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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역지사지(歷知思志)

미추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유성운 기자 중앙일보 기자
유성운 문화팀 기자

유성운 문화팀 기자

주몽의 친아들에 밀린 온조와 비류는 남쪽으로 떠났다. 비류는 신하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지금의 인천에 미추홀을, 온조는 지금의 서울에 위례성을 각각 세웠다. 결과는 잘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는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가 없었다. 위례성으로 와서 보니, 도읍은 안정되고 백성들은 편안하고 태평하므로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가 죽었다”고 전한다. 비록 설화라고는 해도 인천시민 입장에서는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을 법한 내용이다.

미추홀 .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미추홀 .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비류는 왜 미추홀에 터를 잡았을까. 여러 가설 중 하나는 비류가 해상무역을 업으로 하는 세력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땅이 습하고 물이 짜다”는 것은 농경의 시각에서 봤을 때다. 비류가 농업세력이었다면 굳이 정착했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다를 통해 무역하는 입장에서는 딱히 불리한 조건이 아니다. 그리스 아테네도 농업을 하기엔 건조한 땅이었고, 해상무역으로 중흥했다.

초기에는 미추홀이 앞서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설화에서 비류가 형으로 나온 데서도 알 수 있다. 다만 나중에 온조의 위례성 세력에 통합된 것을 보면 비류가 세운 미추홀은 무역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이후 인천은 역사에서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위상이 달라진 것은 근대 이후다. 강화도조약으로 개항한 인천은 신문물이 시작되는 별천지가 됐다. 짜장면·쫄면·야구 등이 인천에서 시작돼 전국으로 퍼졌다. 인천국제공항은 명실상부 대한민국의 관문이다. 비류가 꿈꿨던 미추홀의 가치는 근대 이후 실현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