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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아닌 구석 앉은 대통령 오바마…이러니 軍지휘 통했다 [Focus 인사이드]

중앙일보

입력

미국의 정치학자인 리처드 K. 베츠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바람직한 정치와 군사의 관계를 ‘평등한 대화, 불평등한 권한’으로 정의했다. 즉, “민주주의 국가에서 민간 지도자가 최종 결정권한을 가지는 것(불평등한 권한)은 당연하다. 이는 민간 지도자들도 군사 지도자들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는 것(평등한 대화)을 전제로 한다”는 의미다. 이러한 개념은 “전쟁이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속”이라는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명제와 일치한다.

대통령이 구석에 앉은 미국

2011년 5월 2일(파키스탄 현지시간), 백악관 주요 인사들이 오사마 빈 라덴 제거 작전인 넵튠 스피어의 과정을 위성중계로 지켜보고 있다. 당시 사진은 ‘평등한 대화, 불평등한 권한’이 구현되는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미국 시간으로 2011년 5월 1일 백악관 상황실. 당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조 바이든 부통령이 구석에서 넵튠 시피어 작전의 진행을 지켜보고 있다. 백악관

미국 시간으로 2011년 5월 1일 백악관 상황실. 당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조 바이든 부통령이 구석에서 넵튠 시피어 작전의 진행을 지켜보고 있다. 백악관

4성 장군뿐만 아니라 버락 오바마 대통령조차 화면을 가장 잘 관찰 수 있는 자리를 공군 준장에게 양보했다. 상황실의 주요 장비를 조작하면서 필요시 현지 부대와 연락을 취하는 임무가 주어졌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각자의 역할에 기초한 ‘평등한 대화’를 쉽게 상상할 수 있다.

‘평등한 대화’ 속에서, 정치 지도자들은 군사 지도자들로부터 전문성에 기초한 조언을 받을 수 있다. 이를 계기로, 군대도 더욱 높은 수준의 전문성을 구비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이러한 선순환이 ‘집단지성’에 기초한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가능하게 한다.

‘건강한 민군관계’는 군대의 하부조직까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평등한 대화’는 모든 전투원들에게 주도적으로 판단하고, 결심해, 행동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군사 선진국 군대들이 ‘임무형 지휘’를 채택하는 이유다. 결국 이러한 군대가 전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높을 수밖에 없다.

수십 미터 떨어져 지시하는 러시아

2022년 2월 21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침공 3일 전), 러시아 모스크바의 크렘린 궁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국가안보회의를 주관하고 있었다. 당시 사진은 ‘평등한 대화, 불평등한 권한’이 아니라, ‘불평등한 대화, 불평등한 권한’만 가능한 장면이다.

2022년 2월 21일 러시아 모스크바의 크렘린궁에서 열린 회의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지시사항을 전달하고 있다. 크렘린궁

2022년 2월 21일 러시아 모스크바의 크렘린궁에서 열린 회의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지시사항을 전달하고 있다. 크렘린궁

푸틴은 수십 미터 거리에서 보고하던 세르게이 나르쉬킨 해외정보국(SVR) 국장을 반복적으로 다그친다. “그게 무슨 뜻인가? 협상을 시작하자고 제안하는 건가? 말을 해봐, 말을!” 결국 궁지에 몰린 해외정보국장이 푸틴이 원하는 말을 ‘복창’하자, 그때서야 “좋다. 자리에 가서 앉으라”고 지시한다.

‘불평등한 대화’ 속에서, 정치 지도자들은 군사 지도자들로부터 전문성에 기초한 조언을 받을 수 없다. 대화가 불평등하다고 느끼는 순간, 군사 지도자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판단을 정치 지도자들에게 맞추려 하기 때문이다. 해외 언론들은 푸틴 대통령이 극소수의 이너서클(inner circle)에 둘러싸여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특히, 푸틴 집권기에 존재감을 급격히 확대한 ‘정보기관 출신들’(일명, 실로비키)이 주목받고 있다. 이러한 악순환 속에서 발휘되는 것은 ‘집단지성’이 아니라 ‘집단사고’를 통한 ‘비합리적인 의사결정’이다.

특히, 푸틴이 집권 후 임명한 3명의 국방장관도 이와 유사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세르게이 이바노프(2001~2007)는 푸틴의 대학 동기이자 정보기관(KGB)에서 같이 근무했다. 아나톨리 세르듀코프(2007~2012)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절 맺은 인연 덕분에 가구사업을 하다 국세청장을 거쳤다. 세르게이 쇼이구(2012~)는 건축기사 출신으로 비상대책부 장관, 정당 대표를 거치면서 ‘대장’ 계급장을 달았다.

언론은 쇼이구를 우크라이나 침공을 부추긴 결정적인 인물로 보도하고 있다. 일부 서방국가의 정보관리들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초기 침공계획이 러시아 총참모부가 아니라 정보기관에서 작성한 것처럼 보인다”는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

‘불평등한 대화’ 속에서, 군의 전문성도 저하될 수밖에 없다. 모든 구성원들이 군에서 자신의 성장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가 ‘군사적 전문성’이 아님을 인식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군사적 전문성을 쌓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비율은 점차 줄어들 것이다.

조직문화는 ‘위에서 시키는 과업만 하고, 구체적인 지침을 기다리는 것’으로 변질한다. 이러한 환경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군인은 주도적으로 판단하고, 결심하여, 행동할 수 없다. 결국 이러한 군대가 승리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실제로 러시아군 지휘관들은 준비돼 있지 않았고, 일부 병사들도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우크라이나 국경을 넘었다는 증언이 나온 바 있다. 지난달 7일(현지시간), 뉴욕 타임스(NYT)는 “러시아군이 게라시모프 총참모장을 중심으로 과도하게 중앙집권화돼 있다. 부사관과 병사들은 위임된 권한이 없어 융통성 있는 전투수행이 불가능하다”고 분석하였다.

한국의 국방혁신에 주는 시사점은?  

미국의 언론인인 토마스 릭스는 『제너럴』에서 “민간 지도자들은 군과 열띤 토론이 불편하더라도 이를 수용할 것이라는 신호를 군에 보내야 한다. 때때로 논쟁적인 대화는 건전한 민군담론의 신호이다. 대신, 군사 지도자들은 결정이 내려지면 명령을 강력하게 수행할 것이며, 반대 입장을 기자들과 공유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이는 ‘평등한 대화, 불평등한 권한’의 핵심을 간결하게 표현한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지난달 31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준장진급자 삼정검 수여식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이 준장진급자들에게 경례를 받고 거수경례로 답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지난달 31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준장진급자 삼정검 수여식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이 준장진급자들에게 경례를 받고 거수경례로 답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새로운 정부는 광범위한 국방혁신을 준비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국방개혁 과정에서 ‘평등한 대화, 불평등한 권한’이 제대로 구현됐는지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정치 지도자와 군사 지도자의 관계는 국가통수체계의 정점에서부터 전투현장의 병사들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특히, ‘평등한 대화’는 ‘군의 전문성’이 전제돼야 한다. 그동안의 국방개혁은 이에 대한 관심이 소홀했다. 예를 들면, 한국군 장교들이 대령으로 전역할 때까지(약 30년 기준) 수료하는 의무 교육기간은 모두 합쳐도 약 2년에 불과하다. 이러한 수치는 지난 수십 년 동안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전쟁의 양상은 속도가 더욱 빨라지고 복잡해지고 있다. 군사 선진국들은 이러한 추세를 반영하여 의무교육 기간을 약 4~5년으로 늘렸다. 한국군도 전문성 향상을 위한 교육기간을 획기적으로 늘리고, 민간과 소통하며 공부할 기회를 대폭 확대해야 한다. 국방혁신 과정에서 인재육성을 위한 교육, 보직 및 진급 등에 대한 대대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민주주의가 지향하는 민군관계는 ‘평등한 대화, 불평등한 권한’이다. 미국과 러시아의 상반된 사례가 한국의 국방혁신에 유의미한 교훈을 제공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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