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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중앙] 판타지 속 판타지를 찾아서 51화. 위그드라실

중앙일보

입력

온 세계를 연결하는 한 그루의 나무가 있다면

먼 옛날, 세계가 창조되었을 때 주신 오딘은 세계의 중심에 한 그루 나무를 심었습니다. 그 나무는 계속 자라나 우주로 뻗어 나갔지요. 위로는 신들의 세계인 아스가르드로부터, 인간 세계인 미드가르드를 거쳐, 지하의 나라 니플헤임에 이르기까지. 자라난 가지와 뿌리는 우주를 이루는 아홉 세계 모두에 이르게 됐어요. 그리하여 우주를 뒤덮은 거대한 나무가 생겨나니 신들은 이를 위그드라실이라고 불렀습니다.

위그드라실은 게르만 신화에서 가장 신성한 장소로서 세계를 이루는 나무를 부르는 이름이에요. 또한 ‘오딘의 말(동물)’이라는 단어로 죄수의 목을 매달아 처형하는 도구인 ‘교수대’라는 뜻도 가지고 있죠. 이는 게르만의 최고신이자 마법과 지혜의 신, 오딘이 이 나무에 매달렸기 때문입니다. 신화에 따르면, 오딘은 위그드라실의 가지에 목을 매단 채 자신의 창으로 몸을 찔렀다고 해요. 그렇게 죽음을 맞이한 오딘은 9일 동안 저승을 여행하며 신성한 문자, 룬(Rune)의 지혜를 얻어 우주에서 가장 지혜로운 이가 되었습니다.

위그드라실은 게르만 신화에서 가장 신성한 장소로서 세계를 이루는 나무를 부르는 이름이다. 프리드리히 윌헬름 하이네, 1886.

위그드라실은 게르만 신화에서 가장 신성한 장소로서 세계를 이루는 나무를 부르는 이름이다. 프리드리히 윌헬름 하이네, 1886.

위그드라실엔 사슴이나 뱀 같은 생명들이 살면서 잎, 가지를 먹지만, 나무는 다시 자라기에 문제없죠. 지하의 샘에 사는 니드호그라는 용이 뿌리를 갉아 먹으며 독을 뿌리지만, 운명의 세 여신이 끊임없이 생명수를 부어주며 나무를 지킵니다. 세계와 우주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위그드라실은 무수한 나무 중에서도 가장 으뜸이라고 할 수 있죠. 세계의 신화에는 ‘세계의 나무’나 ‘생명의 나무’라는 나무가 많이 등장합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에 이르기까지, 옛사람들은 나무를 신성한 존재라고 믿었기 때문이죠.

예로부터 인간은 자연의 벗인 나무를 바라보며 살아왔습니다. 겨울이면 떨어지지만, 봄이면 다시 피는 활엽수 잎을 보며 성장과 죽음 그리고 재생을 느꼈고, 겨울에도 푸른 잎을 가진 상록수는 영원한 불멸의 존재라고 생각했죠. 나무에는 정령이 살며, 함부로 베어내면 천벌을 받는다고 생각한 이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세계의 나무들이 거대한 생명의 흐름을 이룬다고 생각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설정은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영화 ‘아바타’ 같은 작품에 영감을 주었죠.

하늘 높이 뻗어 오른 나무와 대지를 뒤덮은 숲은 자연의 신비 그 자체였습니다. 인간보다 훨씬 오래, 영원히 사는 듯한 나무는 오랜 지혜의 상징이기도 했죠. 오딘이 위그드라실을 통해 룬을 얻은 것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반지의 제왕’ 같은 작품에선 앤트처럼 지혜롭고 현명한 나무 종족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나무처럼 매우 느리고 둔해 보이지만, 더없이 지혜롭고 현명한 존재, 동시에 분노하면 그 무엇도 상대할 수 없는 무서운 종족이죠. 물론 공포의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빽빽한 잎과 가지로 낮에도 밤처럼 어두운 숲속은 무엇이 숨어있을지 모르는 미지의 세계였어요. 중세 시대 유럽 사람들에게는 마녀나 괴물이 사는 마계로 여겨졌죠. 로빈후드 같은 도적이 숨어 살아가는 소굴이기도 했어요.

한없이 긴 수명과 놀라운 생명력, 그리고 튼튼한 몸을 지닌 존재이지만, 그런 나무에도 약점은 있습니다. 바로, 불에 약하다는 점이죠. 게르만 신화에선 위그드라실이 신들의 전쟁, 라그나로크 마지막에 수르트가 일으킨 불에 의해 완전히 타버리면서 세상이 멸망하는데, 실제로도 세계 각지에서 불길로 인해 수많은 나무가 사라집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얼마 전 경북 울진과 강원도 강릉·삼척 등지에서 일어난 산불로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죠.

숲이 주는 은혜로 인해 사람들이 나무를 끊임없이 베어내는 문제도 있습니다. 불과 수백 년 전에는 장작을 얻기 위해 세계 전역의 나무들이 거의 사라졌는데, 특히 우리나라에선 온돌에 사용할 장작 때문에 거의 모든 숲이 벌거숭이가 되었다고 하죠. 나무가 사라지면, 단순히 장작이나 열매 같은 은총이 줄어드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나무는 뿌리를 통해 흙이 날아가지 않게 잡아주며, 습기를 보존하는 역할을 합니다. 잎에서 증발한 물은 나무가 뿜어내는 여러 성분과 함께 하늘 위로 올라가 구름을 만들어내고 비를 내려줘요.

“숲은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물의 통로”라고 누군가는 이야기했습니다. 동양의 오행에서 나무는 물에 의해 만들어지지만, 반대로 나무가 물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이야기죠. 때문에, 나무가 사라지면 사막으로 변하고 생명은 살 수 없게 돼요. 당연히 세계는 파괴될 것입니다. 신화에서 나무가 생명이자 세계라는 것은 과학적으로 보아도 그럴듯하죠.

세계수 위그드라실은 라그나로크의 불길로 사라졌지만, 그 가지 깊은 곳에 두 인간이 숨어 살아남게 됩니다. 그들이 바로 새로운 인류의 조상이에요. 열매나 장작 같은 은총만이 아니라, 세계의 안정을 좌우하며 생명을 주는 나무. 그들은 불에 타면서까지 인간을 지켜준 것이죠. 그야말로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말에 잘 어울리는 일이 아닐까요.

전홍식 SF&판타지도서관장

전홍식 SF&판타지도서관장

※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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