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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둬야 끝난다" 움켜쥔 가슴...'블랙리스트 표적' 슬픈 돌연사 [그법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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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가 지난 정권이 임명한 공공기관장에게 부당하게 사표를 강요했다는 게 이른바 '블랙리스트' 의혹입니다. 2019년 국민의힘의 전신인 자유한국당은 환경부와 산업부, 과학기술부, 교육부, 통일부 등을 검찰에 고발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1월 대법원은 이 가운데 환경부 블랙리스트 의혹과 관련해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과 신미숙 전 청와대 균형인사비서관의 직권남용 혐의에 대해 유죄로 확정했지요. 검찰은 이제 산업부 블랙리스트 의혹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블랙리스트 수사가 다른 부처로도 확대될 조짐도 생겨나는 가운데, 법원이 ‘과기부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한 공공기관장의 안타까운 죽음을 업무상 재해로 인정했습니다. '그법알'에서 판결문을 살펴봤습니다.

컷 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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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법알 사건번호 17] "내가 그만둬야 끝나"…기관장직 내려놨는데도 계속된 표적 감사

지난 2000년부터 한국생명공학연구원에 연구직으로 입사한 A씨. 연구원에서 산하 센터장, 부원장을 거쳐 박근혜 정부 때인 2015년 10월 말 원장으로 취임합니다.

그런데 2018년 초 A씨는 행정직을 채용하면서 친인척에게 특혜를 줬다는 의혹에 휘말립니다. A씨는 해당 지원자와 친분이나 교류가 없고, 당연직으로 면접에 참여했을 뿐이라고 해명했습니다. 하지만 과기부 감사관실의 조사를 받은 뒤 2018년 2월 원장직을 스스로 내려놓습니다. 8개월여 임기를 남겨둔 상황이었습니다.

이후 A씨는 연구원 산하에 있는 국가영장류센터의 책임연구원 신분으로 돌아갔습니다. A씨는 아침 8시쯤 회사로 나가 밤 10시쯤 퇴근하는 일상을 반복했다고 합니다. 연구과제 발굴 등을 위한 장거리 출장도 주 2~3회 있었고, 직장과 집이 멀어 기숙사 생활을 하며 주말에는 먼 거리를 왕복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채용 비리 의혹 조사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A씨는 변호사를 찾아 "과기부에서 다시 징계나 수사 의뢰 조치를 검토하고 있다"며 조언을 구하는 등 스트레스에 시달렸습니다.

A씨가 영장류센터 연구원으로 복귀한 지 석 달쯤 지난 2018년 5월 초에는 또 다른 감사가 시작됩니다. "원숭이를 구매하는 일이 적법하게 이뤄지고 있는지 살펴보겠다"며 이번엔 감사원이 감사에 나선 겁니다.

A씨는 주변에 "내가 그만둬야 감사가 끝난다"라고 말하기도 하고, 가족들에게도 "연구원을 그만두어야 될지도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원장 자리에 이어 연구원 자리에서도 물러나라는 압박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A씨는 당시 과기부 블랙리스트의 피해로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해 퇴임한 기관장으로 꼽히기도 했습니다.

결국 같은 달 A씨는 가족들과 저녁을 먹고 아들에게 학업 문제로 훈계한 뒤 한 시간쯤 지나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곧바로 병원으로 이송된 A씨는 심장마비 증세를 보이다 결국 숨을 거뒀습니다. 의료진은 상세 불명의 뇌출혈을 사인으로 추정했습니다.

A씨의 가족들은 A씨가 업무상 재해를 당한 것이라고 보고, 근로복지공단에 유족급여와 장의비를 신청했습니다. 하지만 지난 2020년 7월, 공단은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에게 훈계하고 쓰러진 건 업무와 관련된 사건이 아니었던 점, 업무상 부담이 갑자기 늘어난 게 없는 점 등을 들었습니다.

결국 A씨 가족들은 근로복지공단의 처분을 취소해달라며 소송을 냈습니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영장류자원지원센터. 중앙일보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영장류자원지원센터. 중앙일보

관련 법령은?

구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제5조는 업무와 질병 사이의 인과관계가 있어야 '업무상 사유에 따른 질병'으로 봅니다. 이때 질병의 원인이 업무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할지라도, 과로나 스트레스가 질병을 유발하거나 악화시켰다면 인과관계가 인정됩니다. 또 우리 판례는 이 인과관계가 의학적으로 명백히 증명되지 않더라도, 상당한 정도로 추단된다면 증명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법원 판단은?

법원은 A씨의 죽음이 업무상 재해가 맞는다고 봤습니다. 지난 1월 서울행정법원 행정3부 (유환우 부장판사)는 근로복지공단이 유족급여를 지급하지 않기로 한 처분을 취소한다고 밝혔습니다.

재판부는 A씨가 원장직에서 물러난 뒤 책임연구원으로 돌아가자, 재기를 위해 과로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또 이로 인한 스트레스로 심뇌혈관계 질환이 발병해 숨진 것으로 보고 인과관계를 인정했습니다.

A씨가 연구과제 발굴을 위해 장거리 출장을 자주 다닌 점, 기숙사에서 살며 늦은 시각까지 연구했다는 주변 증언을 종합하면 근로복지공단이 산정한 업무시간보다 더 많이 일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과로 이미지. [pixabay]

과로 이미지. [pixabay]

재판부는 직장 후배들의 진술도 판결문에 적었습니다. 동료들은 "A씨가 큰 한숨을 쉬거나 이야기 도중 한동안 말이 없이 깊은 생각에 빠지는 모습을 보였다", "재기하려고 엄청 노력하시는구나 싶었고, '쉬엄쉬엄하십시오' 말고는 해드릴 말이 없었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과로가 이어지는 가운데 채용 비리 의혹 조사가 끝나지 않는 데다, 원숭이 구매가 적법하게 이뤄졌느냐며 새로운 감사가 이어지자 자신의 거취를 두고 심적 부담이 가중됐다는 게 법원 판단입니다.

A씨 유족을 변호한 권병철 변호사(법무법인 유스트)는 "결국 채용비리의혹은 아무런 문제가 없던 것으로 결론이 났고, 원숭이 구매 감사도 이례적이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습니다.

A씨가 있던 영장류센터는 원숭이를 구매하는 기관이 아니라 생명공학연구원에 구매 '요청'을 하는 기관일 뿐인데도, 무리하게 감사가 시작됐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감사원은 이 감사에서도 특별한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해 불문 처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법알

‘그 법’을 콕 집어 알려드립니다. 어려워서 다가가기 힘든 법률 세상을 우리 생활 주변의 사건 이야기로 알기 쉽게 풀어드립니다. 함께 고민해 볼만한 법적 쟁점과 사회 변화로 달라지는 새로운 법률 해석도 발 빠르게 전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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