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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한국의 혁신 수용성 잣대가 된 영리병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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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의료민영화 저지와 무상의료 실현을 위한 운동본부'가 지난 1월 17일 제주도청 앞에서 국내 첫 영리병원으로 추진된 제주 녹지국제병원에 대한 개설 허가 취소가 부당하다는 대법원의 판단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제주도는 관련 소송에서 잇따라 패소했다. [연합뉴스]

'의료민영화 저지와 무상의료 실현을 위한 운동본부'가 지난 1월 17일 제주도청 앞에서 국내 첫 영리병원으로 추진된 제주 녹지국제병원에 대한 개설 허가 취소가 부당하다는 대법원의 판단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제주도는 관련 소송에서 잇따라 패소했다. [연합뉴스]

잘못된 여론에 휘둘렸던 제주도 잇따라 패소  

전직 관료의 ‘기준국가론’ 참고해 규제개혁을

제주도가 국내 1호 영리병원인 제주 녹지국제병원(이하 녹지제주)에 내국인 진료 제한 조건을 달아 개원을 허가한 것은 위법이라는 취지의 제주지법 판결이 엊그제 나왔다. 1심 판결이지만 일부 사회단체가 주도하는 여론에 이끌린 정치적 결정이 어떤 대가를 치르는지 보여주는 반면교사가 될 수 있다.

영리병원은 2002년 김대중 정부 때부터 추진됐지만 번번이 의료계와 시민단체의 반대에 막혀 빛을 보지 못하다 2015년 보건복지부가 녹지제주 사업계획을 승인하면서 속도가 빨라졌다. 건물이 준공되고 병원 인력도 채용했지만 여론 눈치를 보는 제주도의 개설 허가는 미뤄졌다. 제주도가 미루고 미루다 2018년 12월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 외국인만 진료하는 조건부 허가였다. 병상이 47개에 불과한 소형 병원인데도 반대자들은 대한민국 의료가 무너질 것처럼 목소리를 높였다. 녹지제주는 수익성이 없어 개원할 수 없다며 2019년 2월 소송을 냈고, 그 판결이 그제 나온 것이다. 녹지제주는 조건부 허가 이후 병원 문을 열지 않았고, 제주도는 병원 개설 허가를 취소했다. 녹지제주는 이에 대한 취소 소송을 냈고, 올해 1월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다.

녹지제주는 다 지은 병원 건물과 부지를 제3자에게 매각한 상태라 당장 문을 여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민주노총 보건의료노조는 어제 “녹지병원 개원 저지 및 영리병원 허용 법제도 폐기 투쟁에 나서겠다”고 강력 반발했으니 납득하기 어렵다.

영리병원은 이제 규제 개혁의 어려움과 혁신에 대한 우리 사회의 수용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됐다. 우리나라 의료법상 병원은 의료인·국가·지자체 또는 비영리법인만 설립할 수 있다. 개인이나 기업도 병원에 투자해 배당을 받고 병원 해산 시 재산처분권을 인정해 주자는 게 영리병원의 핵심 논리다.

병원의 90%가 민간 소유로 사실상 영리를 추구하고 있는데도 의료비 인상, 병원의 과당경쟁 등을 우려하며 영리병원에 반대하는 주장이 여전히 강하다. 새로운 시도조차 원천적으로 막는 건 부당하고 불합리하다. 제주도와 경제자유구역에 한정해 영리병원을 허용한다는 특별법이 있는데도 의료산업을 키우고 의료서비스를 다양하게 하며 일자리를 만드는 영리병원의 장점은 무시하고 의료의 공공성이란 이념에 지나치게 휘둘리고 있다.

변양호·임종룡 등 전직 관료는 지난해 펴낸 『경제정책 어젠다 2022』에서 기준국가제 도입을 통한 규제개혁을 주장했다. 미국·스웨덴 등 벤치마킹할 만한 기준 국가에서 허용한 사업은 우리도 할 수 있도록 하자는 아이디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대부분이 허용하는 영리병원의 문턱을 아직도 넘지 못하는 우리가 참고할 만한 제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