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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 20% 털려도 '대러 제재' 불참…EU가입은 서두른 이 나라

중앙일보

입력

지난달 27일 조지아 수도 트빌리시에서 시민들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등신대를 불에 태우며 반전 시위를 벌이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달 27일 조지아 수도 트빌리시에서 시민들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등신대를 불에 태우며 반전 시위를 벌이고 있다. [AP=연합뉴스]

"정말로, 국민들이 국가보다 나을 때가 있다."

우크라이나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의 침공 이틀째인 지난 2월 25일, 이웃나라 조지아 국민을 추켜세웠다.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수도 트빌리시 거리에 시민 수천 명이 쏟아져 나와 러시아를 규탄하는 반전(反戰) 시위를 벌였기 때문이다.

조지아 정부의 움직임은 달랐다. 개전 6주차에 접어든 지금까지 대(對)러 제재는 물론 우크라이나 지원에 동참하지 않고 있다. 지난달 31일 젤렌스키 대통령은 조지아 주재 우크라이나 대사를 소환해 "무기, 제재, 러시아 기업에 대한 제한을 끌어내지 못할거면 제발 다른 일자리를 구하라"고 강하게 질책했다.

조지아 정부, 왜 러시아 눈치보나

조지아는 러시아 남서부 지역과 국경을 맞댄 작은 나라다. 인구 400만 명, 국토 면적은 6만9700㎢로, 한반도의 3분의 1 정도다. 우크라이나처럼 1991년 소련 해체 후 독립했다.

옛 소련의 일부였던 조지아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 러시아 눈치부터 살폈다. 이라클리 가리바슈빌리 조지아 총리는 개전 초기 "유럽의 대러 제재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며 러시아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했다.

조지아(옛 그루지야).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조지아(옛 그루지야).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가리바슈빌리 총리가 내세운 이유는 "러시아를 제재하면 조지아의 국익에 해가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러시아는 조지아의 주요 무역국이다. 지난해 1분기 기준, 러시아(11.9%)는 터키에 이어 조지아의 2위 교역 대상국이었다.

근본적인 이유는 경제가 아닌 뼈아픈 역사다. 14년 전인 지난 2008년, 러시아는 조지아를 침공해 4일 만에 항복을 받아냈다. 이때 조지아는 항복 조건으로 북부 자치주 남오세티야, 북서부의 압하지야 영토를 러시아군 통제 하에 넘겨줬다. 조지아 전체 국토의 5분의 1에 달한다.

이후 러시아는 울타리와 도랑을 경계로 삼아 러시아의 통제구역과 조지아 영토를 갈랐다. 경계를 넘어오려는 조지아인들은 러시아군에 체포된다.

전쟁엔 개입 않고 EU 가입 서둘러…"전략적 딜레마"

조지아 정부는 대러 제재에는 불참했지만, 지난달 2일 유럽연합(EU) 회원국에 공식 가입 신청서를 제출했다. 당초 조지아는 오는 2024년 EU에 가입 신청할 방침이었으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지켜보며 서둘렀다는 관측이 나왔다.

뉴욕타임스(NYT)는 이같은 조지아의 모호한 태도를 '전략적 딜레마'라고 설명했다. 러시아가 일으킨 전쟁에 대해 숨죽이고 관망하면서 자국을 보호할 방편을 찾는 조지아의 상황은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채 서방의 영향력을 사이에 둔 '구소련 연방국'의 숙명"이라는 것이다.

최근 여론조사 결과, 조지아 국민의 60%가 우크라이나 사태에 정부가 강경한 태도를 취하길 바란다고 응답했다. [AP=연합뉴스]

최근 여론조사 결과, 조지아 국민의 60%가 우크라이나 사태에 정부가 강경한 태도를 취하길 바란다고 응답했다. [AP=연합뉴스]

정부의 태도에 정치권 반응은 엇갈린다. 집권당 '조지아의 꿈'의 지오르지 켈라슈빌리 의원은 NYT에 "우리는 화산 옆에 살고 있다"며 "그 화산이 방금 폭발했고, 용암이 반대편 산에서 흘러내리는 중"이라며 조마조마한 심경을 표현했다. 반면 기오르기 가하리아 전 총리는 "정부의 분명하지 않은 태도는 국제사회에 '조지아는 서방과 유대에는 관심 없으며, 지원받을 가치가 없다'는 신호를 보낸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2008년 전쟁 떠올라" 국민 여론 '강경'

조지아의 국민 여론은 정부의 태도와 전혀 다르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60%에 달하는 국민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정부가 좀 더 강경한 입장을 보여야 한다고 답했다. 트빌리시의 주거단지와 사무 지역 곳곳에는 우크라이나 국기가 내걸려 있고, 정부의 모호한 입장을 비판하는 시위가 열리고 있다. 일부 집주인들은 러시아인 세입자에게 아파트 임대를 거부하기도 한다.

러시아의 침공 이후 실향민이 된 마르기쉬빌리(57)는 NYT에 "우크라이나 뉴스를 보고 2008년이 떠올랐고, 고향 생각에 눈물이 났다"며 "정부는 러시아를 제재하고 보이콧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지아의 유명 소설가인 다토 투라쉬빌리는 "(조지아와 우크라이나는) 땅도 나라도 다르지만 같은 하늘, 같은 적을 갖고 있다"며 "러시아는 키이우를 함락하면 그 다음은 트빌리시를 가져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살로메 주라비쉬빌리 조지아 대통령. [로이터=연합뉴스]

살로메 주라비쉬빌리 조지아 대통령. [로이터=연합뉴스]

남오세티야 "러시아 연방 편입하겠다"

러시아가 심어놓은 '분쟁의 불씨'인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에서의 변화 조짐도 조지아 국민들에게 공포다. 지난달 31일 CNN 방송에 따르면 영국 국방정보국은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침공을 강화하기 위해 조지아 내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 지역에 병력 1200~2000명을 재배치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이 와중에 남오세티야는 지난달 30일 러시아 연방으로 편입하기 위해 법적 절차를 밟겠다고 나섰다. 이곳에는 조지아 국민 5만명(1.25%)이 살고 있다. 압하지야는 남오세티야의 결정을 지지한다면서도 러시아에 편입할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다비드 잘칼리아니 조지아 외무부 장관은 "남오세티야에서 진행되는 어떤 종류의 주민투표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 여당 의원 베카 다비툴리아니는 "남오세티야의 계획이 도발에 해당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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