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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예수뎐] 어떻게 하늘에 가닿을까…'머무는 바 없이' 청하고 기도하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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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예수뎐]  

루카 복음서(누가복음)에서 예수는 더 자세하게 일러준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복음서 11장 11~13절)

(42)어떻게 기도해야 하늘에 가닿을까

아무리 악한 사람도 자식에게는 잘한다. 왜 그럴까. 자기 자신과 자식을 하나로 보기 때문이다. 하느님도 자녀를 그렇게 본다. 둘로 보지 않는다. 성부와 성자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선을 청하면 생선을 준다. 뱀을 주지 않는다. 달걀을 청하면 달걀을 준다. 독을 품은 전갈을 주지 않는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가 올린 기도는 일종의 나침반이다. 우리의 기도가 하늘에 가 닿으려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그 단초를 보여준다. [중앙포토]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가 올린 기도는 일종의 나침반이다. 우리의 기도가 하늘에 가 닿으려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그 단초를 보여준다. [중앙포토]

문제는 우리다. 우리가 청할 때, 우리가 찾을 때, 우리가 두드릴 때가 문제다. 왜 그럴까. 우리는 머물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문이 열리지 않는다. 아무리 두드려도 문이 열리지 않는다. 하느님이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 문을 닫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예수의 메시지 앞에는 거대한 괄호가 생략되어 있는 셈이다. 그 괄호 속에 들어갈 말이 ‘머무는 바 없이’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이 메시지 앞에 ‘머무는 바 없이’가 생략되어 있다. 그 구절을 넣으면 이렇게 된다. “머무는 바 없이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머무는 바 없이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머무는 바 없이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화를 내는 사람들도 있다. 왜 불교 경전의 구절을 그리스도교 성경에다 갖다 붙이느냐며 따진다. 문자 속에 담긴 이치는 보지 못하고, 문자만 보기에 그렇게 말한다. 우리가 종교를 통해 궁극적으로 찾는 것은 손가락이 아니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이다. 그 달이 우리의 삶을 평안하고 자유롭고 행복하게 한다.

그럼 예수는 ‘머무는 바 없이’를 아예 언급하지 않았을까. 이건 불교의 『금강경』에만 있는 구절일까. 그렇지 않다. 예수는 이미 ‘머무는 바 없음’을 설했다. 성경 곳곳에서 숱하게 “머물지 마라”라고 강조했다. 그것이 뭘까. 그리스도교에서는 그것을 뭐라고 표현했을까. ‘내맡김’이다. 하느님을 향한 전적인 내맡김. 그것이 바로 ‘머무는 바 없음’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가 땀을 피처럼 흘리며 기도할 때 제자들은 잠에 떨어져 있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가 땀을 피처럼 흘리며 기도할 때 제자들은 잠에 떨어져 있었다.

겟세마니(겟세마네) 바위에서 기도할 때 예수는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있었다. 제자들을 데리고 얼른 달아나면 예루살렘을 벗어날 수도 있었다. 십자가 죽음을 면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도망치지 않았다. 피로에 절어 곯아떨어진 제자들을 뒤로한 채 예수는 홀로 엎드려 기도했다.

“가능하면 이 잔이 저를 비껴가게 하소서.”

그랬다. 예수는 죽음을 원하지 않았다. ‘십자가의 죽음’이 자신을 비껴가길 바랐다. 그것이 예수의 뜻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나의 뜻’에 접착제를 바르지 않았다. 거기에 머물지 않았다. 자신의 집착을 허물고 머무는 바 없이 기도했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그렇게 기도했다. 머무는 바 없을 때 기도가 통한다. 그럴 때 문이 열린다.

갈릴리 호수에 노을이 지고 있다. 예수는 이 호수 일대에서 수시로 산에 오르며 기도를 했다. [중앙포토]

갈릴리 호수에 노을이 지고 있다. 예수는 이 호수 일대에서 수시로 산에 오르며 기도를 했다. [중앙포토]

사람들은 묻는다. “그러면 자식이 대입 수능 시험을 치를 때는 어떡해야 하나. 어떻게 기도해야 하나.” 자식의 수능 시험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살면서 마주치는 온갖 파도들. 높고 낮은 파도들, 크고 작은 파도들 앞에서 우리는 기도를 한다. 그럴 때는 어떻게 기도를 해야 할까. 어떻게 기도해야 문이 열릴까.

먼저 나의 기도에 손가락을 대봐야 한다. 끈적끈적한 접착제가 묻어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우리 아이가 대학 입시에 절대 떨어져서는 안 돼. 어떤 일이 있어도 합격해야 해. 떨어지는 건 있을 수도 없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야. 그러니 하느님, 꼭 합격하게 해주세요”라며 마음을 꽉 움켜쥐고 기도한다면 어찌 될까. 그런 집착의 기도가 과연 ‘출항의 뱃고동’을 울릴 수 있을까. 아니다. 오히려 신을 향해 떠나려는 기도를 스스로 붙들고 마는 셈이다.

예수가 겟세마네에서 기도할 때 엎드렸다고 전해지는 바위. 그 위에 교회가 세워져 있다. [중앙포토]

예수가 겟세마네에서 기도할 때 엎드렸다고 전해지는 바위. 그 위에 교회가 세워져 있다. [중앙포토]

하얀 도화지가 있다. 그것을 신의 속성이라고 하자. 그 위에 검은색 잉크가 한 방울 떨어졌다. 그것을 나의 집착이라고 하자. 우리가 집착을 가지고 기도를 하면 어찌 될까. 잉크 속에서만 맴돌게 된다. 아무리 애를 써도 잉크 바깥으로 나가지 못한다. 왜 그럴까. 나의 기도에는 집착의 접착제가 발라져 있기 때문이다.

반면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는 기도는 다르다. 집착을 내려놓는 기도는 다르다. 거기에는 잉크도 없다. 그래서 갇히지 않는다. 그런 기도는 고스란히 도화지에 전달된다. 이미 도화지 속에서 기도를 하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속성이 같을 때 서로 통하는 법이다. 기도도 마찬가지다. 집착하는 기도와 집착을 내려놓은 기도는 다르다. 집착을 내려놓을 때, 우리는 비로소 신에게 모두 맡길 수 있다. 그런 기도는 뱃고동을 울리며 항구를 떠나간다. 신의 속성으로 녹아 들어간다.

그러면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 자식의 대학 입시를 위해서 말이다. “주님, 저희 아이가 차분한 마음으로 시험을 대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두려움 없이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이의 시험을 위해 제가 지혜롭게 뒷바라지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저의 집착이나 욕심으로 인해 아이에게 심적인 부담을 주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아이와 제가 삶의 파도를 받아들이듯, 시험 결과가 어떠하든 기꺼이 수용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골고다 언덕의 성묘교회 안에서 순례객들이 미사를 드리며 기도하고 있다. [중앙포토]

골고다 언덕의 성묘교회 안에서 순례객들이 미사를 드리며 기도하고 있다. [중앙포토]

만약 이런 식의 기도라면 어떨까. 여기에는 ‘머무름’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내려놓음’이 보인다. 머물지 않는 기도는 항구를 떠난다. 바다를 향해, 신의 마음을 향해 뱃고동을 울리며 출항한다.

그럼 어찌해야 할까. 어떡해야 신의 마음에 우리의 기도가 가닿을 수 있을까.

〈‘백성호의 예수뎐’은 43회에서 계속됩니다. 매주 토요일 연재〉

짧은 생각

프로 골퍼 최경주 선수를
인터뷰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그는 PGA 투어에서 우승 경쟁을 하던
톱 클라스였습니다.

최 선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골프는 파이널 라운드로 갈수록
   압박감이 심해진다.
   종교가 없을 때
   내가 받는 불안감의 수치를 ‘10’이라고 하자.
   그런데 종교로 인해 저는 ‘5~6’ 정도의
   압박감을 받으며 경기를 한다.”

궁금했습니다.
종교가 있으면 왜 압박감의 수치가 내려가지?
하나님이 골프 스코어까지
일일이 챙겨주신다고 생각하는 건가?

저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왜 압박감이 내려가는지 말입니다.

  “가령 드라이버로 티샷을 한 후에
   페어웨이를 걸어간다.
   첫 샷과 두 번째 샷,
   그 사이의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는가가
   아주 중요하다.”

신인들은 온갖 생각을 다 한다고 했습니다.
아이언을 꺼내서 칠까,
공이 벙커에 빠졌으니 나무를 피해서
이쪽으로 꺼낼까.
다음 샷에서는 버디를 노려야지 등등
숱한 고민을 하면서 걷는다고 했습니다.

그로 인해 심장 박동수가 빨라지고,
결국 무너지고 만다고 했습니다.

최 선수의 지적은 이랬습니다.

  “심장박동 수가 빨라질수록
   한 발짝 물러나야 합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최경주 선수는 첫 샷과 두 번째 샷,
그 사이를 걸으며 무엇을 하는지 말입니다.

  “나는 골프 생각을 안 합니다.
   코스 매니지먼트에 대한 수읽기는
   경기 시작하기 전에 모두 끝냅니다.
   시합 중에 그걸 생각하면
   결국 에너지만 소모하게 됩니다.
   대신 나는 성경 구절을 외며 걷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쪽지를 보면
   스코어 카드를 보는 줄로 알지만,
   실은 성경 구절을 읽는 것입니다.”

그는 성경 구절을 읽으면서 자동적으로
골프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더 편안하고,
힘을 뺀 자연스러운 스윙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최 선수의 대답을 들으며
저는 그것이 그의 기도라고 생각했습니다.

PGA투어의 마지막 라운드,
중요한 승부처에서 그가 올리는 기도로 보였습니다.
그 기도에서 그는
스윙을 붙들지 않고
스윙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러운 리듬에
자신의 몸과 마음을 맡겼습니다.

그것은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는 기도였습니다.
출항의 뱃고동을 울리며
대해(大海)를 향해 떠나가는 기도입니다.

참 지혜로운 기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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