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패권 전쟁으로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고 있다. 돈이 전쟁을 불렀다.”
국제 에너지 전문가 백근욱 박사 인터뷰 #"에너지산업 둘러싼 냉혹한 현실 직시해야"
에너지 전문가인 백근욱 박사(전 채텀하우스ㆍ옥스퍼드에너지연구소 선임연구원)는 5일 중앙일보와 전화 인터뷰에서 40일 넘게 계속되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에너지 패권 전쟁”이라고 불렀다. 백 박사는 “도덕적인 잣대에 함몰되지 말고 사태를 냉철히 볼 필요가 있다”며 “천문학적인 규모의 에너지산업을 둘러싼 냉혹한 현실이 이번 전쟁의 막후에 도사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태가 길어질수록 이득을 보는 건 미국의 LNG(액화천연가스) 사업자들”이라며 “러시아산 가스를 싸게 사들일 중국도 뒤에서 조용히 웃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결국 피해는 무고한 우크라이나 국민과 천정부지로 치솟는 에너지 가격을 감당해야 할 한국과 같은 에너지 수입국의 국민이 보게 됐다”고 분석했다.

국제 에너지 전문가인 백근욱 박사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후과가 한국 등 아시아 LNG(액화천연가스) 수입국 국민에게 전가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서방의 대러시아 제재는 유럽 가스 시장을 뒤흔들고 있다. 러시아와 독일을 잇는 대형 가스관 사업인 ‘노르트 스트림(Nord Stream) 2’는 중단됐고, 유럽연합(EU)은 전체 수입량의 45%에 달하는 러시아산 가스 의존도를 대폭 낮추겠다고 선언했다.
바이든 행정부의 탄소중립 행보와 코로나19로 인한 경기 침체 여파로 고사 직전에 있던 미국의 셰일가스 업계엔 이게 호재가 됐다. 저렴한 러시아산 파이프라인가스(PNG) 장벽에 막혀 발도 못 들이던 유럽 시장이 열리면서다.
게다가 유럽의 가스 수급 악화가 전 세계 LNG 수요를 급격히 끌어올리며 미국산 LNG의 몸값을 키우고 있다. 올해 미국이 카타르와 호주를 제치고 세계 최대 LNG 수출국에 오를 것이란 전망이다.
반사이익 누리는 중국·인도
백 박사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본질은 향후 30~40년간 먹거리를 염두에 둔 미ㆍ러 간 에너지, 특히 가스를 둘러싼 패권 싸움”이라며 “한국 등 아시아의 LNG 수입국은 장기적으로 심각한 피해를 보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 우크라이나 사태가 에너지 수요가 집중된 아시아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나.
- “전쟁이 한 달 넘게 계속되면서 유가와 가스가격이 폭등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단기간에 끝나는 게 아니라 장기적으로 악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전례 없는 고강도 제재가 러시아 에너지 업계에 가해지면서 러시아가 야심차게 추진하던 북극 LNG 등의 사업이 큰 타격을 입게 됐다. 러시아는 시장이 놀랄 만큼 많은 LNG 물량을 싸게 공급해 전체 시장을 주도할 계획이었다. 수입국 입장에선 그런 혜택을 볼 기회는 사라지고, 매우 부담스러운 가격의 LNG 수입을 감내해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됐다.”

2030년 세계 주요 LNG 생산자.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 중국이 이번 전쟁의 반사 이익을 누린다는 평가가 나온다.
- “이미 전쟁 이전부터 중ㆍ러 양국은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에너지 협력을 강화해왔다. 그런데 서방의 대러 제재로 러시아의 돈줄이 마르면서 중국이 가격 협상에서 일방적으로 유리해졌다. 당장 독일로 가야 할 노르트 스트림 2 물량(연간 55bcm, LNG로 환산 시 약 3850만t)을 중국으로 돌려야 할 상황이다. 조급해진 러시아가 파격적인 가격 할인을 하지 않고선 중국과 연결하는 새 가스관을 놓기 힘들다. 러시아가 자발적으로 타협안을 내놔야만 하는 불리한 상황이다.”
- 쿼드(Quad: 미국ㆍ일본ㆍ호주ㆍ인도 등 4개국 안보협의체)의 일원인 인도가 대러 제재에 동참하지 않고 러시아산 석유를 매입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인가.
- “전통적으로 비동맹 노선인 인도는 러시아와 특별한 관계를 유지해왔고 우크라이나 전쟁이 유럽에서 일어난 국지전이란 시각을 보인다. 서방의 강력한 대러 제재에도 불구하고 인도가 실용주의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우크라이나 사태가 러시아와의 오랜 관계를 희생할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사할린 2' 지키는 일본
미국 주도의 대러 제재에 적극 동참하고 있는 일본의 선택도 주목된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는 지난달 31일 중의원 본회의에 출석해 일본이 지분(22.5%)을 보유한 러시아 극동 가스 개발사업인 ‘사할린 2’에서 “철수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앞서 유럽의 로열더치셸(지분 27.5%)은 사업 철수를 표명했다. 이에 대해 백 박사는 “놀라운 소식이 아니다”며 “일본 입장에서 지금 당장 사할린 2와 같은 LNG 공급처(일본 전체 LNG 수입량의 약 10% 차지)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지는 일문일답.
- LNG 수입국 입장에서 미국의 LNG 수출 급증은 어떤 의미를 갖나.
- “(유가를 배럴당 70달러로 가정할 때) 미국이 아시아에 제공하는 LNG 가격은 1MMBtu(가스측정 단위ㆍ1MMBtu=1000ft³)당 8달러대 수준이다. 반면 러시아의 민간 에너지 업체인 노바텍이 당초 내년 말부터 아시아에 공급하려고 한 북극 LNG의 가격은 6.2달러 정도다. 아시아 국가들이 미국산 LNG에 의존할 경우 이같은 추가적인 비용 부담을 계속 떠안아야 한다는 얘기다.”

미국 텍사스주의 퍼미안 분지에서 셰일가스를 생산하는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 미국 LNG 산업에 대한 아시아 국가들의 투자가 더 커질 것으로 보이는데.
- “미국의 LNG 업계는 LNG 가격을 낮춘다는 명목으로 아시아 수입국에 투자를 압박할 것이다. 이로 인해 대미 투자가 편중되면 에너지 안보 차원에서 다양한 공급원을 확보하는 정책을 펴는 것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새 자원개발 모델 찾아야"
- 서방의 대러 제재 중 특히 스위프트(SWIFTㆍ국제은행간통신협회) 결제망 배제가 미국 LNG 업계에 호재라는 시각이 있다.
- “꼭 그렇게만 볼 수는 없다. 역설적으로 러시아와 중국에 대안 체제 마련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각성시켜주는 계기가 됐다. ‘에너지 대국’ 러시아(세계 3위 석유 생산국이자 세계 1위 천연가스 수출국)와 세계 최대 에너지 수입국인 중국이 천문학적인 자금이 오가는 에너지 시장에서 자국 통화 결제를 늘리면 결국 지난 50년간 유지되던 ‘페트로 달러(Petro Dollarㆍ달러로 석유 대금을 결제하는 체제)’ 패권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최근 골드만삭스가 보고서에서 달러가 영국 파운드화의 전철을 밟아 급격히 쇠락할 수 있다고 전망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 한국의 차기 정부는 이같은 에너지 안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나.
- “남들이 가지 않는 길에 답이 있다. 일례로 아프리카 최대 LNG 생산국인 나이지리아와 중동의 주요 산유국인 이라크 등지엔 쓸모없다며 태워 없애는 플레어링 가스(flaring gasㆍ원유에 섞여서 새어 나오지만 기술ㆍ비용적인 문제로 불태우는 가스)가 많다. 한국의 대형 플랜트 건설사들이라면 충분히 LNG 수출용으로 전환할 수 있다. 문제는 자금원인데, 연기금과 산업ㆍ수출입은행 자금 등 소위 국부펀드가 나선다면 리스크를 최소화하면서 수익을 극대화하는 새로운 한국형 자원개발 모델을 만들어낼 수 있다.
- 플레어링 가스 처리는 인류가 직면한 기후변화 대처를 위해서도 중요하다. 윤석열 정부가 새 정부의 레거시(legacyㆍ업적)로 이같은 자원개발에 나선다면 전 세계가 지향하는 2050년 탄소중립 달성에 크게 기여할 뿐만 아니라 가격 경쟁력이 매우 높은 LNG 공급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아시아의 여러 신규 LNG 도입국들과 산유국들에 귀감이 되는 한국형 자원외교로 자리매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