연구소장

민주주의가 미국을 포함해 전 세계에서 위기에 처해있다. 암울했던 한국의 대선 캠페인은 이 나라의 민주주의 제도가 허위 정보·양극화·스캔들에 취약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많은 한국인들이 비호감 대선후보들 속에서 차악을 선택하는 모습이 서글프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번 대선은 선거가 여전히 중요하며 책임 있고 적법한 지도자를 뽑는 데 필수적이라는 사실 또한 상기시켰다. 후보들에 대한 불만 속에서도 나타난 높은 투표율, 패자의 빠르고 품위 있는 승복, 관대하면서도 적절했던 당선인의 수락연설은 매우 감동적이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지난달 12일자 사설에서 “35년 된 한국의 민주주의가 우수한 점수로 합격했다”고 언급하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연계해 “미국 주도의 안보동맹이 한물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전 세계에 일깨워줬다”고 평가했다. 또한 “매우 필요한 시기의 대미 우호적 전환”이라며 윤석열 당선인이 바이든 대통령과 협력해 한미동맹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줄 것을 촉구했다.

대선 기간 젠더갈등, 해외 큰 주목
한·미 모두 여권 크게 성장했지만
임금격차, 유리천장 등 한계 여전
세대·성별·정파 넘어 기회 넓혀야

여론조사 결과도 양국 국민 모두 더 긴밀한 동맹관계를 향해 강력한 초당적 지지를 보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나는 지난해 5월에 있었던 한미정상회담 공동선언문을 토대로 모든 의제에 걸쳐 한·미 협력이 확대되길 기대한다. 그러나 여러 국내·외 도전으로 쉽지 않아 보인다. 바이든 대통령에게는 우크라이나 전쟁, 미국의 물가 상승, 11월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의회 장악을 유지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불길한 예측 등의 과제가 놓여있다. 윤 당선인은 격화되고 있는 강대국 간 패권경쟁은 물론 부동산·일자리·형평성 등 사회·경제적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

한국 대선이 국제적인 관심을 끌게 된 데는 외교 정책의 시사점이나 한국이 글로벌 민주주의의 바로미터라는 점 외에도 또 있다. 나를 포함한 외국인들은 이번 대선에서 특히 한국의 젊은 세대와 선거전략 측면에서 젠더 정치의 역할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상당수의 미국 매체들도 이 문제에 초점을 맞췄다. 워싱턴포스트는 선거 결과를 환영하는 사설을 낸 같은 날 “한국의 ‘안티 페미니스트’ 선거가 어떻게 젠더 전쟁을 촉발했는가”라는 오피니언 칼럼을 실었다. 대선 일주일 전에는 “한국의 페미니스트들, 성차별주의자들의 반발에 맞서 싸우다” “한국 대선후보, 인터뷰 내용이 논란되자 세계 여성의 날에 ‘페미니스트’ 꼬리표 거부하다”라는 기사들을 싣기도 했다. 그래서 요즘 미국 내 한국 관측통들은 윤석열 정부의 외교정책에 대한 질문과 함께 한국 내 여성 지위와 페미니즘, 윤 당선인이 안티 페미니스트인지 여부, 한국의 남성인권 옹호자들의 활동이 유럽과 미국의 우익 남성우월주의 운동의 변형인지에 대해 논평해 달라는 요청을 받곤 한다.

나는 1975년 충남 예산중학교에서 네 명의 여교사들과 함께 근무했던 시절부터 수십 년 동안 한국 여성들의 법적 권리·교육 기회·직업 선택 등에 나타난 엄청난 변화를 지켜봐왔다. 한국 최초의 여성변호사로 1980년대 가족법 개정운동에 앞장섰던 이태영 박사를 그가 창립한 한국가정법률상담소에서 만났던 기억도 난다. 주한 미국대사 재직 시절에는 한국 여성들의 노력과 업적을 격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의 성별 임금격차가 여전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하위라는 점은 우려스럽다.

미국에서도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내가 첫 서울 근무를 시작할 무렵 당시 주한 미국대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백인 남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진 정치과로 발령받았다. 우리 세대의 다른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주한 미국대사를 포함해 수많은 외교 관련 직책에서 ‘최초의 여성’이었다. 다행히도 이제는 이 분야에서 ‘유일한 여성’은 아니다. 내가 1986년 서울에서 매들린 올브라이트를 처음 만났을 당시 그는 대학교수였다. 그때만 해도 그가 미국 최초의 여성 국무장관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게다가 내가 공직에 있는 동안 한 명도 아닌 세 명의 여성 국무장관 밑에서 근무하게 될 줄도 몰랐다. 하지만 미국은 아직도 젠더 문제에 있어 성별 임금 형평성, 공중보건 및 보육 지원, 금은 갔지만 깨지진 않고 심지어 어떤 분야에서는 한국보다 더 높기까지 한 유리천장 등 나름의 심각한 결점을 갖고 있다.

때마침 내가 이사장으로 있는 코리아 소사이어티(The Korea Society)가 지난해부터 ‘한·미 관계에서 여성의 리더십’을 주제로 웹 세미나(웨비나) 시리즈를 시작했다. 젊은 시절에는 남성들 틈에서 비주류로 분류될 우려에 여성 특화 프로젝트를 기피했지만 이제는 이런 기회가 반갑다. 지난달 대담자는 김은미 이화여대 총장과 시안 레아 베일락 바너드 칼리지(Barnard College) 총장이었다. 두 여자대학 모두 1880년대에 설립되었고 당시만 해도 전무했던 여성 대학교육을 최초로 시작했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한국의 가장 큰 자산은 국민이다. 대선도 끝났으니 이제는 ‘젠더 전쟁’에서 세대·성별·정파를 아우르는 포괄적인 토론으로 나아가 불평등을 해소하고 모두를 위한 기회를 확대하길 기대한다.

캐슬린 스티븐스 전 주한 미국대사·한미경제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