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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동호의 세계경제전망

푸틴, 막다른 골목에 몰리자 서방과 치킨게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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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김동호 기자 중앙일보

글로벌 경제 흔드는 우크라이나 전쟁

김동호 논설위원

김동호 논설위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세계 경제를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몰아넣고 있다. 미국 주도의 경제 제재가 강화하면서 러시아 경제는 위기에 몰리고 있다. 러시아 중앙은행과 주요 은행이 국제 금융결제망에서 퇴출당하고 외국 기업의 사업 중단이 줄을 잇고 있다. 러시아 경제는 상당한 타격을 입고 있다. 설탕 등 생필품 부족으로 시민들이 쟁탈전을 벌이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전쟁은 치킨게임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외곽에 위치한 부차에서 민간인 시신 수백 구가 발견되면서 서방은 경제 제재를 한층 강화하기로 했다. 세계 경제에 미치는 파장도 커지고 있다.

국제통화·에너지·곡물시장 요동
유럽 “러시아 가스에 의존 말자”
자원무기화·경제안보 행보 가속
글로벌 공급망 30년 만에 바꿔

1 전 세계가 휘말린 경제 전쟁

우크라인 긴급구호연대 등 재한 우크라이나인들이 지난 3일 오후 서울시립미술관 앞에서 열린 러시아 규탄 및 전쟁 중단 촉구 집회에서 피켓을 들고 있다. [뉴시스]

우크라인 긴급구호연대 등 재한 우크라이나인들이 지난 3일 오후 서울시립미술관 앞에서 열린 러시아 규탄 및 전쟁 중단 촉구 집회에서 피켓을 들고 있다. [뉴시스]

전쟁 피로가 커지면서 러시아 내부의 불만도 커지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전쟁 지지자들 사이에서 서로 비난하고 책임을 전가하는 내분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푸틴이 체면을 구긴 채로는 전쟁이 끝날 것 같지 않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서양 언론들은 “어떤 형태로든 러시아가 승리한 것처럼 체면을 세워줘야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NYT는 “푸틴이 전쟁을 일으킨 건 정체성 정치의 광적인(rabid, 폭력적인, 광견병에 걸린) 형태”라고 분석했다. 정체성 정치란 민족·인종·성별·문화 등 집단 정체성을 기반으로 하는 배타적인 정치를 말한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이 동유럽을 경제·문화적으로 잠식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앞세워 러시아를 코너로 몰자 푸틴이 ‘러시아 제국’의 존재감을 보여주려고 한다는 얘기다. 영토 1위와 함께 강력한 군사력에 걸맞은 대접을 받으려는 광적인 몸부림이다. NYT가 사설을 통해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서방과의 ‘문명의 충돌’이라고도 해석하는 이유다.

세계 경제에 무슨 일이.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세계 경제에 무슨 일이.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이 충돌은 미·중 대립과 코로나 사태 못지않게 세계 경제를 흔들어 놓고 있다. 미 달러화에 대한 도전과 함께 유럽연합(EU) 회원국의 에너지믹스 변화, 곡물 가격의 급등을 불러일으키면서다. 푸틴은 경제 제재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결기를 보여주고 있다. 달러 융통이 막히자 천연가스 수출 대금을 루블화로 받고, 러시아에서 철수하는 외국기업의 자산 국유화를 선언했다.

이 조치는 외국 기업의 러시아 탈출과 세계적인 리쇼어링 바람을 가속하고 있다. 공급망 단절의 우려가 커지면서 반도체 등 핵심 물자를 자국 영토에서 생산하려는 움직임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푸틴의 전쟁이 지난 30년 글로벌 경제의 방식을 바꿔놓고 있다”며 “전 세계가 자원의 무기화와 함께 경제 안보 강화에 따라 리쇼어링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풀이했다.

2 중·러의 달러 패권 흔들기

러시아는 사실상 디폴트(채무 불이행)에 직면하자 ‘반격 카드’를 꺼내 들었다. 미 달러화 사용이 어렵게 되자 루블화 결제를 요구하고 나섰다. 견고한 달러 패권 때문에 실효성이 없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반전이 일어나고 있다. 루블화 환율은 전쟁 직후 달러당 150루블까지 폭락했다가 최근 80루블 초반까지 회복해 개전 직전 수준으로 반등했다.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는 “푸틴이 전투에서는 위력을 잃고 있지만, 경제 전쟁에서는 오히려 선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러시아는 중앙은행의 금리는 9.5%에서 20%로 급격히 올리고 자본이탈을 차단해 루블화 가치를 지켜내고 있다.

물론 이 같은 인위적인 조치가 내부적으로 휘청거리는 러시아 경제를 언제까지 떠받쳐 줄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다마키 린타로 일본 국제금융정보센터 이사장은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 인터뷰에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사태를 계기로 미 달러 패권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하고 있다”고 관측했다. 서방의 제재로 달러 융통이 어렵게 되자 오히려 루블화 결제를 늘려나가겠다는 의도라는 것이다.

러시아에 빌려준 돈이 많은 프랑스·이탈리아 등 유럽 국가들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러시아가 달러가 없으니 “배째라”면서 루블화로 상환하겠다고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마키 이사장은 “러시아 제재를 지켜보는 중국으로서도 하루빨리 달러 패권에서 벗어나려고 할 것”이라며 “전쟁이 끝나도 중국과 러시아의 달러 패권 탈출 시도는 계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국제통화기금(IMF) 역시 “경제 제재가 지속할수록 루블 결제가 늘어나면서 달러 패권을 잠식하고 기축통화 시스템이 파편화할 우려가 있다”고 경고했다. 아직 예단하기는 어렵지만, 일시적이라는 전망과 함께 달러 패권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관측이 엇갈리고 있다. 어떤 경우든 IMF가 관심을 가질 만큼 화폐 전쟁의 포연도 자욱해지고 있다.

3 에너지 전쟁 더 거세질 듯

20세기 이후 전쟁은 에너지 전쟁이 본질이라고 봐야 한다. 일본이 하와이를 침공해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것도 1941년 7월 26일 일본에 대한 미국의 석유 금수 조치가 명분이 됐다. 중동에서 강대국의 세력 다툼도 에너지 쟁탈전이 핵심 배경이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주도하는 서방의 결속이 얼마나 강고할지는 에너지 확보에 달려 있다. FT는 독일의 고민을 주목하고 있다. 독일은 앙겔라 메르켈 정부 출범 후 탈원전에 박차를 가했다. 그 대신 재생에너지를 강화했지만, 충분하지 않자 러시아 천연가스에 기대게 됐다. 기존 가스관에 더해 노드스트림2를 건설하게 된 배경이다.

우크라이나 침공 전으로 회복한 루블화 가치.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우크라이나 침공 전으로 회복한 루블화 가치.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독일에 날벼락이 됐다. 경제 제재 차원에서 노드스트림2 건설을 중단하면서다. 에너지 확보에 비상이 걸렸고, 가스관 건설 업체와 가스관이 지나는 지역은 하루아침에 파산 위기에 몰렸다. 10년째 진행된 11조원 규모의 이 사업은 러시아~독일 간 1200㎞를 가스관으로 연결한다. 인구 2041명이 사는 발트해 연안의 루브민(Lubmin)은 졸지에 ‘디재스터 투어리즘’(disaster tourism)의 성지가 되고 있다고 FT가 보도했다. 가스관 사업이 중단되면서 재앙처럼 황량해진 현장을 보러온 사람들로 넘치면서다.

FT는 “항구에 나뒹구는 거대한 가스관은 지난 세월 독일과 러시아의 경제적 결속을 보여주는 빛바랜 상징”이라며 “에너지 확보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던 독일의 절박한 현실을 드러내는 장면”이라고 서술했다. 에너지는 결국 푸틴에게 지금도 큰 지렛대가 되고 있다. 미국 편에 선 국가에는 가스 공급 중단 또는 루블화 결제로 맞서면서 중국·인도를 비롯해 침공에 눈 감는 국가에는 “가스 공급을 계속하겠다”면서 에너지 외교를 펼치고 있다. FT는 “유럽이 러시아 가스 의존도를 줄어야 푸틴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4 화석연료 탈피 빨라지나

미국은 비축유를 대량 방출하면서 동맹국을 달래고 있지만, 낙관하기는 어렵다. 미국은 중동 산유국과 베네수엘라를 통해 원유 공급을 늘리는 외교도 펼치고 있으나 산유국의 자원 무기화 때문에 뜻대로 되지 않고 있다. 미국 스스로 공급량을 늘려도 운송 능력 확보가 문제다. 러시아 가스관에 의존해온 유럽 역시 저장 시설이 부족하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이런 흐름은 결국 화석연료의 탈피를 가속할 것”이라고 봤다. 최근 유럽연합은 2030년까지 러시아로부터의 에너지 독립을 달성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가장 확실한 대안은 원자력 확대다. 프랑스는 ‘완전한 에너지 독립’을 목표로 원전 6기를 추가 건설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영국은 차세대 원전을 건설해 화석연료에서 탈피하겠다고 밝혔다. 이코노미스트는 이런 흐름을 타고 러시아 같은 ‘석유 국가’(petrostates)가 퇴조하고 청정에너지를 생산하는 ‘전기국가’(electrostates)가 떠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이 과정에서 지정학적 지각변동이 예상된다. 수소전기와 신재생에너지를 비롯한 청정에너지는 배터리 제조에 없어선 안 될 리튬을 비롯해 희토류를 가진 나라가 힘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NYT 역시 “유럽은 청정에너지를 확대할 수밖에 없다”면서 “이행 과정에서 고통과 리스크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했다. 요컨대 자원의 무기화 때문에 공급이 불안정한 화석연료에서 탈피해 재생에너지든 원자력이든 자체적으로 에너지를 확보하는 바람이 거세다. 원유 한 방울 나지 않는 한국에 시사점이 크다. 최근 휘발유는 리터당 2000원을 넘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